강군이 일년동안 휴직계를 내고 뉴질랜드로 떠났다고 한다. 20일전쯤 우연한 기회에 한번 모이자고 전화했더니 휴대폰을 안받더란다. 집전화번호를 알아내서 와이프하고 통화를 했는데 신문사에다간 무급휴직을 하겠다 하고 혼자 떠난지 달포쯤 됐다고 한다.
지난 연말 망년회때 막걸리 몇잔 걸친 후 밤 열한시쯤 안국역에서 지하철을 함께 탔다. 별로 말이 없는 친구라 우린 덤덤하게 몇정거장을 갔는데, 갑자기 날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남자의 후반생>이라는 책을 읽어보았느냐 뜬금없이 물었다. 평소 답지 않게 강군은 <범려>라는 인물에 대해 한참 얘기했다.
취기가 얼근한테다 전철 안이 후덥지근해 그의 말이 잘 들리진 않았지만, <이 녀석 뭔가 딴 마음 먹고 있는 거 아냐>하는 직감이 딱 꽂혔다. <밖에 나갈 일이 있을 것 같애.><그래, 너도 이제 연수나 특파원갈 때가 됐지. 언제쯤 갈 것 같냐?><글쎄, 빠르면 빠를 수도 있고. 아직 잘 모르겠어. 하지만 오래 걸릴 것 같진 않아.><결정되면 꼭 연락해라.> 평촌까지 가야하는 강군은 다음 역에서 내려 코트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막차를 잡으러 걸어갔다.
그가 떠났다는 얘길 듣고 사람들은 <짜식, 전화 한 통 없이 떠났네.>라고 한마디씩 했다. 하지만 나는 <그래서 그때 그랬구나>하고 무덤덤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리 헤어진 후 한달쯤 있다가 떠난 셈이다. 그것도 회사에서 보내주는 게 아닌, 자비 외유를 말이다. 그와는 대학을 같이 다니고, 같은 직장에서 일년반쯤 같이 일했다. 뭔가 절박함이 느껴진다. 단신으로 떠난 것도 그렇고, 뉴질랜드, 일년휴직 등의 단어들이 풍기는 냄새가 심상치 않다.
뉴질랜드에 무슨 연고가 있단 얘기도 들은 적이 없다. 우연히 며칠전에 황순현에게 권혁종선배가 그곳으로 이민을 갔단 말을 들었다. 거기서 교민신문을 만든다 했는데 강군 얘길 듣자마자 느닷없이 그 생각이 들었다. 공부하러 갔거나 머리식히러 떠났을 리는 없다. 아마 옮겨갈 수 있는지 확인하러 갔을 것이다. 일년 말미를 얻어 정착기반을 만들려는 생각인 듯 하다. 정 안되면 회사에 다시 들어가 때를 기다리겠다는 생각일게다. 여하튼 90% 상상이지만 그는 이 땅을 떠날 생각을 굳힌 것 같다.
한때는 이민가는 사람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까지 맺은 인간관계, 이땅에서 써먹을 만한 학벌과 직장경험, 그리고 무엇보다 여기서 키워왔던 야망과 기개는 어찌하고 하루아침에 탈탈 털고 떠날 수 있는 걸까. 지난 세월이 너무 아깝고 앞으로의 생활이 너무 불안하게 보였다. 그러나 지금 강군이 내게 전화해서 <어, 나 이민가기로 했어.>라고 하면 뭐라 할것인가. <너 미쳤냐, 어딜 간다는거야.>라고 할까, 아니면 <좋겠다. 그래 먹고 살 수만 있다면 가는게 좋지.>라고 할까.
식구들을 파리로 보내면서 두가지를 다짐했다. 첫째, 아이들은 이 나라 대학에 보내지 않겠다. 다시말해 우리나라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어떤 공부도 시킬 생각이 없다. 둘째, 아이들이 이 나라에 다시 돌아오지 않아도 좋다. 자기 정체성만 있다면 사는 곳은 어디든 상관없다. 아니 가급적이면 여기서 살지 않기를 바란다. 앞의 다짐은 내 의지가 강하고, 뒤의 것은 장차 아이들의 판단에 맡기겠지만 나의 희망사항이다. 이렇게 두가지만 정리하니까 복잡한 계산이 필요 없어졌다. 언제 다시 돌아올 거냐, 거기있다 오면 여기서 적응 안될텐데, 그래도 대학은 여기서 잠깐 다니는게 좋을 걸, 미국으로 유학가야 나중에 여기서 자리잡기 좋아, 왜 프랑스로 가? 애들 교육도 마음놓고 못시키는 나라에서 웬 잔머리는 그리 많은지. 돌아오고 싶으면 맘대로 해라, 하지만 안돌아와도 좋다. 이렇게 다짐한 이유는 뒤에 가서 다시 얘기하겠지만, 사는게 억수로 피곤한 곳이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한때는 이런 다이나믹스가 좋았다. 이 작은 나라에서, 신문 1면톱이 이렇게 다양하고 충격적일 수 있나 감탄한 적도 있었다. 이땅에서 기자질을 한다는게 너무 훌륭한 선택이었다고 스스로 뿌듯해 했다. 딴나라가서 무슨 재미로 살겠느냐 한 적도 있었다. 이제는 지쳤다. 한도 끝도 없다. 그만했으면 한다. 내가 그런다고 그만둘 일이 아니란걸 잘 안다. 그래서 좌절했고 체념한다. 많이 묵었다 고마 해라.
뉴질랜드로 떠난 강군의 전반생이다. 뒤늦게 들어간 <인문대 문학회>에서 강군은 첫손 꼽는 강경파요, 원칙주의자였다. 언변은 어눌하지만 입장은 단호했고, 행동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서넛밖에 없는 동기지만 여간해선 곁을 주는 법이 없었다. 3학년때 과회장을 맡고나서 연거푸 세번을 학사경고 받는 바람에 제적이 됐다. 그리고 반년인가를 서성이다가 백골부대에 들어갔다. 그 어름이었다. 어느날 산꼭대기 자취집에 들렀더니 그는 새하얀 얼굴에 눈이 쑥들어간 표정으로 앉아있다가 계면쩍게 나를 맞았다. <밥은 먹었냐?> 의례적인 인사에 머쓱하게 웃으며 그는 말했다. <쌀이 떨어져서.><언제?><한 사나흘 돼.><그럼 그동안 내리 굶었단말야?><응. 그렇지 뭐.>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 했다. 처음으로 강군을 알게 됐다.
지금도 어머니는 강군 걱정을 그중 많이 하신다. 당시 우리 집 근처에 살던 그의 큰 누님이 동생 제적됐단 얘길 듣더니 어머니를 붙들고 꺼이꺼이 울더란다. 전라남도 어느 궁벽한 섬마을 소년이었던 강군은 어려서 어머니가 농약먹고 자진하는 불행을 겪어야 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큰누이 집에서 눈칫밥 먹으며 더부살이를 했지만, 그래도 서울대에 들어가서 매형에게 덜 미안하다 싶었는데 제적이라니. 그도 누이와 매형 보기가 미안해서 집엔 못있겠다고 했다. 그렇게 나와서 돈이 떨어지면 입 꾹다물고 며칠을 굶었다.
여우처럼 헤반주그레한 애인이 있었다. 유난히 모성에 허기져하던 그는 그녀에게 의지하는 마음이 컸다. 그러나 제적당한 처지에 군대까지 가야하는 형편이니 마음끝이 편치 못했다. 걱정한 대로 그녀는 고무신을 거꾸로 신었고, 그 상대도 어처구니 없었다. 우리는 용서받지 못할 사랑을 하고야만 그 두사람에게 평생 나타나지 말라고 파문을 내리면서 더럽게 안풀리는 강군의 팔자를 서글퍼했다. 정작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행히 군대에 있는동안 민주화 운동으로 제적당한 학생들의 복학 허용조치가 내려졌고, 그도 그 대상에 포함되어 제대후 학교에 다시 들어갔다. 동기들은 모두 졸업해서 현장에 가거나, 군대에 갔기 때문에 그의 복학생활을 귀담아들을 여유가 없었지만, 가끔 풍문으로 대단히 공부를 열심히 해서 장학금을 받는다는 믿을 수 없는 얘기가 들리곤 했다.
그가 모 경제신문사에 들어가고 수더분한 전주처녀를 만나 결혼을 하고, 과천에 아파트 한채를 사서 신혼집을 마련했을 때 나는 그의 평범한 새출발을 진심으로 축하해 마지 않았다. 더구나 그가 색시에게 냅다 핀잔을 하고 눈을 부라리며 호통을 칠 때 <녀석 제법인데, 그래 너도 큰 소리치고 살아라>하며 속으로 웃곤 했다. 일년 그리고 이년 강파르던 그의 턱에 살집이 붙고, 어느샌가 저 닮은 푸짐한 딸을 낳으면서 그의 30대는 마치 석달열흘처럼 지나갔다.
직장을 두어번 옮겨 이제 제법 좋은 신문사에서 고참차장으로, 적어도 겉보기엔 남부러울 것 없는 자리에 올랐다. 팽팽했던 눈자위도 부드러워졌고, 단호했던 정치적 입장도 더이상 입밖으로 내지 않았다. 누구에게 싫은 소리 한마디 안하고, 그저 제 할일을 열심히 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아왔다. 기사쓰고 취재하는 것이 천직인양, 벤처붐이 그렇게 불고 지나갔어도 눈길한번 돌린 적 없었다. 그런 그가 갑자기 뉴질랜드로 떠나버린 것이다. 그 남자의 후반생은 그렇게 시작하려나보다.
그가 툭하고 던진 <남자의 후반생>을 진즉 사놓고 띄엄띄엄 읽다가 엊그제 주르륵 다 훑어보았다. 공자, 위징, 범려, 진평, 여몽, 소진, 장의, 사마천, 사마광, 여불위, 유방, 법정, 조조, 왕안석 등 얼추 알거나 들어본 바 있는 인물들의 파란만장한 인생사가 짧지만 재미있게 그려져 있다. 대부분 전반생에 잘 나가다가 날벼락을 맞고 재기불능상태에 빠졌지만, 불굴의 의지와 자신감으로 실패를 딛고 다시 성공했다는 판에 박힌 얘기거나, 마흔이 다되도록 초야에 묻혀있다 진흙속의 진주처럼 빛을 발하기 시작해 놀라운 속도로 부와 권력을 얻었다는 통속한 얘기다. 결론은 역시 버킹검. 실패하더라도 결코 좌절하지 말고, 심기일전하여 재주와 학문을 부단히 익히면 기회는 반드시 온다는 것이다. 예전같으면 연신 무릎을 탁 치며 감탄했을게 분명하다. 가끔은 천장을 쳐다보며 <내게도 언젠가는> 하며 주먹을 불끈 쥐어보기도 했으리라.
적어도 요즘 내가 감을 잡아가고 있는 후반생의 모습은 이 책의 인물들과는 전혀 방향과 내용을 달리한다. 앞서도 얘기했지만 우선 나는 이 나라에 대한 애정지수가 위험상태를 넘어섰다. 전반생의 내 많은 것을 동원해가며 염원해 마지 않았던 가치에 나는 더이상 의욕을 갖지 않는다. 그래도 그러는게 아니다? 나도 안다. 나라를 위해 희생한 것도 아니고, 사실은 내 욕심껏 살았던 것 뿐이란 걸 안다. 최근 몇년의 연이은 실패로 의기소침해있는 것도 맞는 얘기고, 그 화풀이를 엉뚱한데다 한다고 빈정거려도 할 말은 없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작금의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이나 이 나라에 정 떨어져 하는 건 비슷하다. 서로 터놓고 말은 안한다. 그러나 나도 강군도 주변 사람들도 보여지는 행동들은 너무 비슷하다. 말하지 않아도 안다. 이 나라의 정치며, 경제, 문화, 교육 어느 하나도 건질게 없다. 사람들의 행동과 생각, 그리고 빌어먹을 주둥이, 눈귀를 막고 싶을 만큼 무섭고 환멸스럽다. 그 대열에 그동안 끼어있었다는 추억에 전율할 지경이다. 나이든 자들은 비겁하고, 어린 것들은 시건방지다. 작은 원칙도, 새로운 방법론도, 심지어 제가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하루의 시간을 탕진한다. 소설에나 나옴직한 싸구려 인생살이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멱살 잡을 일도 아닌 것에 주먹을 휘두르고 앙심과 몽니로 소송질하다 직장도 떨려 집안도 주저앉아, 홧김에 퍼먹은 술로 풍맞고 길거리로 나앉아 행려병으로 화장터가는, 그야말로 개떡같은 인생파장 이야기가 수도 없다. 개도 안물어가는 학벌 때문에 평생을 열등감에 시달리는 반편이가 있는가 하면, 세계 5백등 안에도 못드는 국산 일류대에 보내려고 유치원때부터 게거품을 무는 헛배운 인간들도 득시글거린다. 누군가 그 안에서 이루어내겠다 하면 말리진 않겠지만 난 엄두가 나질 않는다.
나는 이 소음지옥에서 벗어나고 싶다. 변화와 개혁에 동참해야 한다는 해묵은 가치체계로부터도 도망가고 싶다. 심신을 추스리든가, 아니면 다른 시공간을 찾든가 결판을 내야한다. 후반생을 시작하기 전에 단 얼마만의 시간이라도 완전히 이기적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나만 생각하자, 적어도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자. 행복이란 무엇인가. 내가 이제까지 행복의 조건이라고 단정하며 추구했던 것들을 되돌아보자.
명예와 권력을 탐했다. 사실이다. 그것으로 나의 아이덴티티를 입증하려 했다. 술먹고 대형 사고 친놈 전화 몇통으로 빼보기도 하고, 시건방 떠는 녀석 정신 버쩍나게 얼차려를 주기도 했다. 머리굵은 놈의 뒤통수를 냅다 후려갈긴 적도 있다. 글 솜씨 있다는 얘기도 들어봤고, 그 나이에 출세했단 말도 들었다. 그러나 역시 <공짜 점심은 없었다.> 그런 허접한 힘을 쓰기 위해 밤마다 먹기 싫은 술을 퍼마셔야 했고, 불쌍한 후배들을 잠 재우지 않았으며, 내 몸을 지독하게 학대했다. 그것과 바꾼 알량한 명예의 꼬락서니라니, 그 권력의 초라함이라니.
그것만으로 만족이 안돼니까 돈으로 확인해보자 했다. 사실 나는 돈을 모른다. 돈이란 걸 의식할 만큼 수중에 돈을 가져본 적도 없고, 돈의 들고남을 한번도 기억하고 처리해본 일이 없다. 그런 인간이 사업을 한다고 나섰으니 먼저 본 놈이 가져가는게 당연한 노릇이다. 지금도 한심한 생각을 한다. 돈에 관심을 쏟고 의욕을 부리면 그에 반비례해서 돈이 뭉텅뭉텅 나간다. 차라리 아무 생각없으면 아껴 쓸만큼의 돈은 떨어지지 않는다. 앞으로 돈은 그렇게 대하려고 한다. 일은 성실하게 하되 그게 얼마의 돈이 될 거라는 생각은 접기로 한다. 들어오는 만큼 쓰되 근검하고 절약하는게 정신건강에도 좋다. 솔직히 쓸만큼 써봤다. 따라서 돈 욕심을 내게 하는 투자는 절대 삼가할 것이며, 꼭 필요하다면 그냥 준다는 생각으로 할 것이다. 또한 사업의 성공을 절대 낙관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머릿속에서 셈빠른 계산이 나온다 할지언정, 몇날몇일 고민했는데도 실패할 가능성이 없다할지라도 잘될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겠다. 쉽게 말해서 돈 벌 생각 안하겠단 얘기다.
앞으로 이삼년동안 <내가 대한민국에 태어나지 않았다면>하는 가정을 전제로 삼아보련다. <내가 이 나라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우선 빌어먹을 중고등학교 시절을 그리 안보냈을 것이고, 점수에 맞춰 대학에 가지도 않았을 것이며, 학생운동이니, 민주화운동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이고, 군대 끌려가서 꽃같은 젊음 허송세월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아이들 교육때문에 외국 유학을 내보내고 혼자 살지도 않았을게다. 그리고 이런 류의 구차스런 얘기를 꾸역꾸역 후반생의 첫장에 적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는 분명히 예술에 종사했을 거고, 집안 가득히 그림을 걸었을 것이며, 세계여행을 일년에 석달 정도는 했으리라. 매일 글을 쓰고, 요리를 하고, 산책을 하고, 친구들과 차를 마시며 한국을 비롯한 세상의 뉴스메이커들을 비웃는 농담을 주고받았을 것이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누구의 눈치도 안보고, 체면 깎일까 부질없는 걱정도 안한다. 행복에 대해 생각하고, 그것에 충실하고자 한다. 나의 후반생은 모름지기 전반생과는 많이 다를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