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4
헤르만 헤세 지음, 전영애 옮김 / 민음사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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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헷세의 <데미안>

오늘 우연히 <설민석의 책 읽어드립니다>의 ‘데미안 편‘을 시청하게 되었다. 대학 들어가기 전에 읽은 것으로 기억한다. 다시 방송으로 접하니 새로웠다.


주인공 에밀 싱클레어가 성숙해가는 과정을 그린 이른바 ‘성장소설‘(Bildungsroman)이다.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싱클레어는 작가 자신의 성장배경이 투영되어 있다. 아버지는 목사였고, 할아버지는 선교사였던 기독교적 가정이 바로 헷세의 뿌리였다. 흔히 모태신앙인들이 가지는 아킬레스 건이 바로 너무 규범적이고 엄격한 종교적인 틀에서 자란 것에 대한 반발과 저항심이다. 나 또한 그러했다. 헤르만 헷세는 <수레바퀴 밑에서>에서 신학교를 다니다가 뛰쳐 나오는 대목이 그런 작가의 성향을 보여준다. 헷세는 그런 기독교적인 분위기를 벗어나고 싶어했고 나중에는 동양철학에 눈을 돌렸던 것 같다.



-헤르만 헷세는 <데미안>을 출간할때 ‘에밀 싱클레어‘라는 필명으로 출간했다고 한다.





2 싱클레어가 만난 사람들

에밀 싱클레어는 가정을 떠나 학교라는 공동체에서 느낀 이질감을 극복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 어설픈 거짓말이 오히려 일진과도 같은 존재인, 프란츠 크로머에게 덜미를 잡히는 형국이 되어 계속 시달림을 받게 된다. 하지만, 데미안의 등장으로 인해 싱클레어는 더 이상 크로머의 위협으로부터 자유하게 된다. 싱클레어의 학창시절, 그리고 젊은 시절 전쟁에 뛰어던 시기까지가 <데미안>의 이야기이다. 싱클레어가 온실 속의 화초로 자랐던 부모님의 품을 떠나 만난 프란츠 크로머, 자기를 도와 준 데미안, 마음 속에 짝사랑했던 베아트리체(자기 혼자서 지은 여인의 필명인 셈이다, 단테의 <신곡>에 등장한다), 종교적인 열정이 가득했던 피스토리우스, 데미안의 엄마 에바 부인, 그리고 다시 데미안...수많은 사람들의 만남을 통해 싱클레어는 성장하게 되고, 마지막은 싱클레어가 데미안처럼 성숙한 자아를 가지게 되는 형태를 띤다.





3 소설의 첫 구절

<데미안>의 첫 구절이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4 나를 찾아가는 구도자

헤르만 헷세는 <데미안>의 첫 구절처럼,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기독교적인 전통과 분위기를 벗어나서 초월하기 위해 노력한 듯 싶다(원래 문학의 첫 문장은 굉장히 중요하다. 그냥 쓰여지는 것이 아니란 말씀이다) . 헷세의 인생에서는 두 번의 세계대전이 있었기 때문에 더 그러한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았나 싶다. 참혹한 전쟁의 경험을 했던 헷세에게 자신이 온실처럼 자랐던 기독교적인 선의 세계와 현실은 너무나 대조적이었을 것이다. 거기서 오는 갈등과 분열과 균열이 헷세를 더 자신의 내면에서 자기를 찾아가는, ‘나‘를 찾아가는 구도자의 스토리로 나아간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나는 여기서 신이라고 일컫는, 아프락사스나 데미안이나 이런 인물들의 이름, 상징성, 의미를 파헤치고 싶진 않다.





5 가장 유명한 문장

헷세가 추구했던 문학세계와 철학들을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오늘은 <데미안>의 유명한 문장에 주목하고 싶다.
소위 “알까기” 문장이다.

‘새는 투쟁하여 알에서 나온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내게 익숙한 문장은 이렇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고자 하는 자는 또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6 성장은 통합하면서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일평생 성장하면서 살아간다. 육체적인 성장이 멈추어 도태될 수도 있지만, 정신적, 영적인 성장은 평생 자라간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은 만난다. 우리를 억압하고 약점을 잡고 늘어지면서 숨통을 죄어오는 프란츠 크로머같은 인간도 만난다. 하지만 인생의 쓴맛을 안겨준 크로머를 배제시키거나 삭제해선 아니된다. 내게 상처와 트라우마를 안겨준, 기억하기도 싫은 크로머라도 내 인생에 우겨넣으면서까지 통합시켜야 성장이 이뤄진다. 반대로 우리의 고충과 아픔을 경청하면서 나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도움을 주고 위로를 주는 데미안같은 인물을 만나기도 한다. 일종의 멘토mentor라고 볼 수도 있겠다. 처음에 공감과 이해가 되었던 사람이지만, 나중에는 관계의 ‘유리벽‘을 느껴 멀어지고 결별하는 피스토리우스 유형의 인간도 있다. 그리고 감정적으로 마음 떨리게 하며 연모하게 하는, 베아트리체와 같은 인물도 만난다. 마지막으로 싱클레어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에바 부인, 이브Eve를 상징한다. 베아트리체 때와는 다른 연모의 정을 느끼는 에바 부인이었지만, 작품의 마지막에서 작가는 야전병원에 누워있는 싱클레어에게 입맞추는


‘데미안의 입맞춤은 에바 부인의 입맞춤‘


이라고 이야기한다. 이 말은 데미안과 에바 부인, 더 나아가서 싱클레어의 인생에서 만난 모든 인간, 존재들은 남성과 여성, 성격과 캐릭터, 선과 악을 구분하여 쪼개어지는 것이 아니라 싱클레어의 자아 안에서 통합되어진다는 측면을 보여준다. 성장은 이처럼, 쓴맛과 단맛이 뒤범벅된 인생을 내것으로 통합시킬때 이뤄진다. 주인공 에밀 싱클레어, ‘나‘(unifying ego)는 그렇게 자신의 인생의 구도자로 서 가는 것이다.





7 성장하고자 하는 자는 ‘성장통‘이 필요하다

헤르만 헷세는 에밀 싱클레어는 한 개인을 통한 내면세계의 성장을 보여주었지만, 이것은 확대해보면 인류라는 세계가 가지고 가야할 ‘통합의 성장통’을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성장하고자 하는 자는 ‘성장통‘이 필요한 것임을!

한번쯤 그런 생각을 해 본적이 없는가?

정말 위대하고 탁월한 인물이 되려면, 얼마나 많은 실패와 상처를 감내해야 하는가? 아니면 반대로 인간이 실패와 절망과 상처와 비탄의 곁길을 되도록이면 밟지 않고 순탄하게 살아낸 것이 더 아름다운가?


예를 들어,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요셉은 도덕적으로 굉장히 순결한 인물이었다. 성적인 유혹을 이겨낸 대단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의 형이었던 유다는 자신도 인지하지 못한 상태였겠지만, 며느리 다말과 관계를 맺게 되어 쌍둥이를 낳고 메시야의 계보를 잇게 된다. 물론 성경의 이야기와 세속사는 결이 다를 수 있겠다. 하지만, 인간이 실패를 많이 경험한 자나 실패없이 성공의 가도만을 달린 자가 보여줄 수 있는 정신적인 크기와 상처는 분명히 다를 것이다. 나는 전자가 더 옳거니 후자가 더 옳거니 하는 식의 판단은 거절하고 싶다. 삶이란 한 자아의 선택의 합이고, 그 선택은 한 선택자의 몫이고, 책임이기도 하고, 전자나 후자나 둘 다 감당해야 할 성장통은 우리들의 숙제이기도 하고, 오늘 하루의 숙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고자 하는 자는 또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결국, 내 기억에 제일 잘 남은 ‘알까기’ 버젼으로 인용한다! 기억을 더듬어 간만에 글을 적는다. 오늘도 손흥민은 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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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27 09: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0-27 11: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20-10-27 17: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유대인 러바이가 그랬다고 합니다.

소라게들이 계속해서 성장하기 위해서
는 성장통을 필요하다고.

그러기 위해서는 불편함을 먼저 인식
해야 한다고 합니다.

자신의 맞는 집에서 살다가 자라면
다시 새로운 집을 찾고 적응해 가는
그런 과정이야말로 우리가 삶에서
배워야할 그런 게 아닐까요.

카알벨루치 2020-10-27 19:56   좋아요 0 | URL
불편함은 인식하고 통합하고 자기화한다는 것, 그 고통이 만만치 않음을...그래서 성장은 쉽지 않은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