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알라딘에 이사를 왔다.
4월말, 5월에 온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부터 글을 계속 읽고 썼다. 머리털나고 이렇게 글을 많이 쓴 시기가 없었다. 모두가 알라딘의 이웃님들의 글과 그들의 존재와 도전 때문이다. 그것은 부인할래야 부인할 수가 없다. 그들의 글이 없었다면 나에게 발전도, 성숙도 없었을 것이다. 이웃님들의 글에는 댓글도 포함된다.
2 알라딘에 와서 글의 길이가 달라졌다.
더 길어졌다. 요즘 인스타는 짧은 글, 그리고 모든 글을 이미지화 해 버린다. 그래서 서민교수는 글자나 활자 대신에 이미지화 시키는 시대에 대해 비판했던 것을 기억한다. 이미지보다는 글을, 사진보다는 텍스트, 활자의 맛을 느낄 수 있었다. 긴 글이 주는 충격은 파장은 남다르다. 솔직히 <짧고 굵다>는 표현은 정말 쉽지 않은 것이다.
3 여긴 소통이 가능하다.
공감(좋아요♥)는 어디에나 있으나 여긴 지성인들, 책 좀 읽는 이들, 적어도 책에 관심있는 이들의 눈이 있다. 그 눈을 통해 내 글과 흔적이 읽혀진다는 것, 공감받고 그로 인해 댓글이 달려진다는 것은 소통력이라 할 수 있다. 참고로, 난 알라딘 댓글 많이 단 Best에 들어갔다. 난 말주변이 별로 없다. 글보다 말이 약하다고 생각한다. 막상 만나면 재미없은 1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글로 소통하는 여기는 내 글, 내 댓글로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글에 있어 소통이 있고, 없고는 큰 차이라고 생각한다.
4 여기서 <사유의 힘力>을 느낀다.
다독보다 더 중요한 것은 더 큰 삶이다. 더 큰 삶으로 가기 위해선 사유, 사색의 힘이 필요하다. 나는 알라딘에서 그걸 느꼈다. 텍스트는 동일하다. 그 텍스트를 읽어내는 것을 넘어 창조적으로 접근하기 위해선 ‘사색’이 필요하다는 걸 느꼈다. 일종의 ‘묵힘의 숙성의 시간’이 필요하다. <자기만의 색깔color>, <자기만의 목소리>가 있는 컨텐츠를 사람들은 원한다.
5 난 <편집의 힘>을 느낀다.
바로 ‘편집,editology’이다. 김정운 교수가 이야기했다. 편집은 일종의 짜깁기일 수 있다. ‘해 아래 새 것이 없다’는 성경구절이 말해주듯, 인류역사상 유일무이한 사상과 철학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각기 다 다른 transformation의 다른 타입type에 불과하다. 거기에 필요한 것은 <편집>이다. 그래서 생각하고 글을 썼다.
6 고전古典의 힘을 느낀다.
자기계발서는 하루에 몇 권씩 읽어치울 수 있다. 그러나 고전은 다르다. 그 고전이 주는 심오하고도 깊은 맛은 향유해본 자만이 알 수 있다. ‘최고의 자기계발서는 바로 소설(문학)’이라고 누가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7 응원의 힘이다.
사소한 피더백과 격려의 문장, 댓글이 나를 힘나게 했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흔들리는 것이 인간이다. 그런 나에게 이웃님들의 좋아요와 댓글은 정말 힘이 되었다. 알라딘 와서 첫 당선작(월)이 나왔을 때, 난 내가 당선된 지도 몰랐다. 당선작이란 제도가 있는지도 몰랐다. 우연히 발견한 적립금 때문에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힘을 받았다.
8 다양한 독서가들이 주는 정보력이다.
여기에서 소통하지 않았다면 나의 독서력은 얼마나 퇴화했을까? 그런 생각을 해 본다. 레이먼드 카버, 존 치버, 톨스토이, 볼라뇨, 체호프, 마르케스, 보후밀 흐라발, 고골, 아고타 크리스토프, 아니 에르노, 로맹 가리....그리고 읽지 않은 수많은 고전들과 작가들이 아직 대기상태에 있다. 뚜껑을 따지 않은 작가들의 수많은 저서들을 보면 설랜다. 근데 문제는 늘 설레기만 한다는 것...
장정일은 그의 독서일기에서 ‘자신이 읽지 않은 책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책’이라고 했다. 읽지 않은 책은 독자에게 닫힌 세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9 사람 냄새가 나는 곳, 그곳의 향기가 난다.
알라딘에서 만난 이웃님들께 갑자기 감사가 되는거다. 내가 알라딘호구(?)가 된 것도, 댓글 달기를 극히 귀찮아하고 공감도 잘 안 누르는 내가 변화된 것은 모두 알라딘 와서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힘을 주고, 격려해 줄 수 있다면, 모두 Win_Win 할 수 있다면, 인색함은 저 땅속에 파묻어 버려도 좋겠다.
10 누구든 독불장군, 독고다이는 영원할 수가 없다.
혼자서 성장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글은 누가 읽어줘야 한다. 읽히지 않는 글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누군가 읽어주기에 글이 존재하고 텍스트가 존재하고, 책이 존재하는 게 아닐까?
내 글을 한 사람이라도 읽어주는 한, 난 글을 쓸 것이다. 나 혼자서만 성장할 수 없기에, 소통하며 읽고 나누고 서로를 고무시키는 알라딘이 지상에서 사라지지 않는 한, 여기에 있는 모든 이들과 함께, 알라디너들과 함께 성장하고 싶다. 솔직하게 말해서 여러분이 없었다면, 저는 <서재의 달인>이 될 수도 없었답니다. 이건 과장된 겸손이 아니다. 그냥 솔직한 고백이다. 받아주시길!...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있어서 저는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다.
“우리 함께, 읽고, 쓰며, 소통하며 성장하지 않겠습니까?”
-이 글을 쓴 TWSBI만년필도 알라딘 이웃님으로부터 소개받은 펜이기도 하다.
이렇게 알라딘 빠가 되는가? 그럼 알라딘에서 나에게 뭐라도 줘야하는거 아닌가? 알라딘호구의 고백이다...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