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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정복자 -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사이언스 클래식 23
에드워드 오스본 윌슨 지음, 이한음 옮김, 최재천 감수 / 사이언스북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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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섭의 시대라며 자연과학, 또는 공학을 전공한 이들에게 인문학적 소양을 요구하는것이 어느덧 당연한 일이 되고있고, 삼성의 행보를 보고 있자면 그와 정 반대로의 방향으로도 통섭이 요구되어 지는 모습도 보인다. 그러나 대개 후자보다는 전자의 경우에서 인문학적 소양을 요구받는 경우가 많은데, 특히 공학에서 요구되는 정도가 더 크다. 그리고 전자의 경우를 뒷받침 하는 예시로는 전자출석의 공학적 의미와 인문학적 의미를 비교하는 이야기가 자주 언급된다. 요악하자면 「전자출석은 출석에 필요한 시간을 단축함으로써 불필요한 시간이 축소되어 교수와 학생의 관계가 더 가까워 질 것으로, 또는 수업의 만족도가 향상될 것으로 기대되었으나 실제로 그렇지 못했고, 결국 오늘날 전자출석을 이용하는 대학교는 극히 드물다.」정도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런 피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공학을 전공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공학하는 사람들끼리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과정을 돌아보면 많은 경우 제시하는 개선방안들이 단순히 「얼마나 편리해지는가.」에 국한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조금만 꼬아서 생각해본다면, 예컨대 ATM 기계나 승차권 자동 발매기만 보더라도 공학자들이 보기에는 편리해지는 기계이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 분명하지만 사실 이전에 사람과 마주하며 일을 처리하던 그 시절보다 손님의 입장에서는 더욱 불편하다. 더불어 창구 직원과 간단하게 말을 건네던 여유마저 없어진 것을 보면, 과연 공학자가 쫓는 편리함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에 대해서 한번쯤은 생각해보게 된다. 


다시 전자출석의 이야기로 돌아와보자. 전자출석은 분명히 편리하지만, 학생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이전보다 더 불편해진 시스템이며, 또한 출석의 의미를 단순히 수업에 참여한 학생들의 머릿수를 세는 정도로만 이해했다는 것에서 더 큰 문제점이 출발한다. 예컨대 출석은 단순히 머릿수를 세는 것뿐만이 아니라 교수가 학생의 이름을 부르며 서로가 교감하며 확인하는 것일 수도 있는데 전자출석은 애초에 그러한 모든 것들을 무시한 채 만들어진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단순히 기계적으로 보았을 때 전자출석은 분명 효율적인 시스템이지만 그렇지 못했다는 것은 출석이라는 것에 대한 인문학적인 성찰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밖에 볼 수 없으며 따라서 여기서 결여된 것이 바로 인문학적 소양이다. 그래서 공학자들에게 더욱 인문학적 소양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


편협적인 의미에서 통섭을 이야기 한 것이지만, 이런 편협적인 시각에서도 과학과 인문학을 합친다는 것은 어렵다. 책에서는 종교와 과학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마찬가지로 인문학과 과학도 그 둘의 관계와 비슷한 성향을 띄고 있다. 애초에 합치려고 한다고 해서 합쳐지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인문학은 「사람을 우선」해서 그 주변의 것들을 해석하려고 하지만 과학의 경우는 「자연의 일부로써의 사람」을 보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둘은 서로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기 때문에 합쳐지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단적인 예를 들기 위해서 책에서 언급되고 있는, 책의 중심 뼈대이기도 한 혈연 선택(포괄 적합도)과 집단 선택을 이야기해보자. 혈연 선택은 현재까지의 진화 생물학의 근간이 되고 있는 이론 중 하나인데, 간단히 다음과 같다. 「지금까지의 진화론은 한 개체가 다음 세대로의 유전 형질 전달을 목적으로 생존하는 것에만 중점을 뒀기 때문에 특정 개체가 다른 개체를 위해 이타적인 선택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며 설명할 수 없었다. 이에 대해 혈연 선택은 '개체뿐만 아니라 혈연의 번식 성공에 미치는 영향도 고려해야 한다.'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즉, 한 개체의 희생을 통해 더 많은 혈연의 생존이 보장된다면, 즉 유전 형질의 전달이 용이하다면 어떤 개체는 혈연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혈연 선택은 해밀턴의 법칙으로 설명되는데, 이 해밀턴의 법칙은 rB > C로 주어진다. 이 때 C는 비용, r은 유전적 연관도, B는 이득이다. 예를 들어 어떤 특정한 개체군이 4명의 새끼를 낳을 수 있다고 하자. 만약 3명의 형제가 물에 빠졌을 때, 남은 1명의 형제는 이들을 구하러 물에 들어가는 이타적인 선택을 할까? 해밀턴의 법칙에 따르면 '하게 된다'. 형제는 평균적으로 50%의 유전자를 공유하기 때문에, 이를 해밀턴의 법칙에 의해 계산해보면 r = 0.5, C = 4, B = 4 * 3 이므로 6 > 4가 되어 남은 한명의 형제는 세 명의 형제를 구하기 위해 물속으로 뛰어들게 된다. 자신이 죽고 대신 세 명의 형제를 살릴 경우 유전 형질이 더 잘 보존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해석을, 동물에게 적용한다는 것도 조금 아이러니 하지만 인간에게 적용한다는 것은 더더욱 아이러니하다. 아무런 연고 없는 사람을 위해 지하철 선로에 뛰어들고, 물속에 뛰어들면서까지 구하는 그러한 이타적인 것을 설명하기에 혈연 선택은 너무나도 비인간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진화 생물학적 관점에서 인류의 문명을 설명한다는 것은, 책의 제목처럼 「지구의 정복자」 인간이 어디서 왔고, 무엇이고, 또 어디로 가는지를 설명하기란 턱없이 모자라다. 그래서 책의 저자인 에드워드 윌슨은 새로운 설명을 하게 된다. 바로 집단 선택이다.


집단 선택을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어떤 개체는 항상 집단 형질을 유지할 것인지, 아니면 개별 형질을 유지할 것인지에 대한 선택압을 외부로부터 받게 된다. 즉 개인과 집단의 가치를 놓고 항상 저울질하게 된다. 인류는 생존을 위해 경쟁해왔으며, 그 과정 속에서 다른 집단이 섞여나가는 과정을 꾸준히 거치며 이로써 집단의 조성이 불안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달리 표현하면 집단이 곧 혈연이 될 수 없었다는 이야기다. 때문에 인간은 집단 선택의 산물인 명예, 미덕, 의무를 쫓을 것인지 아니면 개체 선택의 산물인 이기심, 소심함, 위선을 택할 것인지에 대한 압력을 계속하여 받아왔다. 그러나 지구의 역사에서 항상 개체 선택보다는 집단 선택이 승리했으며, 인간도 마찬가지로 생존을 위해서는 집단 선택의 산물의 선택압이 보다 크게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다른 사회적 동물의 사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책의 내용은 곧 이에 대한 근거라고 봐도 좋다. 책에서 다루고 있는 진사회성 곤충의 사례나, 집단주의적 성향이 인간의 동물적인 본성이라는 해석등도 결국은 이러한 집단 선택을 설명하기 위한 부가적인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집단 선택은 한 편으로 생물학이라는 느낌이 들기 보다는 인문학적인 느낌, 즉 철학이라는 느낌이 오히려 더 강하다. 그 때문에 집단 선택설이 인문학을 품을 수 있는 것이지만, 또한 그렇기 때문에 진화 생물학계에서 지금까지 집단 선택에 대해서 반기를 가지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과학적인 논거를 살펴본다면, 개체 선택이 훨씬 더 매력적이며 설득적이다.」


그러나 에드워드 윌슨은, 이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일을 책 「지구의 정복자」에서 훌륭하게 성공해냈다. 물론 여전히 본질에 접근한 다기 보다는 피상적인 느낌을 지울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타주의의 유래를 해밀턴의 법칙에서 찾기에는 그 외에 진사회성 동물이 공유하는 것, 그리고 인간임을 식별할 수 있는 형질들을 모두 설명해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모든 것을 통섭적으로 설명해 낼 수 있는 유일한 해결방안은 집단 선택이 유일할 것이며, 에드워드 윌슨은 그 말을 책 전체에서 내내 열심히 강변하고 있다. 이 것 외에 다른 답은 있을 수 없다고 말이다.


「자연선택의 단위가 개체냐, 아니면 집단이냐」는 다윈 때부터 지금까지 끝나지 않고 이어져 오는 진화론의 가장 큰 논쟁거리 가운데 하나이다. 다윈도 그의 저서 「인간의 유래」에서 '한 부족 내에서 고결한 도덕적 가치를 지닌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유리한 점이 별로 없을지 모르지만, 고결한 도덕적 가치를 지닌 사람이 많은 집단은 그렇지 못한 집단에 비해 훨씬 유리하다. 언제나 부족들 간에는 하나의 부족이 다른 부족을 대체해가는 과정이 진행되므로, 그리고 이 과정에서 도덕성이 중요한 요인이 될 것이므로 높은 도덕적 가치를 지닌 사람들이 차지하는 수적 비중이 점차 늘어나게 될 것이다.'고 이야기 했던 것이 이 논쟁의 출발이나 마찬가지니 말이다.


그래서 이 짧은 서평으로 이 장대한 이야기를 다룬다는 것도 불가능하며, 또한 책 「지구의 정복자」 단 한 권으로, 그리고 단 한 번의 독서로 이해한다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그러나 집단 선택과 혈연 선택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그리고 오늘날 집단 선택설의 선봉장이기도 한 에드워드 윌슨이 이야기 하는 집단 선택이란 무엇인지에 대해서 알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보는 것은 그 자체로도 큰 의미가 있다. 그리고 앞서 설명했던 것처럼, 인문학과 과학의 통섭 측면에서도 이 책은 나름의 의의를 갖는다. 인문학을 포용하기 위한 가장 적합한 것이야 말로 집단 선택일 것이기 때문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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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순례 - 옛 그림과 글씨를 보는 눈 유홍준의 미를 보는 눈 2
유홍준 지음 / 눌와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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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긴 호흡의 글을 단숨에 내뱉을 수 있도록 하고, 부제목은 한 번에 뱉은 호흡을 가다듬는데에 도움을 준다. 그래서 제목은 책의 전부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로 유명한 유홍준 교수의 새로운 책 「명작순례 : 옛 그림과 글씨를 보는 눈」은 그런 면에서 책의 본문을 잘 보여주고 있는 제목을 갖고 있다. 책 제목처럼 「명작순례」는 과거의 명작으로 평가받는 마흔 아홉 가지의 서화에 대해서 저자만의 시각으로 풀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달리 다른 수식이 필요치 않을 것 같아 서평의 제목 역시도 책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다.

 

 

예술세계에서 독창성과 유일함이라는 것은 중요하다. 숱한 표절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한, 그래서 매번 창작의 고통에 시달려야만 하는 예술가들의 모습만 봐도 그렇다. 그들에게 있어서 새롭지 못하다는 것은 곧 죽음이다. 그러나 이와 더불어 그만한 명성을 갖는 것도 중요하다. 앤디 워홀은 「일단 유명해져라. 그렇다면 사람들은 당신이 똥을 싸도 박수쳐줄 것이다(Be famous, and they will give you tremendous applause even when you are actually pooping.)」라고 까지 말하지 않았던가.

 

 

이러한 것들이 뜻하는 바는 두 가지 정도가 되겠다. 하나로는, 대중들은 독창성의 가치를 높게 산다는 것과 또 다른 하나는, 대중들은 다른 이의 시선, 즉 사회에서 내리는 일반적인 평가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는 예술을 대하는 일반인들의 안목이 그 만큼 부족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독창성이라는 것은 전문적인 지식이 없더라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 것이며, 다른 사람들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가리키는 것은 자신의 모자람을 들키지 않기 위한 방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만의 안목을 기르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이 자신만의 안목을 갖는다는 것은 어려우며, 결국 다른 사람의 안목에서 차근차근 모방해나가고 그 속에서 자신만의 빛깔을 찾아 나가야만 한다. 하지만 만약 자신이 접한 기존의 안목이 당신에게 그 해석만을 요구하고 강요한다면 이는 접하지 않는 것 보다 못하다. 따라서 객관적인 시선을 전달해 줄 수 있는 안목을 처음에 접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작품 속에 얽힌 이야기들을 알아보는 것이 흥미를 유발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몇 해 전 KBS는 “사극드라마를 방영하는 것은 공영방송으로써의 책무”라고 밝히며 비용문제를 떠나서 매 해 한편의 대하드라마를 방송하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그러한 공언 뒤에 처음으로 방영된 드라마 「정도전」은 정통 사극의 부활이라는 평가와는 반대로, 기존의 사극과는 전혀 다른 특별한 점이 있다. 매 주 일요일 방송분의 마지막에서 5분 내외의 미니 다큐멘터리를 편성하여 보여주고 있는 것인데, 이 때 다큐멘터리는 해당 주에 방영된 드라마의 내용과 관련된 실제 장소, 또는 유물을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정도전의 유배 생활을 다룬 6화 끝에서는 정도전의 실제 유배지를 보여줬고, 공민왕의 죽음을 다룬 2화 끝에서는 공민왕의 무덤과, 마포구에 있는 공민왕의 사당을 보여줬다.

 

 

이와 같은 시도는 영화 「관상」을 실제 한국사 강사에게 의뢰해 영화의 역사적 내용을 다루는 등 이전에도 있었던 시도였기 때문에 새로울 것은 없지만, 한국사의 의미가 날로 강조되고 있는 오늘날 공영방송이 이러한 시도를 했다는 점은 큰 의의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할 수도 있지만, 이러한 미니 다큐멘터리의 몰입도를 높이고 보는 이로 하여금 그 곳, 또는 그 유물을 보고 싶다고 느끼게 만드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그 것에 얽힌 이야기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예이기 때문이다. 이는 서화를 이해하는 데에도 앞서 언급했듯이 똑같이 적용된다.

 

 

이런 모든 조건을 만족하는 책으로는 「명작순례」만한 책이 없는 것 같다. 책은 저자인 유홍준 나름의 해석과 함께 그 서화에 얽힌 자세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그 해석이 특별한 방향으로 치우쳤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에 서화에 조예가 깊지 않은 사람이 최소한의 안목을 갖는 데에 큰 도움을 줄 것이다. 물론 나 역시도 그랬다. 그러나 어떤 작품을 해석하는 데에 있어서 그 시대적 맥락을 바탕으로 해석 할 수도 있겠지만, 단순한 표현기법과 같은 기술적인 측면에서만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과거 없는 현재 없고 현재 없는 미래 없듯이 시대적, 역사적 맥락 없이 온전히 작품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약 이 주장에 동의할 수 있다면, 책 「명작순례 : 옛 그림과 글씨를 보는 눈」을 일독하기를 권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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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여름에 시작했던 신간평가단 활동이 어느덧 겨울로 접어들면서 그 끝이 조금씩 보이고 있네요.


1. 잘 쓰려고 하지마라


양과 질은 대개 반비례하는 경우가 많지만 글쓰기에서 그 둘은 비례하는 경우가 많지 않나 생각합니다. 타고난 명필가들이야, 처음부터 완벽한 글을 써내려가는 경우도 있겠지만, 우리가 주변에서 익숙하게 맞이하는 작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글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일단 '써보는 것'이 아닐까 싶네요. 그래서인지 글쓰기를 다루고 있는 책 '잘 쓰려고 하지마라'는, 글을 잘 써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했다는 책이라는 것이 무색할 정도인 제목을 가지고 있습니다. 잘 쓰려고 하는것보다는 일단 써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책의 내용을 잘 담아내고 있는 제목 같습니다.








2. 세상물정의 사회학


사회에서 성공을 거둔 사람들은 항상 학생들과 대중들에게 꿈을 가지며 살아가라고 말하지만, 애석하게도 우리네 상당수는 평범한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건 너와 내가 못나서 그렇다기 보다는, 세상 어느 곳에라도 그 평범한 사람들은 항상 필요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그렇지만 애석하게도 우리들은 그 당연한 진실을 맞닥뜨리지 못할뿐더러, 사회 역시도 인정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사는 날 것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려는 시도는 많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책 '새상물정의 사회학'은 기존과는 달리 사회학자가 바라보는 날 것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고민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3. 베스트셀러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항상 우리나라 드라마를 비판할 때 매번 비슷한 스토리를 담고 있어서 소재의 다양성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자꾸 하지만, 이는 반대로 대중들이 열광하는 특정한 코드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반증이며, 대중들의 관심이 곧 흥행으로 이어지는 드라마계의 특성상 이는 결코 무시할 수 없다는 점이기도 합니다. 책 '베스트셀러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는 책에서도 이와 같이 대중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흥행을 보증하는 12가지 코드가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작가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또는 책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꼭 읽어봐야 하는 책이 아닐까 싶습니다.







4. 감정 독재


오롯이 본인만의 감정을 순수하게 느끼려면 무엇보다 혼자 있는것이 가장 좋겠지만 실상 그럴 일은 별로 없습니다. 어쨌거나 다른 사람들과 부딪히며 살아가기 마련인데, 그러다보면 특정 상황에서 일정한 감정을 요구받곤 합니다. 지도자의 자리에 올라왔을 때 내가 관리하는 조직에 변화를 가져와야 겠다는 것이나 또는 골키퍼가 패널티킥 상황에서 상대 키커가 중앙으로 차기보다는 좌우 구석으로 찰 것이라고 생각하는것도 한편으로는 슛팅을 막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한다는 강박관념의 표현일수도 있습니다. 책 '감정 독재'는 이러한 현상들을 잘 반영하는 이론은 무엇인가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 책입니다.






5. 책에 대해 던지는 7가지 질문


책 '책에 대해 던지는 7가지 질문'은 7개의 챕터가 책에 대해 던지는 질문들로 구성되어 있는 책입니다. 13기 신간평가단을 마무리 지으면서, 이 책이 던지는 질문에 대해 답해볼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아서 골라봤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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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의딸 2014-01-14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혼자 읽으려고 글을 쓰는 사람은 없겠죠..? 저도 그러네요. 이왕이면 내 이야길 들어주는 누군가가 있었으면 좋겠으니까요. '잘 쓰려고 하지마라'는 제목만으로도 많은 걸 생각하게 하네요.

카쿠군 2014-01-16 12:46   좋아요 0 | URL
살면서 혼잣말을 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결국 말이라는게 누구와 의사소통을 하고자 하는것이잖아요.
글도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혼자 쓰는것만으로 만족할 수도 있겠지만 누군가가 들어준다면,
그리고 잘 읽어준다면 더 좋을것 같습니다.

블로그 '첫' 댓글 감사합니다 ^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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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토크라트 - 모든 것을 가진 사람과 그 나머지
크리스티아 프릴랜드 지음, 박세연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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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모 커뮤니티에서 빈부 격차와 소득, 계급 고착화에 대해서 논쟁이 오갔던 적이 있다. 많은 학자들도 이에 대해서는 공감하고 있는바 사실 논쟁의 주제도 되지 못하는데, 때문에 당시 논쟁은 부익부빈익빈이라는 용어의 정의 자체에 대한 토의가 주를 이뤘다. 다수 계층의 삶의 질이 향상되고 있는 마당에 빈익빈이라는 용어는 부적절하다는 한 편의 주장과, 다른 한 편으로는 상대적인 부의 박탈감이 이전에 비해 커졌기 때문에 빈익빈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데에 문제가 없다는 주장이 계속 오갔는데, 서로 이해가 다른데서 출발한 논쟁의 끝이 개싸움과 진흙탕으로 귀결됨은 이미 예정된 결과이다 보니 그 논쟁이 어떻게 끝맺음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무방할 것이라 본다.


그러나 당시 논쟁에서 오가던 두 가지의 주요한 내용, 1. 과거에 비해서 삶의 질이 향상되었으며 2. 소득 상위 계층과 하위 계층 간의 소득차가 과거에 비해 매우 커졌다는 것은 모두 분명한 사실이다. 과거 사치품으로 분류되었던 매체들은 더 이상 상위 계층만의 전유물이 아니며, 또한 1대 99로 불리는 월가 점령시위가 보여주듯이, 상위 계층이 한 사회의 부를 상당수 차지하고 있는 것 역시도 사실이다. 빌 게이츠와 워렌 버핏의 재산을 합친 금액보다 미국 하위 1억 2천만 명의 소득 총 합이 낮다는 통계 결과가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부익부빈익빈이라는 말은 과연 오늘날에도 유효한 용어인가? 설령 빈익빈이라는 용어에 대해서는 반박이 있을 수 있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부익부'라는 사실에 관하여서는 반박의 여지가 없을 테다.


3분의 2에서 파레토로, 그리고 1대 99 사회로


가진 자가 더 많은 부를 창출하는 부익부 현상은 예전부터 있었던 일이지만, 최근에는 상위 20%가 전체 소득의 80%를 가져간다는 파레토의 법칙부터 이보다 더 나아간 1%의 소수 계층이 다수의 부를 차지한다는 1대 99사회까지로 그 격차가 심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살펴볼 수 있다. 물론 이는 다분히 좌파의 시선에서 바라본 결과이겠지만, 최근의 미국 통계에 따르면 상위 1%의 계층이 사회 전체 소득 가운데 20% 가까이를 가져간다는 사실을 보았을 때, 그리고 앞서 언급했던 빌 게이츠와 워렌 버핏의 사례만 보더라도 이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 가운데 하나다. 그 만큼 전 세계적으로 소득의 계층화는 더욱 심해지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러한 결과가 나오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산업혁명과 정보혁명에 따라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노동력은 점차 감소하는데 반해 인류의 숫자는 늘어나고 있는 역설적인 모습 속에 가장 큰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부가 소수에게 집중되는 것은 필연적인 현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제레미 리프킨이 자신의 저서 노동의 종말에서도 '기술의 진보가 실업자를 양산할 것이다'라고 예측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것만으로 오늘날의 소득 격차를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실제 노동 현장에 종사하지 않는 사람들을 제외한 채 현재 근로중인 노동자의 평균 연봉과, CEO의 그것과 살펴보았을 때 과거의 수십 배에서 오늘날의 수백 배의 차이는 단순한 산업, 정보 혁명에 따른 결과라고는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이유에는 무엇이 있을까? 책 플루토크리트는 이에 대하여 베네치아의 사례를 제시한다.


유동성은 사회의 발전을 보장하지만 계급의 안정성을 보장하진 못한다


베네치아는 삶의 안정성을 담보 받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택한 불모지였지만, 그들은 그렇게 선택한 불모지를 당대 최고의 무역 국가로써 발돋움 시키게 된다. 그런 그들의 사회가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어느 누구나 원하기만 한다면 은행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무역을 시작할 수 있는 제도가 충분히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사회의 자본은 높은 유동성을 띄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반대로 특정 계층의 계급 고착화를 막는 하나의 방편이기도 했다. 아무리 부를 쌓아 올렸다고 하여도 지속적인 개혁과 도전이 없다면 언제라도 그들의 부는 새롭게 시장에 뛰어든 이들로부터 뺏길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유동성은 그래서, 사회의 발전은 보장하지만 계급의 안정성을 보장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런 높은 유동성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승승장구 하는 사람은 있기 마련이다. 또한 이러한 그들이 세력화되어, 어느 정도 소리를 낼 수 있는 수준의 단체로 성장하게 되면, 그들은 이전처럼 계속적인 경쟁을 거부한다. 그리고서는 그들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해자'를 요구하게 된다. 새로운 사람들이 해당 분야로 들어오는 데에 일정 수준의 방어벽을 형성하는 것이다. 오늘날 전문직을 갖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자격시험의 합격 인원 감축을 요구하는 것 역시도 해자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당대 베네치아의 그들이 요구하던 해자는 그보다 더욱 적극적 이여서, 그들은 이미 해당 분야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 의외에 다른 사람의 유입을 원천적으로 방지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들은 이전에 그들 사회의 발전을 보장했던 그 제도 역시도, 더 이상은 시행하지 않기에 이른다.


독점적인 권한을 누릴 수 있었기에 그들은 이전보다 더 많은 수익을 창출할 수 있었지만, 반면에 그들 사회는 점점 병들어가기 시작했고, 한 때 유럽 전체의 무역을 담당하던 해상무역의 최고 국가에서 그들은 이제, 과거를 추억하며 사는 이들이 모여 만든 박물관, 그 이하의 것으로 격하되기에 이르렀다. 더 이상 그들에게 찬란했던 과거의 그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계급의 안정성을 보장받기 위해 마련한 유동성의 제한이 결국은 그들 사회의 발전을 억압하고 나아가 그들이 누리던 부 마저 뺏어가기게 이르렀던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이 독점적인 권한을 누리기 시작한 이후 잠시 동안 더 많은 부를 창출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며, 또한 그 과정 속에서 빈부격차 역시 커져나가는 방향으로 계속되었다는 점이다. 오늘날 증가되는 빈부의 원인 역시도 바로 여기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을 보호하기 위한 해자


해자는 성벽을 방어하기 위해 사용되는 걸림돌이라고 보면 되는데, 경제적 해자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서는 펫 도시의 '경제적 해자'라는 책을 읽어보면 좋다. 그런 내용은 차치하고, 책 플루토크라트에서도 해자라는 용어가 자주 언급되는데, 이 때 사용되는 해자는 상위계층이 자신들의 바운더리를 사수하기 위해 그들만의 세계를 사수하기 위해 사용하는 여러 방법들을 총칭한다고 보면 되겠다. 앞서 언급한 자격시험이 바로 이러한 해자의 전형적인 모습인데,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해자를 그런 수준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무리다. 책에서 언급되는 해자는 이러한 물리적인 방어벽뿐만 아니라 상위계층이 기존의 지역이나 직장에 따른 공동체를 구성했던 데에 반해 오늘날은 상위계층끼리만의 공동체를 구성하는 데에서 오는 벽 역시도 해자의 일종으로 그려내고 있다. 즉 물질적인 차이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박탈 역시도 해자의 일부분이라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해자가 가져오는 사회 통합의 저해는 실로 상당하다. 그리고 이러한 해자는 앞서 언급한 베네치아와 같은 모습을 보여 오는데, 마찬가지로 그들만의 이너 서클을 지키기 위해서 그와 같은 방어벽을 만드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계급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상위계층들의 이러한 이너 서클을 통해 은연중에 계급의 전형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 역시도 다분히 좌파의 시각에서 바라본 평가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전보다 커져가는 빈부격차를 설명하기에 이보다 더 나은 해답은 없어 보인다. 또한 가끔씩 방송을 통해 흘러나오는 대기업 임원들의 만행들을 설명하기에 이보다 더 나은 것도 없을 것이다. 책 플루토크라트를 읽어본다면 이 주장에 대해서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플루토크라트 : 보호를 위한 해자, 고립시키는 해자


예전의 경우 역설적이게도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와의 이념 전쟁이 자본주의의 이러한 문제점을 보다 완화시키는 역할을 하면서 플루토크라트가 다수의 노동자 계층과 보다 가깝게 지낼 수 있었으나, 레이건과 대처 이후 불어온 신자유주의 열풍이 이러한 현실을 오늘날의 그것으로 변화시켜 왔고, 이러한 흐름 가운데에 오늘날 1대 99로 불리는 현상 역시도 태동한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자가 결국 그들을 몰락시키는 전형이 될 것임은 베네치아의 사례에서 충분히 보이고 있다.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 유동성은 분명히 필요하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유동성은 자신들의 안정적인 지위를 방해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려고 하면 할수록 사회는 분명 몰락하게 되어 있고,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도 쇠퇴 일로에 서있을 수밖에 없음은 자명하다.


책에서는 이러한 현실을 <100가구가 사는 한 마을에, 99가구가 평범하거나 또는 그 보다 못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 때, 매우 잘 사는 한 가구가 그 마을 속에서 정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라는 말을 통해서 이러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책은 이러한 현실에 대한 대안이나 해답을 제안하지는 못하고 단순히 이러한 현상들을 그려내는 데에 그치고 있다. 하지만 해답을 찾기 위해서 현실을 보다 자세히 아는 것은 중요 할 테고, 따라서 책 플루토크라트는 그런 측면에서 가치를 갖는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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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베의 사상 - 새로운 젊은 우파의 탄생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13
박가분 지음 / 오월의봄 / 2013년 10월
평점 :
절판


대중들에게 일베의 이미지가 각인되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지만, 일베 자체만 놓고 보면 그 역사는 무척 깊다. 초기 디씨인사이드의 코미디 프로그램 갤러리나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갤러리, 또는 스타크래프트 갤러리 등 소위 잘나간다고 불리는 갤러리에서 당일의 베스트 글로 뽑히는 글을 모아놓은데서 출발하는 일베는, 본격적인 형상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2010년도 중반이며, 출발선을 놓고 보자면 그 보다 훨씬 이전이다. 다만 그 특성상 당시에도 주로 좌파 정치인을 희화하는 글이나 이미지들, 특히 노무현 전 대통령에 관련한 것들이 주를 이뤘으며, 그와 비견할 수준으로 이명박 전 대통령 역시도 희화화의 주요 소재였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웹상에서 이러한 문화를 조금이나마 접하면서 살아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최근에 논란이 되는 일베의 모습들은 왜 논란이 되고 있는지에 대해서 물음표를 띄우기에 충분하다. 예컨대 노무현 전 대통령과 운지천 드링크를 합성한 영상이라던가, 내지는 이명박 전 대통령이 선거 유세당시 했던 말인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거 아시죠?'를 이용한 영상은 지금도 '필수 요소' 가운데 하나이며, 그 당시에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다만 그 당시에는 전라도를 향한 지역감정의 발화나, 내지는 518을 비하하는 등의 모습을 살펴보는 것은 어려웠다. 때문에 혹자들은 좌파 정치에 대한, 또한 특정 지역에 대한 무분별한 반발감과 위화감 조장이 오늘날 일베가 힐난 받는 주요한 원인이라고 지목하기도 한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그러한 문화는 정치-사회 갤러리 속에서 여전히 있어왔던 것이었기 때문에, 이전에 정사갤이 오늘날 일베만큼의 비난을 받지 않았다는 점을 상기시켜본다면, 단순히 그러한 이유만으로 오늘날의 일베를 진단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판단이 내려진다. 그렇다면 정말 현재의 일베가 비난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현실적으로 생각한다면, 이는 지역감정도 아니고, 대한민국의 민주화 역사를 부정하기 때문도 아니다. 단지 '더 이상 일베가 무시할 만큼의 커뮤니티가 아니다'라거나 또는, 외부에서 적을 찾지 못한 기정 좌파 정치인들이 일베를, 그들의 새로운 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인터넷, 더 이상 진보만의 공간이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일베가 그렇게 커졌다고 하여도, 여전히 인터넷은 감성의 공간이고, 때문에 인간의 이성에 호소하는 우파가 아니라 마음과 인간성, 이상향에 호소하는 좌파와 진보의 공간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인터넷의 위력을 여실히 보여준 것은 2003년의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이자, 2008년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시위일 것이다. 전자나 후자 모두 시민들이 직접 민주주의를 실현했다는 점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겠지만, 후자의 경우 오늘날의 그것에 비춰 바라보았을 때 다분히 과장되었고, 또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상황이 조장되었다는 의심을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 분위기속에서 우파는, 마치 영화 '디 워'가 나왔을 때, 그 누구도 함부로 영화를 비판하지 못 했던 것처럼 마찬가지로 촛불시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숨을 죽이고 있었을 뿐, 모두 죽어버린 것은 아니었나 보다.


천안함 사태나 연평도 포격 등, 북한의 연이은 도발과 함께, 예전에 그들에게 속았던 것에 대한 반발심 등 여러 가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인터넷상에서 우파는 점점 수면위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게다가 두 번 연속 이은 우파정권의 집권 역시도 이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본다. 그들에게 있어서 촛불시위는 더 이상 민주주의의 실현이 아니라 선동당한 좀비들이 만들어 놓은 하나의 해프닝에 불과했다. 아무런 자의식도 없이 그저 남들의 모습만을 따라가면서 생긴 사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한 지역의 특정 정당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지 역시도 그들에게는 아무런 이유가 없는, 그래서 비난 받아야만 하는 것으로만 비춰졌을 뿐이다.


그러한 흐름 속에서, 전형적으로 보수 스탠스를 지향하는 디씨인사이드의 글을 모으는데서 출발한 일베가 보수 성향을 띌 수밖에 없는 것은 달리 보면 당연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더 이상 인터넷은 진보들만의 유일한 공간이 아니었던 것이다.


'일베로'와 '민주화'


그런 일베의 탄생을 전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일베에서 채용하고 있는 추천 시스템 용어이다. 바로 '일베로'와 '민주화'이다. 일베로의 경우 평범한 추천버튼과 같다고 보면 된다. 여기서 추천 받은 글들은 짤방 게시판에서 일베 게시판으로 이동하게 되며, 다수의 방문객들이 글을 읽을 수 있게 된다. 그와 반대인 민주화 버튼은 반대 버튼이라고 보면 되는데, 이 때 왜 하필 반대 버튼의 이름을 민주화로 했는지, 이것이야 말로 우리나라의 민주화 역시에 대한 모욕이 아닌지에 대해서 논란이 많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사실, 이 '민주화'버튼의 역사는 일베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다. 이 역시도 다시 2008년의 그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앞서 언급했지만 2008년 당시만 해도 광우병에 대한 반박 논리를 인터넷 상에서 언급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도 나름의 보수적인 성향을 띄는 '유일한' 곳이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오늘날의 이글루스다. 티스토리 블로거들의 상당수가 진보 성향을 가지고 있다면, 반대로 이글루스의 경우는 전반적으로 보수 성향을 띄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러한 분위기는 그 당시에도 그랬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어져오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2008년 당시에 '아고라'로 대변되는 진보 진영 웹사이트에서 이글루스 블로그 글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테러가 가해지는 경우가 많았다. 상황이 이러하니, '민주주의를 주장한다는 분들이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나오기에 충분했고, 이에 대한 반동으로 인해 처음으로, 본질은 나와 다른 생각을 가졌다는 것이지만, 겉은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그들의 태도를 비꼬며 이글루스에서 '민주화'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지금이야 일베만의 용어로 치부되는 경향이 많지만 말이다.


따라서 현재의 일베 역사가 우리나라 인터넷의 우파 역사, 또는 젊은 우파들의 탄생을 대변하고 있다는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이는 2008년 광우병 사태 당시까지로 거슬러 올라가야만 그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단순히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것들에만 그 시각을 국한해서는 일베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러한 일베의 모습을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일베로와 민주화 버튼으로 구성되어 있는 추천 시스템일 것이다.


저열한 기성 좌파 커뮤니티의 모습과 일베는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이러한 일베가 2010년, 11년 까지만 해도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정치권에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당시 논란이 되던 것들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때 논란이 되던 것이나 지금 논란이 되는 것이나 별 차이는 없다. 어쨌거나 그렇게 은근슬쩍, 웹상에서 스스로를 병신들이라고 칭하는 일베는 이제 더 이상 삼류문화의 집합이 아니라 어느덧 주류문화로 그 수준이 승격되게 된다. 개인적으로, 일베가 이렇게 까지 클 수 있었던 결정적인 원동력을 제공한 것은 기존 보수 정치인이 아니라 좌파 정치인들이다. 아무런 관심을 주지 않았다면 그저 가만히 있었을 일베임에도, 굳이 없는 관심을 주기 시작하면서 일베가 커버린 것이 아니겠는가. 웹상에서 '병먹금'이라는 용어가 심심치 않게 사용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좌파 정치인의 힘을 얻어 큰 일베라서 그런지, 일베에 올라오는 글의 수준이나 기성 좌파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글 수준이나 사실 별 차이는 없다. 다만 이는 정치 게시판에만 국한되어서 봤을 때 이야기이고, 일베 게시판까지 본다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지기는 한다. 그러나 그 둘 모두 비슷한 수준으로 저열한 것은 마찬가지이다. 물론 일베 게시판까지 본다면야, 저열함의 수준은 일베가 훨씬 높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저열함이 젊은 세대에게는 훨씬 잘 작용한다. 이명박 전 대통령을 쥐박이나 2MB로 표현한 저열함이 다수의 시민들에게 오래 각인되었던 것처럼, 마찬가지로 노무현 전 대통령을 노운지라 표현하거나, 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쩔뚝이로 표현한 그러한 저열함이 머릿속에는 훨씬 오래 남는다.


그러한 저열함을 지향하는 일베가 때문에 어린 아이들 뿐만 아니라 젊은 세대들에게 큰 파급력을 가지는 것은 필연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달리 말하면 희화화라고도 할 수 있는 이러한 것들이 기존에는 좌파만의 소유물 이였다면, 이제는 우파 역시도 이러한 희화화를 같이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좌파 커뮤니티에서 이러한 이야기를 듣는다면야 발끈하겠지만, 큰 맥락에서 그 둘을 놓고 본다면 결국 그 둘은 일맥상통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논란이 오갈 때 좌파 커뮤니티에서는 항상 일베의 대부분이기도 한 사자(死者)에게 향하는 비난이 과연 용인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산자에게 향하는 맹목적인 비난은 과연 무조건적으로 용인된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얼마 전 논란이 되었던 한 연예인의 현직 대통령을 향한 '몸이나 팔아라!'라는 말을 생각해보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일베의 사상 : 일베는 기성 좌파정치에 대한 반동에 불과하다


책은 일베가 향유하는 사상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는데, 간단하게 요약하면 '일베의 사상은 과거의 인터넷 저급 문화와 함께 촛불시위에서 보인 것들을 함께 계승하고 있다' 정도가 될 것 같다. 다만 그 방향이 과거에는 왼쪽에서 오른쪽이었다면, 지금은 오른쪽에서 왼쪽을 향하고 있다는 차이정도는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일베가 보여주고 있는 모습들이 과거 2008년 아고라에서 보이던 비이성적인 모습과 닮아 있음은 분명하다. 그 이후로는 그곳을 찾아가보지 않았기 때문에 잘 알 수 없지만, 내 기억 속에 마지막으로 담겨 있는 모습은 그렇다.


결국, 일베는 기성 좌파정치에 대한 반동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일베는 좌파의 비이성적인 모습들이 만들어 낸 병적인 공간에 불과하며, 따라서 좌파 커뮤니티에서 일베의 모습을 바탕으로 비난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일 수밖에 없다. 때문에 그들은 일베를 무작정 비판하기에 앞서, 일베란 무엇인가, 그리고 일베가 향유하는 사상과 행동 기저는 무엇인가에 대해서 분명히 알아야만 할 것이다. 그래야만 그들 스스로가 자정 작용을 통해 순화될 수 있을 것이며, 그렇게 좌파 커뮤니티가 하나둘씩 변화해 나간다면, 일베는 자연스레 없어질 것이다. 그렇기에, 만약 당신이 일베를 정말 없애고 싶다면, 일베를 비난하기에 앞서 자신을 먼저 돌아보라. 그리고 그 작업을 위해 이 책은 충분한 도움이 될 것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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