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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 - 문학과 예술로 읽는 서울의 일상
류신 지음 / 민음사 / 2013년 12월
평점 :
품절
얼핏 보면 젊은이들의 얼굴에서 자신의 일에 몰두하는 진지함과, 시간을 효율적으로 경영하는 자신감과, 커피를 마시며 편한 자세로 앉아 있는 행복감이 묻어 나오는 것 같았지만, 그 표정의 이면에는 고달픈 삶이 분비하는 우울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구보는 이 현상의 원인을, ‘불가능은 없다’고 훈육하는 자본주의 무한 경쟁 사회에서 ‘무엇인가를 해야만 한다’는 당위에 포섭되어 몸과 정신이 점점 마모되어 가다가, 결국 ‘가능한 것은 없다’며 탈진하는 ‘성과 주체’의 피로감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조심스럽게 추측해 보았다. 구보는 이곳 카페의 젊은이들이 적어도 탈진 상태로 가는 위의 과정 중 어느 한 단계를 통과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p. 180)
어떤 체제이건 간에 집권층의 이익을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사회가 미래를 낙관하는 분위기일수록 좋다. 하지만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권력에 의해 의도적으로 조장된 낙관주의이든, 그렇지 않다면 권력의 선정(善政)으로 만들어진 낙관주의건간에, '불가능은 없다'라고 꾸준히 사회에 주입시켜나가는 것은 그것 자체로 유의미한 일이다. 오늘날 국내의 서점시장만 보더라도 이러한 현상은 눈에띄게 나타나고 있다. 항상 베스트셀러 순위의 상위권을 차지하는 자기개발 서적들이 바로 그것인데, 이 책들이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방법론적인 측면에서는 다양하나 결과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똑같다. '할 수 있다'는 이야기. 물론 그 말이 꼭 집권층을 위한 이야기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으며, 포기하지 않는 태도는 삶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 가운데 하나다. 그렇지만 그 말을 조금만 비틀어보면, 이렇게도 이해할 수 있다. '당신의 실패 원인은 당신에게 있으니 다른곳에서 찾지마라'
그러나 대중들의 심리를 살펴보면 또 그렇지 않다. 자기개발 서적을 읽어나가는 사람들이 부의 차이에 따라 대학이 갈릴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것, 또는 자신의 취업 실패를 정부의 정책 실패로 연결짓는 것 등이 바로 그 예다. 자기개발 서적에 따르면, 어디까지나 이는 결국 '당신이 노력을 하지 않아서' 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러한 시각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철저한 성과 사회인 현재에서 성과가 좋다면 그에 상응하는 충분한 대우를 보장하는데에 반해 반대로 성과를 내지 못하면 철저히 소외당할 수밖에 없고, 이로 인한 상대적 박탈감은 두드러진다. 이 경우 전자의 사람들은 노력의 가치를 믿는 반면 후자의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 그러나, 김연아 선수가 안타깝게 소치 동계올림픽에서 은메달에 그쳤다고 해서 우리가 김연아를 향해 '노력하지 않아서 그렇다'라고 주장할 수 있을것인가? 절대 그럴수 없다. 사실 노력에 경중을 메긴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이야기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는 자신이 아닌 타자를 향해 노력하라고 줄창 외쳐대며 그들의 실패를 노력하지 않은데서 찾는다. 하지만 과연 그렇게 비난하는 자들이 상대방의 노력여부를 정확히 알 수 있을것인가? 기본적으로는 이를 알 수 없으며, 때문에 타자를 비난할 수가 없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누군가는 타자의 성공을 우연함, 또는 사회적 차별에서 그 이유를 찾지만 그들이 비난하는 자가 자신의 온전한 노력을 통해 성공을 거뒀는지는 알 턱이 없다. 결국 우리 사회는 필연적으로 '노력하면 모든것을 가질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라는 모순속에 쌓여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런 사회적 모순이 우리나라의 현실이라면, 우리나라의 수도인 서울에도 이 모순이 녹아있지 않을까? 류신의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에 이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아케이드(Arcade)라는 것은 무엇일까?
이야기를 진행하기에 앞서 아케이드라는 것의 의미를 분명히 짚고 가는것이 좋을 것 같다. 책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 에서는 기술적인 의미에서의 아케이드를 다음과 같이 정의해놓고 있다.
아케이드는 유리 지붕이 덮인 상점가를 위시해 유리 돔이 설치된 홀, 상점이 늘어선 지하도, 건물과 건물을 연결하는 지하 통로나 공중 가교, 투명한 차양이 설치된 노상 시설, 유리와 철골로 이루어진 건축물을 총칭하는 광의의 개념으로 사용됐다. 대형 쇼핑몰, 종합 전시장, 전통 시장, 지하상가, 버스 정류장과 지하철 캐노피 등을 아케이드의 변형으로 간주했다. 형태와 용도의 차이는 있어도 모두 실외를 실내화하고 외부를 내부로 통합한 공간이라는 측면에서 아케이드의 특성을 공유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벤야민은 아케이드의 본질을 이렇게 적시했다. '유리 아케이드는 꿈과 같이 외계를 갖지 않은 건축물이나 보행 공간을 말한다' (p. 11)
발터 벤야민의 책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사용되었던 아케이드의 개념보다는 다소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도 그럴것이 현재에는 더이상 과거의 아케이드와 같은 형태가 국내에 남아있는 경우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 길을따라 케노피가 쳐져 있는 전통 시장의 형태가 과거의 아케이드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이는 형태의 유사성일 뿐 본질적인 측면에서는 그 차이가 있다. 또한 지하상가의 경우 과거의 아케이드와 본질적인 측면에서는 유사한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형태의 측면에서는 다소 거리가 있다. 그러나 저자가 이야기한 '실외를 실내화하고 외부를 내부로 통합한 공간'이라는 정의로 아케이드를 본다면 모두 하나의 것으로 볼 수 있다. 결국 오늘날 서울의 모습을 아케이드 프로젝트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이렇듯 아케이드의 의미를 다시금 정립하는 과정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기술적으로 아케이드를 정의내린 것은 우리가 보고자 하는 서울의 모습과는 크게 연관이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저자가 아케이드라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책 전체에서 아케이드라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서울에 대해서 저자가 갖는 생각은 꾸준히 변해가고, 최종적으로는 글의 끝에서 발터 벤야민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완결짓는다. 그 결론을 먼저 확인하는 것 보다는, 먼저 이 글로 생각을 이어나가면 좋을 것으로 보인다.
아케이드는 도취의 공간이자 우울의 공간이다. 아케이드는 지상의 빡빡하고 누추한 현실을 잠시나마 망각시켜 주는 판타스마고리, 즉 요술 환등의 성전이지만, 갖고 싶은 상품을 향한 리비도가 이 상품을 결코 소유할 수 없다는 각성과 꼼짝없이 독대하면 우울이 생성되는 '이상한 슬픔의 원더랜드'다. 소설 속 여인은 갈구한다. "저걸 가질 수 있다면, 황실의 여인들이 선택할 만한 저걸 가질 수 있다면, 나도 항성처럼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을 것만 같다." 환상과 현실, 매혹과 각성이 진자처럼 오가는 곳이 아케이드인 것이다. 아케이드의 쇼윈도는 '거리'의 일부이면서 동시에 투명한 유리 뒤에서 명품의 특권적 지위와 행인 사이의 '거리(距離)'를 유지시킨다. (p. 101)
노력하면 '가질 수 있다'라는 것의 환등
과거의 사회가 '관'에 의해 모든것이 운영되었다면, 오늘은 원칙적으로 '민'에 의해서 대부분의 것이 운영된다. '자본주의의 보이지 않는 손은 정부라는 보이는 주먹에 의해 운영된다'라고 보는 시각도 있지만, 원칙적으로는 그렇다. 때문에 옛날에는 자신에게 피해가 오면 나랏님탓을 할 수 있었고, 어느 사회나 책임자를 요구하기 마련이니, 왕권이 약하던 과거에는 정 안되겠으면 나랏님의 목을 따는 일도 심심치않게 벌어졌었다. 그러나 현재에는 왠만한 일이 아니고서는 대부분의 문제를 지도자의 탓이 아닌 자신의 탓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서두에서도 설명했었지만, 이는 '노력만 하면 모든것을 가질 수 있다'는 대원칙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이 원칙은 자본주의 사회가 생존할 수 있었던 가장 강력한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과거의 공산주의 사회가 몰락의 길로 접어들게 된 이유가 바로 노력에 따른 보상을 제공하지 않아서가 아니였겠는가.
이런 원칙하에서 꽃피운 놀라운 생산성은 차치하고서, 사람들의 머리속에는 원하는 것은 '가질 수 있다'라는 생각이 조금씩 자리잡기 시작했다. 물론 실제로는 가질 수 있는것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지만, 과거에는 아예 가지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것들도 이제는 '돈'만 있다면 모두 가질 수 있게 변했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산업의 발전을 통해 새로운 물건들도 하나둘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물건들의 일부는 자신들만의 '브랜드'를 구축하기에 이르렀고, 그들은 어느새 '명품'이라는 이름을 갖고서는 사람들의 선망이 대상이 되어갔다.
이 패션의 작동 원리에서 인간은 좀처럼 벗어날 수 없다. 물론 이 페티시즘은 천의 촉감에서 비롯하지 않는다. 구매자의 신경계를 자극 하는 건 원단의 질감만이 아니다. 중요한 건 상표의 짜릿한 촉감이다. 물론 고가 브랜드일수록 쾌감을 더 많이 느낀다.(p. 118)
또한 사람들은 이 상표와 자신을 동일시 한다는 것이다.
햄버거 하우스 버거킹에서는
누구나 공주가 된다
버거킹 마니아, 그녀는
버거킹과의 거리를 가늠하며
이미지의 왕국, 버거킹으로 간다
- 조동범, 버거킹을 먹는 여자 (p. 170)
결국 제품을 소비하는 것을 넘어서서 제품 자체나 상표, 브랜드명에 담겨있는 그 기호와 이미지를 구입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애초에 이런 제품을 구입하지 않는다면 그런 이미지를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하게 만드는데서 문제는 시작된다. 그러면서 사회는 우리들에게 '이런 이미지를 구매하고 싶다면 일하라, 노력하라'라며 강제로 밀어낸다. 그러나 노력한다고 하여 모든것을 가질 수 있을것인가? 이에 대한 해답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제품을 구입한다고 해서, 시의 표현을 빌린다면 '시의 대상이 버거킹을 간다고 하여' 공주가 될 수 없는것은 자명하다. 이는 근본적으로 물신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는것이겠지만,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이 물신주의가 자본주의의 '모든것을 가질 수 있다'라는 환상에 그 기반을 두고 있을것이라는 점을 예측해볼 수 있다.
서울, '소비 자본주의'의 환등상
작품의 표제 또한 기가 막혔다. '신성한 심장'. 종교적으로 해석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 즉 그리스도의 사랑과 속죄를 상징하는 오브제였다. 역설적인 이름이었다. 구보는 그제야 트리티니 가든, 즉 삼위일체 정원에 놓인 거대한 초콜릿 봉지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간파했다. 이곳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숭고한 삼위일체가 역사하는 성소가 아니었다. 물신과 상품(물신의 아들)과 욕망(물신과 상품의 영혼)이라는 '소비 자본주의 삼위일체'가 역사하는 '신성한 심장'이었다. 서울의 아케이드를 다스리는 상품 물신의 심장은 바로 신세계백화점 트리티니 가든이라는 신전 위에서 아주 '키치적'으로 뛰고 있었던 것이다. (p. 113)
손만 뻗으면 닿을 곳에, 대한민국에 있는 모든 물건들을 전시해놓았지만 실상 현실은 유리벽으로 가로막혀 손이 닿기 전에도 막혀버리는 곳.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조금만 더 손을 뻗으면 원하는 무언가를 가질 수 있을것 같지만 뻗다보면 어느새 벽에 막혀 결국은 주저앉는 경우들이 종종 엿보인다. 가질 수 있는 듯 하면서 가질 수 없는 이 자본주의의 모순을 서울은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자본주의의 문제를 단순히 '소비'의 측면에서만 바라본것일 뿐, 그 외의 다른 부분으로까지 이야기가 확대되지는 않는다. 때문에 책은 우리 사회의 다른 문제점을 소비 자본주의하의 문제로써 다뤄내고 있다. 예컨데 소녀시대를 필두로한 현대 아이돌 문화를 '신체는 관음적 시선에 나포된 욕망의 포로이자 소비자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언제나 새롭게 가공되어 쇼윈도에 진열되는 상품(p.190)'으로 본 것이나, 또는 빈부의 갈등을 '부르주아는 우뚝 솟은 성채 같은 고급 아파트 안에서 대중과의 접촉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동시에 게토안에 스스로를 유폐하는 것(p. 291)'으로 본것들이 그것이다.
오히려 단순히 소비 자본주의의 문제를 바라봤다기 보다는 '계산할 수 있는 숫자 안에 모든 것을 용해하는 자본주의 원리(p.45)'에 대해서 비판하고 있는것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아니라면 공리주의 자체에 대해 일갈을 날리는 것일수도 있겠지만, 그 정도 까지 논의를 확장하지는 않는다. 책은 '구보'라는 산책자가 서울을 '산책'하면서 느끼는 여러 감정들, 그리고 소설, 시, 수필속에서 보여지고 있는 서울의 모습을을 그곳에 연관시키면서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하루동안 산책하는 거리에서 받는 감정들만 가지고서는 그런 큰 주제에 대해서 논의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까. 그렇지만 보고있는 것이 어떤것을 목적으로 했건간에 책은 그 일을 충분히 잘 수행해내고 있었다.
보행에서 느끼는 서울의 단편들
프랑스의 문화 사회학자 미셸 드 세르토의 개념을 차용하자면, 구보는 높은 곳에서 관망함으로써 하나의 총체적 이미지로 인식되는 개념 도시(city as concept)보다는 직접 도시의 거리를 걸으며 도시 일상의 세목을 체험함으로써 인식되는 보행 도시(city as pedestrian)의 초안을 작성하고 싶었다. (p. 135)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큰 그림에서 서울을 바라본것이다. 물론 높은 곳에서 관망함으로써 얻어낸 이미지가 아니라 단편 단편을 모아 소비 자본주의라는 큰 그림을 만들어 낸 것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를 단편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약간의 거부감이 생긴다. 그렇다면 책은 이 외의 다른 도시 일상을 놓친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예컨데 스마트폰 중독을 '그곳에 전시된 사람들은 외박을 마치고 자대로 복귀하는 군인들 같았다. 스마트폰이 유일한 위안인 듯 고개를 숙이고 기도하고 있었다(p. 283)'라고 꼬집어낸 부분이나, 길가에 흔히 서있는 가로등을 '가로등이 켜지면 어둠 속을 걷던 행인들이 안전함을 느끼듯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꿋꿋하게 서 있는 가로등 불빛은 생채기 난 사람들의 내면을 따뜻하게 보듬어 안는다(p. 295)'라고 해석해낸 것들이 그것이다.
그리고 유부남이었던 벤야민이 한 여성에게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기 위해 모스크바까지 떠난 일화를 소개함과 동시에, 횡단보도에서 만난 작중 화자 구보의 이상형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 풀어내고 있다. '갑자기 나타났다가 순식간에 사라진 그녀의 얼굴을 구보는 똑똑히 보았다. 고개를 돌려 점점 시야에서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인도에 이르러서도 구보의 시선은 긴 여운을 남기며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계속 쫓았다. 구보에게 이 짧은 횡단보도는 콰이 강의 다리와 마찬가지였다. (p. 254)'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 : 서울은 자본주의 환등상에 불과할까?
과거 아케이드는 근본적으로 소비 자본주의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애초에 아케이드라는 것이 길을 따라 상점을 쭉 나열시키고, 그리고 그 위에 유리돔과 같은 형태의 천장을 만들어 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케이드로 들어온 소비자들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구매할 수 있었고, 비오는 날 은신처 역할을 하기도 했다. 아케이드의 그러한 지위는 백화점이라는 새로운 괴물이 나타나면서 그 힘을 펼쳐보지 못한 채 역사의 뒤안길로 들어가 지금은 그저 흔적만이 남아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해석을 책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다뤄지고 있는 내용으로까지 확대하는 것은 무리다. 글의 처음에서도 언급했듯이 책에서의 아케이드 정의는 다소 포괄적인 개념이라서, 버스 정류장과 같은 일상적인 공간도 아케이드로써 해석되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형 쇼핑몰이나 종합 전시장은 과거의 전형적인 아케이드의 일종이겠지만, 전통 시장이나 지하철 캐노피를 과거의 아케이드로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일상적인 공간까지 아케이드로 정의한 책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단순히 아케이드를 소비 자본주의의 폐해나 그 실상을 담아내고 있는 환등상으로만 그려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마 다음과 같은 말로 아케이드를 마지막으로 정의내린것이 아닐까.
요컨대 아케이드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무늬가 매일매일 새롭게 그려지는 현장입니다. 동시대 문화가 생생하게 공연되는 역동적인 무대입니다. 제가 서울의 아케이드를 산책한 까닭은 여기에 있습니다. 아케이드를 싫어하면서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p.313)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