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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의 추락 - 프로이트, 비판적 평전
미셸 옹프레 지음, 전혜영 옮김 / 글항아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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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는 어떤 논의를 전개해 나갈 때, 그 분야의 권위 있는 학자의 말을 인용하여 주장하는 바의 근거로 삼고는 한다. 마찬가지로, 학자가 자신만의 이론을 학계에 발표하고자 할 때에는 발표하고자 하는 사람이 이전부터 학계에서 인정받아 온 사람이면 그 이론의 논리적인 완결성은 차치하고서 일단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며 인정받기 마련이다. 반대로, 학계에서 존재감이 미약했거나 또는 이제 처음으로 이론을 발표한다면, 게다가 기존의 학설과 정 반대되는 내용이라면, 이론이 주장하는 바와 그에 따른 논리적 완성도가 매우 높다고 하여도 일단은 외면받기 마련이다.

 

하지만 아무리 인정받는 학자라고 하여도, 당대의 지성이라거나 또는 우상이라는 칭호를 받았다고 하여도 학문적인 업적을 떠나서 그의 일면들을 세세히 살펴보면, 사실은 포장됐거나 또는 조작된 것들이 많다. 사회주의의 창시자격인 마르크스도 그의 사생활을 살펴보면 문란하고, 정작 자신의 주변에 있는 노동자는 챙기지 않는 등 모순적인 행동을 많이 보여 왔는데, 책 ‘우상의 추락’을 읽어보면 그러한 사례는 비단 마르크스만의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정신분석학이라는 심리학을 정립한 프로이트도 마찬가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덕분에 프로이트의 이론에 대한 아무런 관심도 없고,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이 책을 읽는다면 프로이트의 이론은 그의 도덕성과 인간성으로 미뤄볼 때 신뢰하지 못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는 데에 큰 도움을 준다. 다른 사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책을 읽은 나의 이야기이다. 정신분석학이 다른 학계로부터 의사 과학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책 ‘우상의 추락’은 프로이트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없다면 너무나도 한 쪽으로만 편향된 정보를 접하기에 딱 좋은 책으로 보인다.

 

하지만 어느 사회에서나 우상은 추락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대중들은 그 우상이 추락하는 것을 즐기면서 ‘저 사람도 나와 별 다를 게 없었네’라는 자기 위안을 얻는다. 그래서 사회는 항상 우상을 만들고, 또 그 우상을 무너뜨린다. 굳이 어떤 사례를 들 필요도 없다. 세상은 변하고, 무너지기 마련이고, 또 사람들은 은연중에 그것을 바라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책 ‘우상의 추락’은 그런 면에서 볼 때 가치 있는 책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하지만 프로이트에 대해서 아무런 지식도 없고, 또한 관심도 없다면 이 책을 읽는 것은 조금이나마 숙고해봐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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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범들의 도시]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공범들의 도시 - 한국적 범죄의 탄생에서 집단 진실 은폐까지 가려진 공모자들
표창원.지승호 지음 / 김영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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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파 범죄학과 좌파 범죄학

 

영화 일급살인은 알카트라즈 감옥을 없애는데 결정적인 계기를 한 실화를 바탕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법정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이니 만큼, 비슷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해나가는 다른 영화와 큰 차이가 없어 보일수도 있고, 때문에 한편으로는 이 영화가 오늘날까지 회자되고 있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의 기법적인 요소가 아닌 영화가 다루고 있는 내용을 보면, 그리고 그 내용이 모두 사실에 기반을 둔 것임을 알게 된다면 왜 오늘날까지 회자되고 있는지를 조금이나마 알아볼 수 있다. 이는 책 '공범들이 도시'에서도 잘 언급되고 있다. 책의 표현을 인용하여 이를 간단히 요약해보면 좌파 범죄학과 우파 범죄학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좌파 범죄학의 경우,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좌파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특정한 범죄가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구조로 인해 발생한 것이라고 바라본다. 앞서 언급한 영화 일급살인의 내용을 가져와보면, 주인공인 헨리 영이 살인을 저지르게 된 이유를 알카트라즈라는 감옥 자체가 가지고 있는 문제로 인해 발생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영화 속 변호사인 스탬필이 법정에서 주장하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실제로 영화가 다루고 있는 가장 주요한 내용이다. 실제로 영화 속에서는 헨리 영과 스탬필이 비슷한 유년 시절에 적은 돈을 똑같이 훔쳤던 이야기를 들려주며 같은 죄를 지었지만 누구는 살인자가, 그리고 누구는 변호사가 되었다는 점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우파 범죄학의 경우, 어떠한 범죄가 사회 시스템적인 결함으로 발생한다고 보지 않고 개인의 정서적 문제로 인해 발생한다고 보는 것이다. 예컨대 도벽이 있는 사람이 물건을 훔친다거나, 타인과 공감하는 능력이 결여된 싸이코패스들이 살인을 저지르는 등이 바로 그것이다. 좌파 범죄학은 이런 범죄자들의 범죄 원인이 된 정서적 문제가 결국은 사회적 결함에 의해 발생했다고 주장하지만, 우파 범죄학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하지만 이를 우생학적인 내용으로 판단하는 것은 금물이다. 단지 우파 범죄학은 범죄에서 '사회에는 문제가 없다'고 이야기 하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좌파 범죄학을 반박하기에는 충분하다. 같은 사회 제도 속에서 비슷한 삶을 살아온 경우에도 누구는 범죄자가, 또 다른 사람은 평범한 시민으로 살아가는 일이 있으니 말이다. 책 속에서 표창원 전 교수도 마찬가지로 '외적 요소들은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다'라고 이야기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시스템적인 외적 요소들을 전혀 무시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는 알카트라즈가 없어진 옛날의 사례를 통해, 이미 외적인 요소로 인해 범죄자가 양산될 수도 있다는 사회적인 합의가 끝났다고 봐도 무방하다. 물론 알카트라즈는 형벌의 과함으로 인해 발생한 문제일 뿐, 우리 사회에서는 의미 없는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겠다. 나 역시도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지만, 표창원 전 교수의 생각은 좀 다른 것 같다. 그는 경찰 시스템과 사법 시스템의 결함과 문제가 또 다른 공범과 또 다른 범죄자를 양산한다고 보고 있다.

 

- 우리 사회의 구조적 모순

 

이미 일어난 범죄를 완벽하게 수사해낼 수 있는 경찰이 완벽한 경찰일 것인가. 아니면 범죄가 일어나기 전에 이를 방지할 수 있는 경찰이 더 완벽한 경찰일 것인가. 사실 그 둘 모두를 할 수 있는 것이 완벽한 경찰이겠지만, 최근까지 우리나라의 경찰은 후자 보다는 전자의 것에 보다 중심을 맞추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표창원 전 교수는 이런 원론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가 하는 말은 경찰이 무능력하다, 사법 시스템이 부실하다가 아닌, '경찰과 사법 시스템이 공정하지 못하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의 반례로써 많은 사람들에 그렇다고 생각하는 여러 이야기들이 언급된다. 그러나 어쨌거나 결국은 이 한 문장이다. 돈의 있고 없고의 차이가 그 사람의 범죄를 결정한다.

 

물론 그가 언급하는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차이는 재벌 총수나, 정치계의 유력자, 또는 일제 강점기 시대에 친일 행동으로 금권을 만든 사람들을 언급하는 것이겠지만 그런 것들을 차치하고서라도 우리나라에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의 갈등은 다른 나라의 그것과는 분명히 다른 성향을 가지고 있다. 빈부격차, 또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화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다른 나라보다 이러한 갈등이 더욱 극명하게 들어나는 것은 분명하다. 그 이유로는 아마 남과 비교하기를 좋아하고, 또 집단과 동화되려는 성향이 강한 우리나라 사람들만의 독특한 성향 때문에 그렇지 않나 생각된다. 그래서 인지 정상적으로 부를 축척한 사람들에게도 화살이 돌아가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로 일전의 지존파 사건만 보더라도 가진 자를 향한 비뚤어진 시선이 어떤 비극적인 결말을 가져올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때문에, 이러한 논의를 전개하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대결 구도가 아니라 정상적으로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하게 가진 자의 대결 구도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정상적으로 가진 자를 그렇지 못한 자보다 분명하게 대우해주는 사회적인 제도가 뒷받침 되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정상적으로 부를 축척한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전향하는 사고를 막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는 어떤가? 어떤 방법으로 가졌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일단 갖는 게 중요한 사회가 되어버렸다. 이는 얼마 전 청소년을 대상으로 진행한 한 설문조사가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해당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44%가 '10억 원을 준다면 징역을 1년 정도 살 수 있다'라고 답했던 것이다. 청소년들이 이러하니, 청장년층은 어떨 것인지 굳이 알아볼 필요도 없다.

 

- 책임감은 n분의 1이 되기 마련

 

“1964년 3월, 뉴욕 주 퀸스 지역 도로에서 캐서린 제노비스라는 20대 여성이 정신이상자에게 35분이라는 긴 시간에 걸쳐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제노비스가 살해되는 35분 동안 뉴욕 도로 인근 집에는 38명이나 되는 목격자가 있었다. 제노비스는 필사적으로 비명을 지르며 도움을 요청했지만 38명의 목격자 중 누구도 제노비스를 도와주거나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다.”

 

많은 심리학책이나 프로파일 관련 서적에서 빼놓지 않고 언급되는 사례 가운데 하나로 제노비스 사건이 있다. 38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살인 사건을 목격했음에도 단 한명도 신고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인데, 이는 책임감은 본래 사람의 숫자에 반비례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군 복무 시절이나 사회에서 응급처치법을 배워본 사람들이라면 알겠지만, 환자를 발견한 후 119에 신고를 부탁할 때, '꼭' 누군가 한 명을 지목하여 부탁하라는 것을 배우게 되는데, 이 역시도 제노비스 사건을 바탕으로 하여 나온 이야기다. 불특정 다수에서 신고를 부탁하면, 그 누구도 신고해주지 않는다.

 

다시 제노비스 사건으로 돌아와보자. 만약 당신이 그 때 제노비스라는 여성이 살해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있었고, 하지만 신고하지 않았다고 하자. 결국 당신은 제노비스가 살해당하는 것을 방관하고만 있었던 것이다. 그럼 당신에게도 죄가 있을까? 형법상으로는 죄가 없다. 설령 그런 죄목이 있다고 해도 너무 급작스럽고 당황스러워 신고하지 못했다고 말하면 누가 뭐라 할 수 있겠는가?

 

- 우리 모두가 공범인, '공범들의 도시'

 

우리 사회는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내실을 들여다보면 분명 어딘가는 상해있고, 누군가에 의해서 들어내져야 함은 분명하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국정원과 전공노의 대선 개입, 여야를 막론한 전대의 친일 행적 등 과연 어디까지가 정상이고 어디까지가 비정상인지 조차 가늠할 수 없는 작금이다. 그리고 우리는 '언제나 그랬듯이' 별 관심 없이 흘려보낸다. 어차피 바뀔 수도 없고, 바뀌지도 않을 것임을 지난 시간들을 통해 꾸준히, 그리고 쭉 학습해 왔기 때문이다. 도덕적으로 완전무결하다던 국민의 정부나 참여 정부 역시도 정권 말부터 불법 대북 송금이나 비자금 논란에 꾸준히 시달려왔고, 사대강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자부했던 전 정권 역시도 까보니 문제들이 상당했다. 한번 찍었던 사람이 문제되어 다른 사람을 찍어도 봤는데, 별로 변화가 없었으니 그냥 그러려니 하고 사는 것이 새삼 이상할 것도 없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장기적으로 우리 사회의 가치관 자체를 흔들어 놓는다. 사회적 평가의 기준이 정당한가 그렇지 못한가와 같은 방법론적인 태도는 온전히 배제한 채 단순히 있는가 아니면 없는가, 있다면 얼마나 있는가와 같은 정량적인 평가로만 그친다면 그 누가 정당하게 살아가려 하겠는가? 그리고 비단 고위층에서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한 채 살아가다 보면, 어느 덧 우리 삶 속에서도 페어플레이는 실종된 채 반칙만이 남아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회사 입사 지원서의 자기소개를 대필하거나 베껴 쓰는 것이 일상화된 사회에서, 대학 입시나 특목고 진학 시에 작성하게 되는 자기소개서를 부정한 방법으로 작성할 것은 자명하지 않은가.

 

단순히 목도하고 없는 일이던 것처럼 넘어가는 것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언젠가는 나에게 돌아올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현상이 사회 전체에 퍼질 수도 있다는 것. 그래서 제노비스 사건에서 신고하지 않은 이들은 형법상으로는 죄가 없지만 결국 그들은 모두가 공범이다. 오늘날 경찰 시스템과 사법 시스템을 공범이라고 부르기 전에,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을 한번 바라보자. 우리는 공범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우리 모두가 공범인 '공범들의 도시'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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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 영화 같이볼래요?


 드라마는 장면을 놓치면 VOD를 보거나, 또는 재방송을 통해 다시 챙겨봐도 되지만 극장에서 영화를 볼 때 한번 장면을 놓치면 다시 보기 어려운게 사실입니다. 더군다나 드라마와 같은 경우 긴 시간동안 호흡을 끌어가기 때문에 모호한 장면보다는 직관적으로 메시지를 보여주는 경우가 많은데, 영화는 짧은 시간동안 많은 호흡을 이어가야 하기 때문에 대체적으로 메시지를 함축적으로 밖에 보여줄 수 없습니다. 달리 말하면 '한 번 봐서는 영화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는 이야기 입니다. 그래서 영화는, 극장에서 시작해서 극장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극장을 들어가는 순간부터 극장을 나와서 까지도 쭉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책 '그 영화 같이볼래요'는 쉽게 이해하지 못했던 영화의 진짜 메시지, 그리고 비하인드 스토리를 잘 담아내고 있는 책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2. 온도계의 철학


 일반적인 공대의 학부생인 경우 2~3학년 즈음에 기계공학실험이라는 과목을 수강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해당 과목은 대개 고체 파트(기계)와 열유체역학 파트로 나눠지게 되는데, 그 중 항상 빼먹지 않고 실험하는 것이 바로 온도 측정 실험입니다. 대개 이 실험을 처음 진행하게 되면 '온도계로 재면 되는게 온도인데 그게 무슨 큰 대수라고 실험을 진행하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막상 실험을 진행하다보면 세상에 온도를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이 이렇게 많은지, 그리고 정확한 온도 값을 얻는 과정이 얼마나 어려운 것임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과학과 공학 모두 정확한 온도 값을 얻어내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정 중 하나입니다. 때문에 온도를 측정하는 것과 같은 기본 과학들은, 실제 우리 삶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사실은 너무나도 중요한 것들 중 하나입니다.






 3. 로봇윤리


 영화로도 만들어졌던 소설 '아이로봇'에는 다음과 같은 '로봇의 3원칙'을 통해 로봇의 윤리를 규정합니다. 로봇의 3원칙은 ① 로봇은 인간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 되며, 위험에 처해 있는 인간을 방관해서도 안 된다. ② 로봇은 인간의 명령에 반드시 복종해야 한다. ③ 로봇은 자기 자신을 보호해야만 한다. 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인간과 로봇의 주종관계를 설정한 매우 커다란 범주의 원칙으로써, 세세한 상황에 대해서는 다소 불명확하게 적용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로봇 공학이 날이 갈수록 성장해가는 오늘날 현실에서 로봇의 윤리에 대해서 고민해 보는 것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문제이며, 때문에 책 '로봇윤리'는 로봇공학을 전공하고 있다면 꼭 읽어봐야 할 책일 것입니다.







 4. 예수는 괴물이다


 신이 있다, 없다에 대한 논쟁은 꾸준히 이어져 왔지만 '신이 없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종교가 바로 기독교다'라는 이야기는 다소 낯선 이야기입니다. 책은 '진정한 기독교는 무신론이다'라고 역설하며 '실존하는 것은 신이 아니라 이를 믿고 이에 따라 행동하는 개인들이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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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없는 에세이]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인기 없는 에세이 - 지적 쓰레기들의 간략한 계보
버트런드 러셀 지음, 장성주 옮김 / 함께읽는책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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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


러셀의 여러 저작들 가운데, 금번에 이야기 하고자 하는 <인기 없는 에세이>를 제외하고서 내가 접한 책은 행복의 정복이 유일하다. 그나마도 책을 완독하지는 못했는데, 첫 번째는 잘 시간도 부족한 군에서 처음으로 접했다는 이유고, 두 번째는 그래서 사색할만한 여유도 없는 판에 철학적인 배경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이 책을 접했다는 이유도 한 몫 거들었다. 어쨌든 몇 장 읽어보지 않고 책은 다시 도서관의 한 편으로 밀려 들어갔는데, 아마 그 이후로 그 책은 군 도서관에서 빛을 다시 보지 못했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서인지 이번에 러셀의 책을 읽게 되면서도 그 때의 악몽(?)이 다시금 살아나는 것 같아서 주저할 수 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애석하게도, 러셀의 책을 처음 접할때와 마찬가지로 이 책 역시도 읽을 시간이 없었다. 혹자는 책은 짬짬이 읽는게 아니라 시간을 내서 읽는거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책을 읽을 시간이 없다는 것은 아마 누구나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아마 수능이 한 자리로 다가왔는데 책을 읽으라고 독촉하는 듯한 느낌을 상상하면 될 것 같다. 여차여차 해서 주변이 조금 정리되고 러셀의 <인기 없는 에세이>를 읽기 시작했는데, 1장 '이 모든게 정치와 무슨 상관인가?'를 읽으면서 그 옛날 행복의 정복을 읽으면서 느꼈던 감정들이 과거의 기억 깊숙한 곳에서 스멀스멀 올라오고야 말았다. 헤겔의 철학과 교조주의에 대하여 신랄한 비판을 하며 그에 대한 대안으로써 경험론적 자유주의를 제시하고 있다는 것 정도야 이해할 수 있었지만 어떤 흐름을 따라서 그런 결론을 내리는지는 사람에 따라 다소 어렵게 다가올 수도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너무 쫓겨가며 읽어서 그런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나 그 이후로 책은 읽어 나가는 데에 어려움이 없다. 2장 '초보자를 위한 철학' 이후로 다뤄지는 다른 에세이들은 1장에 비해 비교적으로 쉽게 기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상대적으로 보편적인 주제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는 점도 한 몫 한다. 어쨌건 1장을 빼면 책은 서문에서 언급했던바와 같이 '쉽다'


다만 책이 쉽게 씌여졌다는 이유로 평가절하를 당할수도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대개의 철학서라는 것이 일반인들이 쉽게 읽기에는 난해한 문장과 단락으로 이뤄져 있는 경우가 많고, 또한 비평가의 눈과 일반 대중의 눈은 전혀 다른 별개의 시선이라서, 의도적으로 대중의 시선에만 맞췄다가는 수준이 낮다는 이유로 비판받을 여지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시선을 러셀도 의식했는지 책의 제목을 '인기 없는 에세이'라고 뽑지 않았던가. 그렇지만 러셀 스스로가 인기 없을 것이라고 평하던 그의 에세이들은 단순히 쉬운 것으로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2.


책은 러셀이 그 당시에 출판하지 못하고 가지고만 있던 여러 에세이들을 묶어서 담고있다. 그래서 각각의 챕터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기 보다는 각각의 별개의 내용을 다루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9장과 10장처럼 인류의 도움이 / 해가 된 관념들을 제외하면) 그러나 책 '인기 없는 에세이'속 에세이들이 담고 있는 내용들은 결국 하나의 특이점으로 수렴하고 있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이는 책의 여는 글 속에 담겨져 있다. '그 목표는 이제껏 우리의 비극적인 세기를 특징지었던 교조주의가 좌파에서도 우파에서도 성정하지 못하도록 어떻게든 막는 것이었다'


러셀은 여러 이유들을 언급해가며 이를 계속하여 보여주고 있지만, 사실 어떤 이유에선 간에 교조주의가 비극적인 결론으로 수렴하는 것은 분명하다. 러셀은 책 속에서 '불분명한 미래의 선을 위해 명확한 현재의 악을 감내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교조주의적인 성향을 띄는, 예컨데 종교라거나 공산주의, 파시즘, 나치즘 등의 모든 것들이 모두 이러한 행동을 강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부 극성 종교의 경우 내세의 구원을 위해 현세에서의 무리한 행동을 요구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나치즘의 경우에는 유대인을 몰살시키는 것이 미래의 선을 매우 확실하게 보장해주는 것이 아님에도 이를 실천으로 옮기는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들은 현실속에서 경험을 통해 자신이 먼저 세운 가설을 수정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으며,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만이 유일한 진리라고 생각한채 세상을 만들어 나간다. 이러한 극단적인 태도가 인류를 어떻게 파멸로 몰아넣을지는 확인하지 않아도 자명하다.


이는 우파와 좌파를 막론하고서 어느 곳에서든지 있어 왔던 것도 사실이다. 우파는 굳이 언급하지 않고, 좌파만을 살펴보자. 우리가 흔히 좌파라고 생각되는 사상을 나라의 핵심 사상으로 삼았던 소련을 살펴보면 된다. 러셀은 책속에서 '러시아와 비슷한 기후를 갖는 캐나다에서는 밀의 품종 개량을 위해서 실험을 하지만, 소련에서는 밀의 품종 개량을 위해 마르크스의 사상을 뒤적여 본다'라며 극단적으로 표현해놨는데, 실제로 그렇다. 애초에 교조주의적 성격을 띄는 그 어떤 곳이던지 간에 이러한 모습을 보일 수 밖에 없으니 말이다. 예컨데 이런것이다. 몸에서 열이 나고 너무 아파 이야기 했던이 병원에 데려가기는 커녕 기도를 해주는 것. 보다 극적인 사례들은 그것이 알고싶다 에서도 여러번 방영되기도 했다.


3.


이러한 교조주의가 판치는 세상속에서 유일한 해답은 명확하다. 러셀의 표현을 빌리자면 '경험적 자유주의'라고 할 수 있겠다. 하나의 가설을 설정하였다면, 이를 금과옥조처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일상적인 경험을 토대로 이러한 가설을 수정해 나가는 것.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오늘을 위해 살아라'는 것은 아니다. 다가오는 겨울과 봄을 대비하기 위해 식량을 비축하고, 기계를 손보는 것과 같은 일들은 현재의 시선에서 바라보면 귀찮고, 또 힘든 일이기도 하지만 다가오는 미래의 안녕을 비교적 '분명하게' 보장해준다. 이러한 경우라면 현재에서의 고통을 다소 감내할 수 있을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음에도 무조건적으로 어떠한 사상을 쫓고 추종한다면 이는 비극적인 결론에 도달할 수 밖에 없다. 러셀의 이러한 이야기는 반 세기도 더 된 이야기이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는 우리나라의 좌파나 우파 모두가 가지고 있는 한계이기도 하다. 러셀의 이러한 주장을 단순하게 넘어가버린다면, 인류의 역사에 발전이라는 것은 아마 없을것이다. 오늘날의 과학이 옛날의 뉴턴 역학만을 쫓고, 무조건 그것만이 진리라고 생각했다면 상대성 이론이나 양자 역학과 같은 새로운 과학은 등장할 수 없을 것 처럼 말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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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불평등을 감수하는가]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 가진 것마저 빼앗기는 나에게 던지는 질문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안규남 옮김 / 동녘 / 201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책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가 전달해주는 가장 주된 내용은, 오늘날의 경제체제는 근본적으로 소득의 불평등을 가져 올 수 밖에 없다는 것으로 보인다. 시장경제가 기대하던 '낙수 효과(trickle down)'가 사실상 커다란 효과를 가져다 주지도 못할 뿐더러, 이런 그럴듯한 이유로 하여금 소득과 계급의 고착화를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는 이야기가 책 전반에 깔려있는 내용이다. 오늘날 시장경제체제에 대한 비판이야 지금까지 쭉 있어왔던 부분이고, 그 내용이 낙수 효과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는 것 역시도 지속되어 온 부분이기 때문에 새로운 점은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논의가 불필요 하다고는 할 수 없다. 실제로 이러한 효과를 기대하며 이뤄진 정책들 중 상당수가 대다수 시민들의 구매력을 향상시키는데에 긍정적으로 작용하지 못한 사실들이 많은 곳에서 관찰되어 왔기 때문이다. 다만 <불평등의 대가>에 대한 답이라는 책의 거창한 소개문에 비한다면 이는 추레하기 그지없다.


더군다나 이 책이 포커스를 맞추고 있는 불평등의 개념 역시도 현재의 나를 기준으로 했을 때의 상류층에게만 국한되어 있을 뿐, 자신의 위치에서 아래를 본 시선으로 나타나고 있지는 못하다. 우리가 살고있는 국가 뿐만이 아니라 더 큰 범위에서 전세계를 놓고 이야기한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역시도 누군가에게는 불평등이다. 물론 책이 보여주고 있는 부유와 빈곤의 차이는 전세계적 범주에서 논하고 있다는 반론이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글을 읽고 난 후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보다 아래, 그리고 전세계적인 범위에서 이 논의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위치에서 위로만의 불평등에 국한하여 이 논의를 이해한다는 것은, 읽는 이의 문제라기 보다는 책 자체의 문제라고 할 수 밖에 없다. 1명의 부자를 만들기 위해 500명의 '평범한' 사람이 희생되어야 한다면, 그 1명의 평범한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는 다시 500명의 '극빈곤층'의 목숨을 담보로 할 수 밖에 없다. 이는 재화가 한정되어 있는 이상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일 수 밖에 없다. 엄청난 재난이 발생하여 지구가 새롭게 출발하지 않는 이상은.


당장 내 주머니에서, 내 통장에서 돈을 빼어 극빈곤층의 삶을 위해 지원하는 것을 꺼려하는 이들이 이 책을 읽고서 '불평등을 향한 투쟁'을 외친다는 것은 넌센스다. 물론 일부의 소수 계층이 다수의 재화를 독점하고, 그리고 여남은 것만을 대다수의 사람들이 향유한다는 것은 상당히 불합리한 일이며, 수정되어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온전히 자신의 노력으로 그 자리에 디딘 사람을 우리는 비난할 자격이 있을까?


예전에 한동안은 이런 이야기가 돌아다녔던 적이 있었다. 학벌을 우선시 하는 국내 기업 인사문화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기업에서는 이력서란에서 학력란을 없앴고, 학벌을 전혀 배제한채 신입사원들을 뽑아봤는데, 우습게도 절반 이상의 학생들이 우리가 소위 명문대라고 불리우는 학생들이였다는 이야기다. 다만 명문대를 들어간 사람들의 상당수가 상류층의 자제들이고, 또한 그런식으로 보다 질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충분한 실력을 쌓을 수 있었다는 반론이 있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현재의 사회제도 내에서 충분히 그 간격을 좁혀나가기 위해 논의할 수 있는 부분이며, 때문에 경제체제를 엎어버리자는 논의를 뒷받침할 근거는 되지 못한다. 또한 이러한 반론은 그런 상류층의 자제임에도 명문대에 진학하지 못한 다른 경우, 그리고 힘든 집안 사정에도 명문대에 진학한 많은 사례나 훌륭하게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경우에 의해 충분히 반박될 수 있는 근거다. 결국 명문대, 그리고 우수한 졸업이 온전히 돈으로만 이뤄진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때문에 명문대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곳을 위해, 그리고 그곳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준비한 이들에게 지역 균형 선발이라는 공기업의 입사제도는 오히려 그들에게 또 다른 차별로 다가올 수도 있을테다.


이는 우리에게 불평등이라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새롭게 던진다. 단순하게 재화의 풍족함과 부족함으로만 불평등을 따지면 명문대라는 간판과 지방대학이라는 간판 그 자체는 불평등이다. 하지만 그들이 노력하여 명문대에 진학했지만 그러한 불평등을 없애기 위해 지역 균형 선발 제도를 만들었다면, 이는 명문대생들에게는 또 다른 불평등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앞서 언급했듯이, 가난한 집의 자녀들도 충분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자는 주장을 할 수 있을것이다. 이러한 제도의 보정을 통해 불평등을 해소하자는 이야기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주장속에 불평등의 진정한 의미가 숨어있다. 불평등은 재화의 풍족함이나 부족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기회와 여러 환경들에서 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경제 체제하에서 이러한 기회의 불평등 양상이 조금씩 엿보이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전에 있었던 영훈국제중입시비리사건등이 바로 하나의 예가 될 것이다. 그나마 국내의 경우는 미국과 같은 국가에 비해 낫다. 우리나라는 예전부터 교육의 가치를 높게 평가해오던 관습이 남아 있어서, 3불정책(본고사, 고교등급제, 기여입학제 불가)이 여전히 유효하게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교육의 차원에서만 바라본 것이지, 보다 넓은 안목으로 바라본다면 이런 기회의 불평등이 사회 곳곳에 남이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오랜 시간동안 사회적 논의를 거쳐 다른 대안을 토대로 분명 수정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지금의 체제를 엎고 다른 체제를 만들것인가? 과연 만든다면 무엇을 어떻게 만들것인가? 시장경제가 태생적인 한계를 갖고 있지만, 그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된 여러 정책들에 비해 가장 온전하게 작동하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더군다나 시장경제가 가지고 있는 한계 역시도 '인간이 충분히 이성적이고 도덕적일 경우'라는 가정 하에서는 발생할 수 없는 작동들이다. 애초에 애덤 스미스도 국부론에서 '인간의 이기심은 사회의 도덕적인 한계 내에서만 수용된다'라고 주장하며 도덕적인 가치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애덤 스미스는 애초에 도덕 철학자였다.) 때문에 사회를 이상적으로 그려냈던 그의 머리속에서는 아마 시장경제의 이러한 역기능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맑스가 사회주의의 처참한 결말을 예상하지 못했을 것 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는 달리 말하면, 애초에 이런 모든 것들은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 밖에 없는 부분이라는 생각도 해볼 수 있다.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설령 그렇다고 해서 불평등에 대한 논의가, 그리고 이러한 불평등을 어떻게 하면 줄여 나갈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무가치하지는 않다. 불평등이 심화된 사회에 밝은 미래를 기대한다는 것은 사실상 어렵기 때문이다. 때문에 책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가 주장하는 바에 모두 동의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불평등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이야기에는 공감할 수 있을것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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