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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나는 당신이 달다 - 어느 여행자의 기억
변종모 글.사진 / 허밍버드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048.


공대생 유머.

공대생은 인사로 이 세 마디를 한다. 과제 했냐? 저 여자 예쁘지 않냐? 밥 먹었냐?


남자 이야기.

나중에 밥이나 한 끼 먹자 해놓고 먹는 일이 없다.


엄마 이야기.

자식이 밥을 많이 먹어도 더 먹이고 싶다.


회사 이야기.

점심시간에 맛난 점심을 먹으면 계약성립이 수월해진다.



  모두들 매일 밥을 먹는다. 모종의 이유로 안 먹기도 하지만 결국은 다른 형태로 어떻게든 먹는다. 배고플 땐 사나워지지만 점심시간에는 매일 화만 내는 상사도 잠시 인자해진다. 식욕은 기본적인 욕구 중에 생명을 이어가는 데 가장 중요하다. 아무리 바빠도 밥 먹고 하자는 외침에 다들 자리를 뜨고, 아무리 미운 상대라도 밥은 먹고 다니냐며 걱정스런 질문을 하기도 한다. 학창시절 학교에 지각이라도 할라치면 어머니는 외치셨다. 밥은 먹고 가야지!


  여행 에세이집 <아무도 그립지 않다는 거짓말>, <여행도 병이고 사랑도 병이다>를 쓴 변종모가 새 에세이집을 꾸렸다. 여행과 그리움이라는 기본적인 테마를 깔고, 이번에는 독자에게 특별히 밥을 차려주었다. 기존의 에세이집이 다른 이들과의 관계와 에피소드, 낯선 곳에서 문득 생각나는 그리운 사람, 처음 보는 장면에 대한 찬탄을 다룬다면, 이번엔 낯선 길에서 낯선 이와 함께한 식사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낸다.


  낯선 길 위에서 혹은 몸이 지친 어느 날들에는 자주 생각날 것이다. 이제, 다시는 먹을 수 없을 그 과일 물김치가 자주 생각이 날 것이다. 나에게 그것은 어린 시절 달콤한 물약 같은 만병통치약. 어머니의 과일 물김치는 내게 반찬이 아니라 약이다. _69쪽


  변종모뿐 아니라 모두에게 밥은 향수와 같다. 우리의 머릿속 추억에는 몇 가지 음식이 있기 마련이다. 어릴 적 어머니의 음식은, 지금 보면 별 거 아녀 보일 수 있다. 인생을 살면서 그것보다 훨씬 값비싸고 으리으리한 음식을 많이 먹기 마련이다. 하지만 우리는 어린 시절 먹었던, 그 단촐해 보이는 음식의 맛을 잊지 못하고 평생 맛의 세계를 겉돈다. 다이나믹 듀오도 어머니의 된장국을 그토록 부르지 않았는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음식 냄새를 맡자 그에 대한 기억이 떠오르듯이, 밥에 관한 기억은 추억을 부른다. 그리고 그 추억은 무의식 저 아래에 있던 사람과 감정을 끄집어낸다.


  처음 보는 당신이 나에게 밥은 먹었느냐고 따뜻하게 물었을 때, 나는 비로소 두고 온 곳의 내 소중한 사람들을 뜨겁게 떠올렸다. _프롤로그


  변종모는 요리사가 아니다. 음식을 먹는, 일상적인 사람일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음식 얘기를 쓰면서도 음식에 대해서만 말하지 않는다.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써서 다소 늘어지는 느낌이 든다. 다만 자신의 추억담이 아닌 다른 사람과의 식사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이 흥미롭다. '이유 없이 좋아하다 보면 끝내 이유가 생긴다', '내가 잠시 당신에게 빈 그릇이었나 보다'라는 문장들은, 긴 산문 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문구다. 그렇게 맛있게 먹던 짜이(인도식 밀크티)가 사실 갠지스 강물로 만든다는 걸 봤을 때 느낀 당혹스러움에선 유머와 동시에 성찰이 느껴진다.


  밥은 생명이고 온기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마음 속에 따뜻한 부엌이 있다. 밥을 먹을 땐 말을 많이 하지 말라고 한다. 같이 밥을 먹는 그 순간만큼은 마음의 온기를 조용히, 또 온전히 느껴보라는 말이 아니었을까. 차린 건 많이 없지만 많이 드세요. 제 마음입니다. 누군가의 말없는 속삭임이 들린다.



  잠들지 못하는 밤,  P는 지나간 사랑 이야기를 검은 천장 위로 쏟아내곤 했다. 사랑이 지나간다는 것, 지나가고 있다는 것이 그렇게 검은 천장 같은 아득한 것이라는 것을 나는 직감하지 못했으므로 그저 들어주기만 하던 날들. _28쪽


  KKH의 그 높은 도로 위에서 중년의 남자들이 허옇게 뿜어대던 휴식의 시간에 잠시 삶이 고달프다 생각했던 것도 어쩌면 목구멍 깊숙이 박힌 어머니라는 단어 때문인지도 몰랐다. 나도 이제 그들의 나이로 달려가고, 그들처럼 검은 밤하늘을 바라보며 길게 담배 연기를 뿜는다. 알 수 없는 밤하늘이 펼쳐져 있을 때 허연 달을 보면서 어머니가 누운 방향으로 고개 돌리는 날이 많아졌으므로. _65쪽


  이유 없이 좋았다. 그렇게 이유 없이 좋아하다 보면 끝내 이유가 생기는 것이다. 왜 사랑하냐고 묻지 마시라. 그냥 사랑하고 그냥 좋아하는 그 마음이 가장 순수한 것을. 그것을 의심하지 마시라. _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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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인시공 - 책 읽는 사람의 시간과 공간
정수복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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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3.


  내 이상형은 책을 좋아하는 여자다. 아무리 어리고 예뻐도 그건 결국 한순간이고, 나이나 외모도 시간이 지나면 시간과 함께 그 또한 지나간다. 마인드가 통해야 대화도 통하는데, 내 마인드는 책과 영화에 쏠려 있기 때문에 결국 책을 읽는 사람을 찾게 된다. 잠시 마음에 품었던 한 여인은 너무나 귀여웠지만 책을 지독히 싫어해서 곧 싫증이 나고 말았다. 여자만 섹시한 게 아니다. 책을 읽는 남자도 굉장히 매력적이다.(커밍아웃이 아니다) 남녀노소를 떠나 책을 읽는 행위는 아름답고 섹시하다.


  <책인시공>은 노신사가 서점의 좁은 문에 서서 책을 들여다보는 사진으로 시작한다. 백발의 신사. 눈도 잘 보이지 않을 텐데 안경까지 벗고서 책 읽기에 몰두한다. 나이가 들었어도 어디에 기대지 않고 꼿꼿이 선 모습이 서점 특유의 분위기와 어울려 뭔가 결연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사회학자이면서 예술로서의 사회학을 지향하는 정수복은 <책인시공>에 파리 곳곳의 책과 책을 읽는 사람들을 찍었다. 땡볕 아래지만 그늘에서 책을 읽는 사람, 공원 벤치에 앉아 책을 읽는 사람, 카페에서 책을 읽는 사람, 서점 매대의 책을 보며 즐거워하는 사람, 시끄러운 길거리에서도 책을 손에 든 사람, 길을 걷다가 문득 생각이 떠올라 가게 벽에 기대어 글을 적는 사람 등 온갖 곳의 사진이 있다.


  우리나라는 길거리와 공원에서 책 읽는 사람이 드물지만 책 읽기를 좋아하는 이들에겐 <책인시공>의 사진이 친숙할 것이다. 사진이 말하고자 하는 건 책을 읽는 장소가 아니라 사람이기 때문이다. 책에 빠져서 허리는 점점 굳어지고 읽기에 몰두한 나머지 자세가 점점 흐트러진다. 벽에 기대기도 하고 때론 자세가 불편해 부스럭거리기도 한다. 책을 읽는 내내 표정은 완전히 사라지고 누가 불러도 반응이 없을 때도 있다. 영혼이 책에 쏙 달라붙었기 때문이다. 사진은 문화의 도시 파리에 사는 사람도 책에 몰두할 땐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보여준다.


  정수복은 책과 사람 사진 외에 책 읽기에 대한 잡담을 잔뜩 썼다. 잡담이라고 시답잖은 글은 아니다. 책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푼 후에 여러 사람들(자신이나 다른 사람, 특히 작가들)이 말한 책 읽기 좋은 시간과 장소에 대해 말한다. <책인시공>의 매력은 인용되는 여러 텍스트에 있다. 한국과 파리를 오가는 동안 자신만의 서재를 잃어버리고 다시 꾸리는 글에서 기형도의 시 '오래된 서적'(주1)을 말하는 순간, 서재의 모든 책이 자신을 꺼내 읽어 달라고 아우성하는 소리가 들린다. '르 몽드'지에 실린 '책 읽기에 즐거움' 리스트에 든 '책을 읽고 있는 애인의 왼쪽 다리에 오른쪽 다리를 포개고 침대 위에서 책 읽기'라는 문장을 보면 야릇하지만 평온한 기분이 든다.


책의 압권은 서장에 해당하는 '독자 권리 장전'이다.(주2) 프랑스 작가 다니엘 페낙의 <소설처럼>에서 쓴 '독자의 절대적 권리들'을 정수복이 재구성하고 보완하였다. 17개의 항목으로 이루어진 이 장전은 책을 읽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글이다. 우리는 어디에서든, 언제든 아무 책이나 읽고 그 즐거움을 탐닉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소리내서 읽을 권리도, 다른 일을 하면서 읽을 권리도 있다. 많은 사람이 읽는 책을, 아예 책을 읽지 않을 권리도 있다. 책 읽기에 사명감도 목적도 가질 필요가 전혀 없다. 책 읽기는 유의미하고 동시에 무의미하다. 독서 그 자체를 그저 즐기면 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주1.

내가 살아온 것은 거의

기적적이었다

오랫동안 나는 곰팡이 피어

나는 어둡고 축축한 세계에서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질서


(…)


나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모두

나를 떠나갔다.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누가 나를

펼쳐볼 것인가


_기형도, 「오래된 서적」 중에서



주2.

1. 책을 읽을 권리

2. 책을 읽지 않을 권리

3. 어디에서라도 책을 읽을 권리

4. 언제라도 책을 읽을 수 있는 권리

5. 책을 중간중간 건너뛰며 읽을 권리

6. 끝까지 읽기 않을 권리

7. 다시 읽을 권리

8. 아무 책이나 읽을 권리

9. 많은 사람이 읽는 책을 읽지 않을 권리

10. 책에 대한 검열에 저항할 권리

11. 책의 즐거움에 탐닉할 권리

12. 책의 아무 곳이나 펼쳐 읽을 권리

13. 반짝 독서를 할 권리

14. 소리내서 읽을 권리

15. 다른 일을 하면서 책을 읽을 권리

16. 읽은 책에 대해 말하지 않을 권리

17. 책을 쓸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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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사물의 기원
장 그노스.김진송 지음 / 열린책들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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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036.


  두 달 전 읽은 김진송의 책 <이야기를 만드는 기계>에는 악마의 형상을 한 나무 조각과 함께 '암흑의 신 페트롤리우무스의 전설'이라는 이야기가 써 있다. 석탄과 석유를 암흑의 신이 플린 피로 묘사한 뒤 악마의 검은 피가 인류의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한, 소설의 형식을 빌린 글이다.(주1) 많은 소설을 봐왔지만 이처럼 신선한 글은 많이 보지 못했다. 이 글은 <인간과 사물의 기원>(이하 <기원>이라는 책에서 발췌했단다. 배송기간 이틀을 기다리기조차 싫어서 그날로 서점에 가서 책을 골라왔다. 책을 산 지 두 달이 넘도록 펴보지도 않았으니 결과적으로 그때의 책 구입은 인터넷 서점 할인금액과 왕복 교통비만큼의 손해가 있었다. 허나 책을 다 읽은 지금, 그 값어치를 톡톡히 했다는 것을 느낀다.


  <기원>은 거짓말을 담은 책이다. 저자 장 그노스는 소설이 아니라고 하지만(정확히는 그런 구분 따위는 신경쓰지 않는다고 말한다) 명백한 소설이다. 첫째로 모든 이야기가 전혀 말이 되지 않는다. 개와 의자가 서로를 닮고 싶어서 비슷한 모양새로 진화했다든가, 비행기가 하늘에 뜨는 원동력이 염력이라든가 하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풀어낸다. 둘째로 글을 풀어쓸 때의 시점이다. 보통의 이야기에서는 현대인이 분명한데, 지금의 서울이 유적지로 발견됐을 땐 먼 미래의 고고학자가 되고 심지어 '철갑충과 그 기생 동물'에서는 차와 인간을 연구하는 외계인이 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기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구라에 의존한 이야기다.


  재밌는 건 허무맹랑한 진실과 거짓말을 구분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진실과 거짓은 한 끗 차라는 말도 있듯이 이 소설은 아주 그럴 듯하다. 이는 논리의 전개에 의거한다. 삼단논법- 'A가 B이고 B가 C라면 A는 C다'라는 명제는 아주 단명한 논리다. 재밌는 건 가장 처음 가정이 틀리다면 결론도 틀리지만 논리적으로는 적확하다는 것이다. <기원>은 삼단논법의 허점을 교묘하게 파고든다. 장 그노스는 처음부터 자신이 거짓말을 할 것이라고 단언한다. 완벽한 논리로 구성된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진실과 허구의 경계가 희미해진다. 이야기가 거짓임을 분명히 알지만 논리적으로 아귀가 딱딱 들어맞는 데다가 명쾌하기까지 하니, 머리가 어지러울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과연 내가 아는 진실이 정말 '진실'이 맞는가. 우리가 역사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 증거와 개연성에 의존한다. 최초의 인류라는 것은, 그 전(前) 시대 인류의 뼈가 발견되기 전까지만 '최초'이다. 인간의 역사 연구는 진짜 역사가 아니라 학문 오류의 역사일지도 모른다. 증거(가정)가 거짓일지도 모르는데 완벽한 개연성(논리)만 붙들고 진짜를 외치며 으스대는 꼴이다. <기원>은 학문의 논리적 허구성을 말하며, 더불어 세상을 거꾸로 보는 능력을 선사한다.


  진실과 거짓과 논리, 이런 것들을 다 차치하고서도 <기원>은 텍스트 자체로도 매우 흥미롭다. 가장 재밌게 읽은 꼭지는 '비행기가 뜨는 힘'이다. 보잉747은 무게가 150톤에 육박한다. 이런 무게가 공기층과 얇디 얇은 날개가 만든 양력으로 하늘로 뜨다니, 과학적 근거가 확실해도 믿기지가 않는다. 그렇다, 장 그노스에 의하면 비행기는 인간의 염력에 의해 하늘을 난다. '난다'는 것은 인간을 지배하는 중력에 완전히 위배되는 개념이다. 자신과 반대되는 개념을 본능적으로 아는 승객들은 비행기가 하늘로 뜨려는 순간 누구랄 것도 없이 염력을 발생시킨다. 거짓말인 게 눈에 딱 보이지만 너무나도 교묘히 이야기를 전개하기 때문에 깜빡 속을 수밖에 없다. 아니, 염력은 진짜일지도 모른다.


  '강자 보호와 약자 처벌에 관한 법률'(일명 강보약처법)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국가의 성장이 정체된 시기, 정부는 국민을 점수로 구분한다. 그리고 각 계급(본문에서는 계급이라고 부르지 않지만 재산과 자위, 학력, 직업 등으로 단계별 점수를 매긴 것으로 보아 계급이라고 칭해도 좋을 듯하다)은 각자의 색깔카드를 갖는다. 카드는 큰 힘을 갖는데, 어떤 사고가 벌어져도 색카드 하나면 모든 상황이 종료된다. 보다 하위 색카드를 가진 사람은 무조건 상위 카드에게 양보해야 한다.(이외에도 많은 혜택이 있다) 인도의 카스트 제도와 마찬가지인 셈이다. 강보약처법은 카스트 제도와는 다르게 얼마든지 계층간 이동이 가능하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죽어라 일한다. 국민이 열심히 일할수록 나라는 번창한다. 하지만 내가 열심히 일하는 동안 다른 사람은 손가락만 쪽쪽 빨지는 않는다. 결국 계층간 벽은 절대 넘을 수 없다. 많은 요소로 사람에게 점수를 매기고 점수에 따라 등급을 나눈다는 것은 인권침해에 가까운 일이지만 국민들은 아무도 불만을 가지지 않는다. 국가의 성장은 엄청나고 이제 다른 나라에서까지 강보약처법을 벤치마킹하러 오며, 무엇보다도 자신이 더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기 때문이다. 분명 부조리한 일이지만 실제로 벌어질 수 있는 가능성, 아니 이미 벌어졌다는 생각에 참으로 무섭다.


  투박하지만 상상력만큼은 최상급이다. <기원>이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를 잘 모르겠다. 책을 펴면 (한국에서 유독 힘있는)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나무>가 떠오를지도 모른다. <나무>에 비해 서술이 불친절하달뿐이지 서사나 상상력은 동급이라 하겠다. 허무맹랑한 거짓에 질리지 않을 자신이 있다면 <기원을> 과감히 펴도 좋다. 장 그노스는 질문한다. 그 작은 하나의 점으로부터 저 넓은 우주가 시작되었따니, 나보고 그 말을 믿으란 말인가? 오오냐, 이제부터 나도 안 믿으련다.



  주1.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할 때 암흑의 신 페트롤리우무스는 하느님과의 대결에서 패해 자신의 지위에서 내려와야 했다. 페트롤리우무스의 몸은 산산히 흩어졌고 검은 피가 대지에 스며들었다. 그 양이 너무 많아 천 년이 지나서야 하느님은 생명을 창조했다. 수많은 위험 속에서 인간이 진화하는 동안 지구 어느 구석의 늪에서 악마의 피가 새어나왔다! 악마의 피를 신비의 물이라 생각한 연금술사는 불타는 피를 끝없이 연구한다. 악마의 피는 인간에게 불을 주었고 기술을 주었으며 문명을 주었다. 동시에 악마의 피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의 얼굴에 칼을 겨눴다. 악마의 검은 기운이 세상을 서서히 뒤덮자 하느님의 선물인 지구와 그 위에 사는 모든 생명은 조금씩 사그러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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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송 열린책들 세계문학 194
프란츠 카프카 지음, 김재혁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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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8.


  오랜 기간 동안 붙잡았던 책이지만 예상했던대로,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고전 소설 독해에 어려움을 표했던 나이기에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쿤데라가 극찬했던 카프카의 아름다움은 온데간데 없었고 그저 텍스트를 읽기에 바빴다. 독서 수단을 가리지 않아야 진짜 독서인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고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전자책으로 본 건 이번이 처음이라 이번만은 그 매체애 대한 불만을 말해야 하겠다. 사람은 전자책을 읽을 때 50% 밖에 정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한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이번 독서를 통해 충분히 실례를 추가하였다. 사실 <거장과 마르가리따>도 그랬던 적이 있었으므로 앞의 가정은 진짜인가보다. 독서 매체가 종이책이든 전자책이든, 텍스트를 읽었으나 그 내용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한 건 능력부족인 게 분명하므로 더 이상의 변명은 필요없을 듯하다.


  책의 마지막 장을 보면서까지 느껴지는 답답함은, 요제프 K가 기소당한 이유를 끝끝내 알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잠에서 깨어나자 자신이 소송에 휘말렸음을 알고 무죄를 논한다. 법정에 서서 법정과 법관의 부조리함과 모순을 이야기하며 자신을 항변하고 시스템을 비판한다. 은행에서 성실히 일하는 모습에서도 그에게 큰 잘못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결국 중요한 건, 누가 그를 고발했고 그는 법정에서 소송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점이다. 소송에서 벗어난다는 말은 무엇인가. 자신이 무고하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죄가 없음을 증명하려면 증거가 필요하고, 무엇보다도 자신이 지은 죄를 명확히 알아야 한다. 그런데 독자는 커녕 요제프 K조차 그 죄를 모른다. 요제프 K는 시스템에 대해 비꼬고 비판하지만 그것은 '죄가 없음'과는 원론적으로 다른 문제이다.


  잠에서 깨어났는데 형사가 들이닥쳐 당신을 체포한다고 가정해보자. 다짜고짜 당신은 기소당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왜 기소당했는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그때부터 우리는 끝없이 상상하게 된다. 어릴 때 친구 지갑을 슬쩍했던 게 화근이 되었을까? 몇 년 전 심하게 놀린 친구가 복수하겠다고 이제 와서야 나를 신고한 걸까? 어제 저녁 식당에서 돈을 내기 싫어 국에 머리카락을 넣고서 주인에게 따져 밥을 거저 먹은 게 들킨 걸까? 머리속은 복잡해지고 혼란스럽다. 형사에게 자신이 신고당한 이유라도 물을라치면 '알아서 잘 생각해보셔'라고 매서운 눈으로 말한다. 도대체 뭐지, 뭐가 문제지. 끝없는 압박 끝에 양심에 가장 찔리는 '죄'를 고백한다. (금주라고 외치고 다녔는데 사실 어제 맥주 한 잔을 마셨어요. 용서해주세요!) 그러면 형사는 옳다구나를 외치며 유죄를 말한다. 그럼 그렇지, '그 일'은 역시 너무나 큰 죄였어. 그러니까, 이 상황은 자기 자신이 죄를 알아서 토해내는 구조이다. 애초에 죄가 있어야 소송이 존재할 수 있지만, 소설 <소송>에서는 '소송'이 죄를 만들어낸다. 자기고백적 성찰이 담긴 죄의 고해가 부르는, 자신을 성장시킬 수 있는 부류의 소송이 아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잘하라고 식의 스크루지의 꿈이 아니란 말이다. 능력을 인정받아 젊은 나이에 부장까지 승진한 K가 자신의 직장에서 자신의 일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소송에 집착하고 일상적 삶마저 철저히 파괴되는, 생에 있어서 죄악에 가까운 일이다. 원죄의식을 교묘하게 파고들어 타인을 피폐하게 만드는 교활함이란!


  벌레로 변했음에도 직장에 나가지 못함에 걱정하는 K,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소송에 맞써 싸우는 K, 고용되었지만 어디서 일해야 하는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 K까지, 카프카는 자신의 분신을 통해 무얼 그리 말하고 싶었을까. 사회의 부조리함? 시스템의 경직성? 산업화에 대한 경각심? 텍스트를 보는 눈이 낮아 쉽사리 정의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언뜻 느껴지는 불편한 감각을 감히 '카프카적'에 빗댈 수 있다면, 카프카를 다시 읽고 싶다. 많은 작품이 미완성작으로 남아 더욱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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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날들]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완벽한 날들
메리 올리버 지음, 민승남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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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


  우리에게 완벽이란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적어도 나에겐 아무 걱정 없이 평온한 상태이다. 작년 여름, 계곡으로 피서를 가서 극강의 평온을 누리고 왔다. 도시는 35도를 넘나드는 폭염 속에서 해맬 때, 휴대전화 전파도 잡히지 않는 산골짜기는 시원한 바람이 조용히 흘렀다. 그늘에만 들어가면 시원해지는 유럽의 어느 도시처럼, 마당 한가운데 큰 나무 아래 그늘진 평상에 누워 있으면 그때만큼은 나는 여름에 존재하지 않았다. 동생들은 계곡에 내려가 물장구를 칠 때 나는 평상에 드러누워 초록 햇빛을 받으며 글을 읽어나갔다. 낮이 시원한만큼 밤은 추울 만한데, 그렇지 않았다. 다만 불빛을 향해 날아드는 날벌레만 조심하면 됐다. 모기장 안에서, 이젠 전화기보다는 랜턴으로 쓰이는 휴대전화로 불빛을 비춰가며 한 글자 한 글자씩 더듬었다. 수많은 나뭇잎 사이로 비춰오는 햇빛은 카메라 렌즈를 통해 육각으로 변하는 마법을 부렸다. 오직 '밝다'라고 인식하는 빛은 자연과 인공의 필터를 통해, 내 능력으로는 표현하기 부족한 스펙트럼을 뿜어댔다. 늘어지게 자고, 늘어지게 책 보고, 다시 늘어지게 자고. 3일의 여유 동안 7권의 책이 쌓였다. 26년 중 가장 완벽한 날들이었다.


  문득 얼마 전에 읽은 <철학자와 늑대>가 떠오른다. 인간은 죽음을 향해 끝없이 달려가는, 직선에 사는 존재이다. 반면 늑대를 비롯한 동물에게 시간은 순간의 점에 불과하다. 우리는 시간의 끝에 죽음이라는, 모든 것을 파멸시키는 것이 있음을 안다. 그러기에 인생의 끝의 끝까지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려고 무던히 애를 쓴다. 끝없이 목표를 만들고, 목표를 달성하면 다른 목표를 만든다. 죽을 때까지 목표만을 가지고 사는 우리기에, 사실 진정한 완벽이란 있을 수 없다. 죽기 전에 목표를 이뤘다고 하면 이런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죽기 전의 사람은 가장 약하다던데, 바라던 목표가 지금 이루어졌다는 말은 그 목표가 평생 걱정했던 것보다 그리 어렵지 않았다는 것 아닌가! 목표 달성이 인생의 평생 과업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걸 이루고보니 인생이 비참해지더라! 이러나 저러나 우리는 완벽한 존재가 될 수 없다. 반대로 가정해보면 이 아이러니가 조금은 풀릴지도 모르겠다. 가장 원대한 목표였던 '목표 달성'이 사실 가장 최악의 상태라면, 바닥에 내팽겨쳐지고 짓뭉개지고 패배감을 잔뜩 느끼는 때가 사실 가장 최상의 상태, 즉 완벽한 때는 아닐까? 자신이 아직도 많이 모자라다는 것을 깨닫고 성장할 수 있는 '무언가'를 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결코 완벽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뻔히 안다. 하지만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항상 성공해야만 하고 행복해야만 한 것은 아니다. 살다보면, 행복에 겨워 함박웃음을 지을 때가 아닌 행복도 불행도 아닌 어중간한 곳에 둥둥 떠다니는 때가 있다. 이런 감정을 처음 느낄 땐 사실 불안할지도 모른다. 느껴지는 온갖 감정이 합쳐져 결국 무채색처럼 다가오기 때문이다. 밝은 빛을 추구하는 우리의 본성은 이 상황을 어떻게든 무마하려 한다. 허나 이미 언급했듯이 직선을 사는 인간에게 행복은 허상의 개념이다. (개념 자체가 이미 허상이긴 하지만!) 주변의 모든 것에서 존재 자체를 받아들이는 그 순간은 인간과 자연의 경계를 허물고 존재의 차이마저 없앤다. 그로 인해 자신이 전체에 포함되어 있음을 깨닫고, 오히려 전체에 속박된 것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기쁘게 느껴진다. 한낮의 여름, 그늘 아래에서 사람과 바람과 활자는 하나가 된다. 자연을 받아들이고 그 차이를 인정함으로써 우리는 자연에 비해 아직 덜 성장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다. 자연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을 보며 존재에 대해 의심을 품을 때 우리는 거대한 존재 앞에서 무력함을 느끼는 최악의 상태에 맞닥뜨리고, 이는 곧 우리가 완벽한 상태로 한발 나아감을 체험하는 때이다.


  내가 내뱉는 숨은 대기의 일부분이 되고, 대기는 온갖 생명을 잉태시키며 그 생명은 또 다른 생명을 위해 자신을 비운다. 비록 인간이 자연에 종속된 존재라 할지라도 자연을 느끼며 완벽에 가까워지는 순간만큼은 인간은 자연과 하나가 된다. 하나는 전체, 전체는 하나라는 명제는 우리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를 넓혀준다. 다른 존재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자신의 그릇마저 비울 때, 우리는 진정 경이로운 존재가 된다.



* 책의 글 중 감명 깊게 읽은 '흐름'과 '완벽한 나날'을 떠올리며 짧게 써보았다. 감상이라기보다는 일기가 되었지만, 어쨌든. 흠.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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