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61 | 6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기발한 발상, 하늘을 움직이다 요시키 형사 시리즈
시마다 소지 지음, 한희선 엮음 / 시공사 / 2011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049.


* 추리소설 특성 상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으니 주의바랍니다. 머리에 필터 따위 없습니다.


  사놓은 지 6개월만에, 드디어 읽었다. 책장 깊숙히 어딘가 박혀 있다가 가벼운 독서가 필요한 찰나 우연히 보여 꺼내들었다. 500쪽의 책을 사흘 걸려 읽었으니 꽤나 빠르다. 오전 9시 30분에 일어나 운동을 가려고 다짐했건만 결국 세벽 다섯 시까지 책을 못 덮어서 이번주에는 운동을 못 갔다. 한번 펴면 웬만해선 덮을 수 없는 흡입력을 가진 책이다.


  책은 '춤추는 피에로의 수수께끼'라고 제목 붙혀진 짧은 이야기로 시작한다. 눈이 내리는 겨울, 북으로 향하는 기차를 비춘다. 객차에서 피에로가 흥얼거리며 돌아다닌다. 몇 분 뒤, 총소리가 들리더니 화장실에서 자살한 피에로의 사체가 발견된다. 그런데, 차장이 문을 닫은 지 단 몇십 초 동안 시체가 사라졌다.


  뒤이어 본 이야기로 들어와, 한 부랑자 노인이 등장한다. 지하철에서 하모니카로 구걸하던 노인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더니 한 가게에서 땅콩과 말린 찰떡을 산다. 400엔을 냈지만 이번 달부터 12엔의 소비세가 더 붙는다는 여주인과 실랑이를 하다가 여자를 쓰러뜨린다. 그런데 여자의 왼쪽 가슴에 칼이 박힌 것 아닌가. 노인은 12엔의 소비세 때문에 여자를 살해한 것이다.


  사건을 맡은 형사 요시키는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다. 소비세 때문에 다투다가 싸움으로 발전해 여자를 죽인 것도 아니고 준비한 듯이 칼로 찔렀다. 그런 칼은 부랑자가 들고 다니기에 어색한 물건이다. 다른 형사들은 노인이 치매에 걸렸다고 하지만 요시키가 보기에는 노인은 분명 정신이 말똥한 사람이다. 요시키는 노인의 과거를 조사할수록 그가 이런 범행을 저지를 사람으로 보이지 않고 소설을 쓸만큼 지적능력을 지녔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면 노인은 여자를 왜 살해했는가?


  딱 봐도 범인은 나와 있다. 50쪽도 되지 않아 노인이 살해범이란 사실이 밝혀진다. 결국 <기발한 발상>은 '왜?'가 중요한 소설이다. 요시키는 노인의 과거를 파헤칠수록 점점 거대한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이는 일본 사회 전체에 미치고 있는 과거의 악령과도 같은 것이다. 이 진실로 <기발한 발상>은 사회파 미스터리의 범주에 포함된다.


  노인의 과거를 훑다보니 전혀 연관되지 않은 사건이 따라온다. 노인이 감옥생활을 하던 때 쓰던 소설이 사실 실제 있었던 일이었다. 곧바로 이해되지 않는 사건들은 교묘한 트릭을 가지는데 이때문에 본격 미스터리의 향기를 띄기도 한다. 이 책은 사회파와 본격의 교집합에 서 있다. '어떻게'(본격)와 '왜'(사회파)가 아주 적절히 섞여 읽는 데 재미가 있을 뿐더러 결말에 이르러서는 가슴 속에 무거운 응어리가 느껴지는, 상반된 매력을 가진 책이다. 다만 1989년에 쓰인 책이어서인지 트릭이 다소 무딘 것이 흠이다.


  사건의 구성과 설계 외에 작가의 필치도 뛰어난 편이다. 풍경묘사도 좋지만 노인이 쓴 네 편의 단편소설은 냉혹한 내용에 비해 소름끼칠 정도로 무덤덤하게 쓰여져서 이야기 속의 이야기를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기발한 발상, 하늘을 움직이다>은 마쓰모토 세이초 이후 사회파 미스터리의 포문을 새로 연 시마다 소지의 대표작이라는 큰 의미가 있는 책이었다. 물론 읽는 재미도 보장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대통령의 글쓰기
강원국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4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048.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독서에 관한 책(메타북)을 좋아한다. 조야하게나마 짧은 글이라도 끼적이는 나도 앞과 마찬가지로 글쓰기에 대한 책은 열광적으로 좋아한다. 작법서는 진정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 알면서도 그 중독을 끊을 수 없다. 제목부터 멋있지 않은가. 대통령의 글쓰기, 라니 말이다. 책은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 아래에서 연설문 작성을 했던 강원국씨가, 자신이 모셨던 대통령에게서 배운 글쓰기 기술과 노하우를 담았다.

  이 책의 줄기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글쓰기 작법이고 다른 하나는 기억이다. 작법서로서는 높은 평을 주기 어렵다. 1/3 정도 읽었을 때 나는 뒷내용을 알 것 같다는 왠지 모를 기시감에 빠졌다. 이건 책의 목차를 볼 때부터 느껴진다. 생각의 숙성 시간을 가져라, 독자와 교감하라, 글쓰기의 원천은 독서, 결국엔 시간과 노력, 메모하라, 자료과 관건이다, 첫머리 시작 방법 16가지, 글은 메시지다, 쉽고 명료하게 써라, 형식도 무시할 수 없다, 자기만의 글을 쓰자. 글쓰기 책을 한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사실 뻔한 얘기다. 다른 작법서에서 다룬 이야기의 되풀이일 뿐이기 때문이다. 문학적 글쓰기가 아닌 연설문 작성에 관한 작문법을 다루지만 크게 다를 것은 없다고 본다.

  평범한 내용에 무게를 싣는 건 대통령이라는 실존 인물에 대한 저자의 기억과 우리의 추억이다. 작법서에서 예문은 필수인데 <대통령의 글쓰기>는 무려 전직 대통령의 연설문과 그것을 작성하는 과정을 예시로 든다. (다른 사람도 아닌 똑똑하기로 그렇게 유명한 두 사람의 연설문을 말이다!) 하나의 연설문을 쓰기 위해 부하직원뿐 아니라 대통령까지 여러차례 나선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게다가 기념일에 방송에서 보이는 연설만이 다가 아니라 1년에 수많은 연설을 한다는 것도 몰랐다. 연설문은 전문가에게 맡기고 대통령은 읽기 연습 후 그대로 읊는줄로만 알았건만, 우리나라 최고의 자리에 계신 분들을 너무도 오해하고 있었다.

  풍부한 예시를 읽다보면 돌아가신 두 분의 육성이 자연스레 떠오를 것이다. 책이 특별한 영역으로 넘어가는 부분이다. 작법서의 형태로 두 명의 인생기록을 남긴 것과 마찬가지다. 분명 몇은 추억팔이라고 수준 낮게 손가락할 것이다. 아쉽게도 '글쓰기' 자체에 관한 내용은 다소 평이했기 때문이다. 다만, 연설문은 보통 두괄식으로 쓰는 것처럼 책은 제목의 앞 단어인 '대통령'을 상기시킨다. 연설문 작성 방법에 주안점을 두지 말고 예시문들을 보길 강력히 권한다. 그분의 유창한(?) 외국어 연설도 떠오르는 지금, 이래저래 씁쓸하다.

  마지막으로 김대중 대통령이 명 연설문 한번 보시고 가겠다. 감히 이 연설은 교과서에 실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러분께 간곡히 피맺힌 마음으로 말씀드립니다. '행동하는 양심'이 됩시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입니다. 독재정권이 과거에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습니까? 그분들의 죽음에 보답하기 위해, 우리 국민이 피땀으로 이룬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을 다 해야 합니다. 자유로운 나라가 되려면 양심을 지키십시오. 진정 평화롭고 정의롭게 사는 나라가 되려면 행동하는 양심이 되어야 합니다. 방관하는 것도 악의 편입니다. 독재자에게 고개 숙이고, 아부하고, 벼슬하고, 이런 것은 말할 필요요도 없습니다.
  우리나라가 자유로운 민주주의, 정의로운 경제, 남북 간 화해 협력을 이룩하는 모든 조건은 우리의 마음에 있는 양심의 소리에 순종해서 표현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선거 때는 나쁜 정당 말고 좋은 정당에 투표해야 하고, 여론조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4,700만 국민이 모두 양심을 갖고 서로 충고하고 비판하고 격려한다면 이 땅에 독재가 다시 일어나고, 소수 사람들만 영화를 누리고, 다수 사람들이 힘든 이런 사회가 되겠습니까?
<2009년 6 15 남북정상회담 9주년 기념사> _책 170, 171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느리게 배우는 사람 창비세계문학 30
토머스 핀천 지음, 박인찬 옮김 / 창비 / 201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047.

  창비 출판사는 페이스북에서 자사 세계문학을 함께 읽는 '책읽는당'을 만들며 책을 제공해주었다. 두 선택지 중 <제49호 품목의 경매>라는 걸출한 작품으로 널리 알려진 토머스 핀천의 작품집, <느리게 배우는 사람>을 골랐다. '경매'는 사놓고 몇 개월 간 읽지도 않아서 핀천의 매력은 귀로만 들은 상태였다. 창비에게는 미안하지만 이번 선택은 실패였다.

  <느리게 배우는 사람>(이하 '사람') 토머스 핀천의 단편집이다. 총 5편의 단편이 실렸는데 앞의 네 편은 데뷔 전에 쓴 것이고 가장 마지막의 '은밀한 통합'은 첫 장편인 <브이> 출간 후 쓰였다. 데뷔 전의 작품이라면 무엇을 뜻하는가. 습작이란 의미다. 미국 현대문학의 대표작가라 불리는 핀천이지만 초창기의 단편은 내게 큰 울림을 주지 않았다.

  문학 서적에서 이리도 서문이 긴 건 보지 못했다. 작품해설 포함하여 300쪽이 되지 않는 책에서 서문이 무려 31쪽까지 이어진다. 작가 본인조차 이 작품들을 읽고 '오, 맙소사'라고 외치고 돌이키고 싶지 않은 신체증상이 동반되었다고 썼다. 책은 1984년에 출간되었는데 안의 작품은 1958년부터 1964년까지 쓰였다. 쉰 살 가까이 돼서 20년 전에 쓴 작품을 읽는다면... 상상도 하기 싫다. 불과 1년 전에 쓴 글이라도 그렇게 모자른데(물론 지금도 충분히 그렇다) 20년 전이라니. 지금 쓴글을 환갑잔치 때 손자가 낭독한다면 나는 그놈의 엉덩이를 뻥 차버릴지도 모른다.

  그건 아무리 비상한 작가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람>을 읽으면 핀천 작품세계의 씨앗이 보인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책은 언제, 왜 보아야 하는 것일까. 핀천 문학의 '꽃과 열매'인 장편을 본 다음에야 <사람>을 봐야 그나마 재미있을 듯하다. 사실 아름다운 꽃과 맛있는 과일을 경험한 후에야 씨앗에 관심이 생기지 당장 씨앗을 본다면 이건 뭐, 먹을 수도 없고 키우자니 귀찮고 그냥 버릴지도 모른다. 내게 <느리게 배우는 사람>은 그런 책이었다. 참 미안하고 슬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만과 편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8
제인 오스틴 지음 / 민음사 / 200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046.


  대학교 1학년 때였던가. 글쓰기 교양 수업에서 영화 오만과 편견을 보는 과제가 있던 걸로 기억한다. 영국을 배경으로 해서인지 바람이 많아 특유의 착 가라앉은 분위기와 '다아시'라는 조금 이상한 이름, 엘리자베스 역의 키이라 나이틀리의 미모만 떠오른다. 영화를 본 직후 책을 빌렸는데 재밌게 읽었음에도 리디아와 위컴의 야반도주밖에 머리에 남지 않았다.


  저번달에 고전 읽기 방법을 바꾼 후로 첫 책이다. 위키 문서 기준으로 <1984>와 함께 가장 많이 번역되었다.(주요 10개 출판사 중 9개) 우연히도 고전 함께 읽기 모임에서 이 책을 골랐다. 크레마샤인이 맛이 가는 바람에 아이패드로만 봐야 하나 걱정하다가 그냥 종이책을 샀다. 많은 사람들이 고르는 민음사판 말고 가장 아끼는 열린책들판.


  <오만과 편견>이 시대에 남긴 가장 큰 족적을 보면 19세기 사실주의 문학의 시작을 알렸다는 점이란다. 하지만 그런 걸 알 게 뭐냐, 나는 19세기는 커녕 지금의 사실주의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데. 거창한 문학사적 의미를 떠나 수많은 플롯이 존재하는 지금에도 매우 재밌는 로맨스 소설이다. 영화, 드라마, 연극, 그리고 원작을 바탕으로 각색된 작품까지, 원 소스 멀티 유즈의 대표격이라고 할 수 있는 점에서 원작이 가진 힘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다.


  소설은 현실의 거울이라고 하듯 <오만과 편견>도 당시의 시대상을 잘 표현한다. '재산이 많은 미혼 남성이라면 반드시 아내를 필요로 한다는 말은 널리 인정되는 진리이다'라는 첫문장은 결혼을 통하여 신분 계층의 이동을 간절히 원하던 당시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딸들의 결혼에 목매면서 시종일관 교양 없음을 보여주는 베넷부인부터 놀기를 좋아해 파티 다니기를 밥먹듯이 하는 리디아와 키티, 애정보다 미래를 택한 샬럿까지 많은 인물을 통해 소설이 표현한 시대의 여성의 면을 은근히 비춘다. 그외에 콜린스나 빙리 양, 캐서린 부인 등 다른 인물도 행동과 말투로 시대의 표면을 자연스럽게 풍자해내는 점도 눈에 띈다.


  그런데 6년만에 다시 읽은 책에서 의문스러운 점을 발견했다. 다시와 위컴에 대해 오해하는 바를 풀어쓴 장문의 편지를 읽은 엘리자베스는 이후 자신이 가졌던 편견을 부끄러워하고 다아시의 청혼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자, 여기서 심히 의심되는 게 엘리자베스가 다아시에게 마음을 조금씩 여는 이유가 사람을 잘못 판단했고 그때부터 진짜 다아시의 품성이 보여서일까, 자신의 오판을 보정하기 위한 심리적 기제일까, 다아시의 주변 환경이 눈에 들어오면서일까. 급변하는 엘리자베스의 시선이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나도 나이가 먹으니 캐릭터가 다르게 보이나보다. 아아, 엘리자베스도 커서 보니 은근히 속물기질이 있었다. 실망이야. (심리적 기제 때문에 감정이 증폭된 것으로 본다)


  책은 네 커플이 결혼해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는다. 허나 콜린스-샬롯 부부는 애정보다 미래를 택한 결혼이고 위컴-리디아 부부는 본문에서 언급했듯이 남편의 애정이 진작에 사라진 결혼이다. 신분상승을 원하는 이들, 그저 가정이라는 존재를 원했던 이들은 돌고 돌아 다시 베넷 부부와 같은 가족을 만들 것이다. 베넷 씨는 부인을 그리 사랑하지 않고 속으로 비난할 정도고 다섯의 딸 중에 제인과 엘리자베스를 가장 아낀다.(사실 둘만 아끼는 것 같다. 은근히 무서운 아저씨다) 아무리 사실주의 문학고 소설의 묘사가 그 시절을 그린다지만 과연 애정 없는 결혼은 어떤 결과를 낳을까라는 걱정이 된다.


  200년 전 소설이 지금까지 재밌게 읽힌다는 건 소설에서 그린 인물과 사건이 그때뿐 아니라 지금에도 충분히 공감가고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주변에 보이지 않은가. 사랑보다 돈을, 지위를, 가문을 선택한, 사랑을 빙자한 '미래에 대한 투자'를. 하지만 혼탁한 세상에서 진짜를 바라볼 수 있게 만드는 건 오만과 편견을 내려놓은 적당한 자존심이라 생각한다. 아, 물론 예나 지금이나 사랑의 완성은 '얼굴'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속물 교양의 탄생 - 명작이라는 식민의 유령
박숙자 지음 / 푸른역사 / 2012년 12월
평점 :
품절


045.

대학교 3학년 시절, 막 전역해 까까머리였던 나는 문득 고전읽기에 대한 욕심이 생겼다. 어떤 순으로 책을 읽어야 할까. 재밌는 거? 사람들이 많이 읽은 거? 나는 무식하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을 처음부터 읽기로 했다. 1권, 변신이야기부터 말이다. 두 권의 책을 빌린 후 결국 한 쪽도 읽지 못하고 반납했다. 이유는 귀찮음. 아마 그때부터 읽었다면 지금쯤 200권 가량은 읽었을텐데 많이 아쉽다.

그리고 최근 고전 읽기 방법을 바꿨다. 그냥 재밌는 것, 대중적인 것부터 읽기로 했다. 많이 번역된 순으로 읽는 거다. 많이 번역됐다는 건 그만큼 인지도가 있고 많은 이들이 읽었다는 뜻이고, 독서를 함에 있어 적어도 남들만큼은 읽었다는 뜻도 된다. 남들이 읽은 것을 나는 읽지 못했다는 건 내 자부심에 상처를 주기도 한다.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한 독서는 결국 교양의 증거가 되고 만다.

명작이라는 조건은 무엇일까. 저자는 명작의 기호가 fine인지 famous인지 묻는다. 일찍 서양문물을 받아들인 일본과 달리 우리나라는 식민지시대에 들어서야 외서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고 한다. 독서가라면 좋은 책을 읽고 싶어하기에 다들 서양 명작을 찾아 읽었다. 그들은 책을 어디서 접했을까. 원서보다는 일본에서 번역한 책이 많이 유통되었다고 한다. 대중은 그당시의 세계문학전집을 보통 '신조사판 세계문학전집'으로 기억한다. 재밌는 건 전집 목록이 선정된 이유다. 식민지 시대의 명작은 고전의 의미로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 유명한 작품을 넓게 아우르는 이름이었다.

명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문학작품이 퍼지면서, 명작은 책의 내용과 무관하게 독자의 지적 수준을 반영하는 교양의 기호로 전락하고 만다. 이는 곧 과시욕과 연결된다. 현재 미국이나 일본에 비해 우리나라 책은 문고본이나 페이퍼백 책이 매우 적다. 이는 실용보다 보관과 눈요기용 독서에 치중한다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옛날도 마찬가지였다. 울긋불긋한 종이에 인쇄된 춘향전, 토끼전보다는 황금색 술로 장식된 두꺼운 양장본인 문학전집을 선호했다. 디킨스 전집이 무려 28만원에 팔리는 황당한 사건(1920년대에 28만원이라니!)은, 책이란 저자의 목적을 독자에게 널리 알리는 데 존재하는 것이어서 가격이 싸야 정상이라는 상식에 반하는 일이었다. 이제 책 내용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감싸는 외형 또한 중요하게 됐다. 물론 식민지시대나 지금이나 책꽂이에 꽉꽉 들어선 두꺼운 세계문학전집은 자신을 과시하는 도구가 된다.

이것이 바로 속물교양의 민낯이다. 아무리 책을 많이 사고 많이 읽은들 뭐하겠는가. 읽는 행위 자체는 무한정 올바른 일이지만 그것으로 젠 체하고 타인을 무시하며 혼자만의 아집에 쌓인다면 그런 교양은 무용하다. 교양은 과시하거나 소장하는 것이 아니라 키워내고 품어내는 것이다. 이제 마음을 비울 때이다.

아, 물론 나는 아직 속물교양이 가득한 바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61 | 6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