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 - 가성비의 시대가 불러온 콘텐츠 트렌드의 거대한 변화
이나다 도요시 지음, 황미숙 옮김 / 현대지성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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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책에 의하면 20~69세 남녀 중 빨리 감기로 영상을 시청한 사람은 34.4퍼센트로 조사됐다. 20대는 49.1%, 30대는 34.1%의 비율이다란다. 표본수가 적지만 대학교 2~4학년생은 87.6%가 빨리 감기를 한다고 한다. 젊은 세대일수록 빨리 감기나 건너뛰기로 영상을 시청하는 셈이다. 물론 나도 그중 하나다.

2. 유튜브 영상을 1.5배속으로 본 게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다. 1.25배도 아니고 1.5배. 영상을 빨리, 또 많이 보려고 그런 건데, 종종 음성이 잘 들리지 않아 앞으로 돌아가 다시 듣기도 한다. 때로는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자막을 켠다.

3. 1.5배속 재생을 한번 경험하니 다른 영상도 자연스레 배속으로 보게 된다. 처음에는 간단한 정보성 영상에서 시작된 1.5배속이, 애니메이션, 드라마, 영화 – 심지어 인물간의 감정을 다룬 영화까지 퍼졌다. 이제 정속의 영상은 너무 느리게 느껴진다. 사람이 원래 이렇게 말을 천천히 했나 싶을 정도다.

4. 우리가 1.5배속뿐만 아니라 2배속으로 영상을 보고, 때로는 10초, 15초 건너뛰는 가장 큰 이유는, 세상에는 볼 게 너무 많기 때문이다. 기존에도 TV 쇼, 드라마, 영화 같은 컨텐츠는 많았다. 마블 영화나 영드 닥터후 시리즈, 애니메이션 심슨 시리즈도 맘먹고 보려면 몇 주를 지새워야 할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지나 유튜브나 틱톡에서 유저들이 업로드하는 영상까지 더해지니, 넷상에는 영상과 컨텐츠는 무한대에 가까울 정도로 넘친다. 유튜브에는 1분마다 400시간의 영상이 업로드된다고 한다. 2019년 기사 내용이니, 지금은 400시간보다 훨씬 많지 않을까 싶다.

5. 하나 더. 기존에는 서사와 드라마를 즐기기 위한 영상이 많았다. 천천히 이야기를 즐기며 소화하면 됐다. 인터넷의 발달과 UCC의 출현, 거기에 유튜브라는 거대 공룡이 출현한 후 영상은 유행을 주도, 사회현상을 만들기도 한다. 간혹 사람들과 이야기하다보면 잘 모르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농담, 소재가 있다. 찾아보면 유튜브에서 유행한 밈과 유행어, 인물들이다. 덕분에 한참 펭수, 빵송국, 숏박스, 스낵타운의 영상을 쭉 본적이 있다. 물론 이것들을 모른다고 사회에서 도태되지 않는다. 주변에 발맞추기 위해 우리는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온갖 컨텐츠를 소비한다. 빨리빨리, 빨리 감기로 말이다.

> 고전적 명작 《로마의 휴일》(1953)에도 ‘샤레이드’가 사용되었다. 오드리 헵번이 연기한 앤 공주가 각국 중요 인사들과 차례로 악수하며 인사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녀는 시종일관 지루해 보인다. 다만 “아, 지루해”라는 대사는 없다. 대신 카메라가 그녀의 드레스 속 발끝을 비춘다. 그녀는 지루한 나머지 발을 꼼지락거리며 한쪽 구두를 벗어둔다. 발끝이 신발을 잃어버리고 급기야는 자리에 앉을 때 구두를 놓쳐버린다. 이 장면은 앤 공주가 지루해하고 있음을 대사 한 줄 없이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이것이 시나리오 기술이다.

6. 영상을 빨리 보면서 우리는 그 안에 담긴 분위기와 내러티브보다 ‘내용과 소재’ 그 자체에만 집중하게 된다. 수많은 컨텐츠 속에서 우리가 중요시 여기는 것은 컨텐츠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이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맥락을 이해하는 능력이 조금 낮아지지 않았을까. 그러면서 컨텐츠는 그것이 가진 모든 것을 설명하려 한다. 위 인용과 다르게 인물의 기분을 보여주지 않고 지루하다고 직접 대사를 내뱉는 것이다.

7. 길이가 1분 미만의 숏폼 동영상도 비슷한 결로 바라볼 수 있겠다. 세부 줄거리 흐름이 중요하지 않은 숏폼 컨텐츠를 지속적으로 보다보면 논리 구조를 파악하는 능력이 떨어진다. 긴 호흡의 영상은 점차 소화하기 힘들어지고, 텍스트는 당연지사, 자극이 적으니 읽기 지루하다. 컨텐츠의 주인이 아닌 노예가 되는 셈이다. 이건 100% 내 경험이다. 유튜브 쇼츠를 중독된 듯 볼 시기에, 책은 고사하고 한 시간짜리 드라마 한 편도 보기 조금 힘들어했다.

> “디테일한 부분이야 상관없어. 스토리만 알면 돼.”
> “건너뛸 수 있는 작품을 만든 게 잘못이지”
> “어떤 식으로 보든 그건 내 마음이야.”

8. 저자는 빨리 감기를 시대적 필연이라고 말한다. 가급적 적은 자원으로 이윤을 최대화하려는 자본주의 경제에서 거의 절대적 정의가 될 수 있는 조건을 모두 갖추었다고도 한다. 충분히 이해는 하나, 이런 의문이 남는다.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본다니 대체 어찌 된 일일까?

9. 책을 덮고 유튜브 영상을 정속으로 봤다. 못참고 다시 1.5배속으로 설정한다. 빨리 보기에 중독되면 벗어날 수 없다. 그래도, 배속과 건너 뛰기, 숏폼 컨텐츠의 부작용을 몸소 겪었으니 답답함을 꾹 참고 1.25배속으로 타협을 해본다. 넘치는 인터넷 밈을 다 알 필요 없다. 유행에 민감하지 않아도 된다. 조급함을 내려놓고 나만의 감정선을 찾으려고 노력해본다. 아, 영화는 배속으로 보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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