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하지 않고서야
김현경 외 지음 / 흔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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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5)

> 취하지 않고서야 할 수 없는 말들이 많아요. 그래서 나는 오늘도 또 취하고, 한참을 취하고 나서야 늦게, 보고 싶다는 말을 짧게 남겨요. 올여름 비가 내리는 날에 함께 술 한잔 기울이면 좋겠어요.

요새 계속 가벼운 글을 선호하게 된다. 아무래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안에서 그려진, 무거운 역사에 한없이 끌려다니는 작은 존재인 우리를 비춰보아서일지도 모르겠다.

술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아 자주 마시지는 않는다. 사실 타인과 부대끼는 것도 별로다. 아이러니하게 술자리는 좋아하는 편이다. 어차피 거기서는 다들 모두 오락가락한 정신으로 하하호호 아무 걱정 없이 웃고 떠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따로 술자리를 가지거나 술김에라도 본심을 털어놓을만한 친구가 없는 건 조금 슬프다.

술은 근육을 말그대로 녹인다고 하니 운동과 다이어트를 하는 내게는 독약이나 마찬가지다. 술을 많이 마시면 건강이 나빠지는 건 자명한 일, 술을 그렇게 좋아라 하는 저자들이 걱정된다. 허나 술자리가 그리워지면 언제든 지인들을 부른다니 부럽기도 하다. 술은 낭만적이니까! 맨정신의 세상과 술에 얻어맞아 맛탱이가 간 세상은 색과 온도와 향이 다르니까.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탐구(?)하는 이들이 부러울 뿐이다.

독립출판물에서 메이저 출판으로 넘어온 책이다. 그러다보니 독립출판의 짙고 고독한(?) 감성이 꾹 담겨있다. 크게 부담이 되지 않는 선에서 감정을 잘 끊어서 나쁘지는 않다. 간혹 와닿는 문장들은 아래에 옮겨봤다.

술과 사람을 좋아하고 술자리에서 향긋한 분위기를 맡을 수 있는 분들에게 추천한다. 김혼비의 신작 <아무튼, 술>도 읽어보고 싶다.


> 나는 사실 술은 별로 안 사랑하고 너네만 사랑해. 물론 술도 좋지. 맛 좋고 쓰고 시원한데 실은 술이 좋아서 술을 마신다기보다 술을 마신 우리가 좋은 거다. 밥을 먹거나 차를 마실 땐 느낄 수 없는 더운 숨을 가진 서로의 촘촘한 간격, 따뜻한 눈빛, 내가 좋아하는 헐렁한 네 표정, 아무것도 못 숨기는 나, 한껏 진지하고 가볍고 쉽게 울고 웃는 그 모든 순간이.

> 공덕동 막걸리는 학교에서 마시던 생명공학 어쩌고 하는 막걸리보다 분명 맛있었을 테지만, 어쩐지 그날만큼은 맛이 없었다. 공덕동 막걸리가 슬펐다. 공덕이라는 지명마저 미웠다. 예전처럼 선배들이 “이번에 나온 그 영화 봤어? 진짜 명작이야. 그 장면도 봤지? 사실 그 감독이 어떤 영화 팬이라 오마주한 장면인데.” 하며 설명해주길 바랐다. “요즘 무슨 책이 인기가 많아?”라고 물어주길 기대했다. 잊혀간, 하지만 또렷이 기억하는 대학생 때 그렸던 꿈 따위의 단어들은 ‘현실’적인 이유로 그 누구의 입에도 담기지 못한 채 뭉뚱그려졌다. 이제는 해서는 안 될 이야기였다. 그날의 공덕동 막걸리는 너무 맛이 없어서 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모두 게워냈다.

> 술을 좋아한다는 건 사람을 좋아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는 술도 좋고 사람도 좋아서 그 사람과 마시는 술이 맛있으면 좋겠고 곁들인 안주도 맛있으면 좋겠다. 서로가 만족스럽게 취해 우리가 나누는 이야기의 틈이 좁혀지면 더더욱 좋겠다. 내가 당신들과 함께 마시고 취하기 위해 이렇게나 노력한다는 걸 알아주면 좋겠다. 이건 내가 진짜 당신들을 좋아해서 그러는 거다.

> 눈이 예쁜 걸 아는데 그 예쁜 걸 바라보려면 술을 마셔야 했다. 오늘도 곁눈질하듯 힐끔힐끔 바라본 눈은 참 예뻤다. 술기운에 살짝 촉촉해진 것 같아서 더 예뻤다. 뽀얀 조명이 눈동자에 부딪혀 ‘반짝’ 하고 쏟아졌다.

> 장미 흐드러진 초여름엔 조금 염치없이 사람을 좋아해도 된다.

> 취하지 않고서야 할 수 없는 말들이 많아요. 그래서 나는 오늘도 또 취하고, 한참을 취하고 나서야 늦게, 보고 싶다는 말을 짧게 남겨요. 올여름 비가 내리는 날에 함께 술 한잔 기울이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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