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 불확실한 삶을 돌파하는 50가지 생각 도구
야마구치 슈 지음, 김윤경 옮김 / 다산초당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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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3)

출간 소식을 듣자마자 엄청 기대했던 책이다. 허세와 잘난 척의 상징으로 짬짬이 철학서적을 읽고 개념을 언급했던 나다. 철학의 어떤 개념을 삶의 무기로 활용할까? 학문으로서의 철학을 일상으로 이끌어내는 방식은 무엇일까? 부제인 ‘불확실한 삶을 돌파하는 50가지 생각 도구‘처럼 과연 어떤 이야기와 소재가 튀어나올까? 나도 이 책을 토대로 삶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까?

철학의 기초에 대한 책은 대부분 철학사를 다룬다. 맨 처음에 등장하는 고대 그리스 철학은 저자의 말대로 다소 지루하고 현대와 맞지도 않는다. 이 부분을 읽다보면 금세 지루해지도 흥미를 잃고는 두꺼운 철학사 책을 덮어버리고 만다. 수학의 정석 집합 부분처럼 말이다.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이하 ‘삶의 무기‘>는 과감히 철학사를 지워버렸다. 개념과 사상만을 가져와서 간단히 소개하고 이를 비즈니스와 경영, 삶의 태도에 접목시킨다. 지리멸렬한 철학사에 지친 이에게, 여러 개념을 쏙쏙 뽑아서 소개하는 류의 책은 철학에 대한 마음의 장벽을 허물기에 좋다.

하지만, 철학을 공부하면서 철학사를 훑는 것만큼 중요한 건 없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철학의 역사는 ‘제안 - 비판 - 재제안‘이라는 흐름이 연속으로 이루어졌다(11쪽)고 말한다. 철학사를 배제한다는 저자의 말이 여기서 모순을 일으킨다. 철학사를 모르면 이 흐름을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철학사를 공부해야 한다. 철학의 개념을 쉽게 풀어쓰고 현실에 적용한 점은 좋지만, 이 책은 개념 변화의 흐름이 보이지 않아 철학사조의 전체 맥락을 파악할 수 없다. 맥락 없이 동떨어진 철학 개념은 그저 지식을 위한 단순한 단어로 치환될 뿐이다.

예를 들어, 저자는 그리스 철학을 험하기만 하고 경치는 별 볼 일 없는 산으로 묘사한다(28쪽). 철학사를 공부하면서 제일 처음 맞닥뜨리는 그리스 철학의 어려움과 복잡함을 생각하면 100% 수긍하지만, 이데아를 언급하는 39장의 부제 ‘이상은 이상일 뿐, 환상에 사로잡히지 말지어다‘를 읽는 순간 반감이 들 수밖에 없다. 철학적 사고와 철학사의 논조를 완전히 폐기해 이데아를 그저 구식 이론으로만 치부하는 것이다. 철저히 이론을 현실에 접목시키려는 저자의 목적에는 100% 부합하지만, ‘철학서적‘이라고 부르기에는 저자의 자의적 해석이 너무 크다고 할 수 있다(물론 저자는 이 책을 철학서적이라고 하지 않았다).

철학을 중심으로 계속 이야기해보자면, 저자는 철학 물음의 종류를 ‘What‘(세상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과 ‘How‘(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로 나누었다. 간략히 후려쳐보자면 전자는 형이상학을, 후자는 윤리학을 뜻한다고 할 수 있겠다. 어라? 뭔가 되게 중요한 게 빠졌는데? 나는 How 부분을 ‘우리는 세상을 어떻게 인식하는가‘라고 질문하는 인식론으로 설명할 줄 알았는데 저자에게 한 방 얻어맞았다. 저자는 자신의 집필 목적대로 인식론에 대한 내용은 하나도 담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영리하지만, 동시에 얼마나 많은 철학 개념이 독자에게 소개되지 않았는지 생각하면 아쉬울 따름이다.

가장 어이없는 점은 책 제목에는 ‘철학‘이 들어가면서 챕터별로 소개하는 개념은 심리학, 사회학, 언어학이 절반을 차지한다는 것이다. 제목을 인문학과 사회학은, 아니 아예 <공부는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로 고쳐야 할 판이다. 인문학과 사회학은 넓게 펼치면 서로 영역이 겹치기도 하지만 엄연히 다른 개념의 학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학문 분류가 너무 구시대적이어서일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 이 책은 거의 제목팔이 수준이다. ‘철학‘과 ‘삶의 무기‘라니, 너무 멋지고 그럴 듯해 보이잖아.

챕터별로 들어가도 할 말은 많다. ‘예정설‘을 말하면서 저자는 ‘노력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신은 말하지 않았다‘고 쓴다. 이러면서 올라갈 사람이 올라가는 현대 인사 평가 제도를 말하는데, 예정된 인사평가에 불만이 사라지게 제도를 재설계해야 한다고 말한다. 예정설 개념의 껍데기만 가지고 되도 않는 걸 붙인 셈이다.

챕터 37 ‘공정한 세상 가설‘에서는1999년에 명예퇴직을 권고받은 과장이 사장실로 뛰어들어 할복한 일화를 언급한다. 저자는 회사에 모든 걸 받쳐 일한 것은 개인의 자유의사에 따라 선택한 인생이라고 말하며 명퇴를 권고한 회사의 태도에 분개한 사람을 ‘세상은 공평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 치부해버린다. 세상이 100% 공정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나 개념에서 실례로 가는 비약이 꽤나 심하다. 이 부분만은 딱 일본 저서라는 분위기가 풍긴다. ˝세상은 결코 공정하지 않다. 그러한 세상에서 한층 더 공정한 세상을 목표로 싸워 나가는 일이 바로 우리의 책임이요, 의무다˝라는 긍정적인 문단이 바로 뒤를 잇지만 찜찜한 생각은 쉬이 지울 수 없다.

하지만 모든 책에도 배울 점은 있는 법. 챕터 43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에서는, 언어가 사고를 지배한다는 개념에서 ‘사고의 폭을 넒히고 싶다면 어휘력을 길러라‘라는 주장을 한다. 이전에 나는 이 개념을, 조지 오웰이 <1984>에서 신어제작을 언급하듯이 언어 사용과 금지, 의미의 고착화가 어떻게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는지, 원론적인 의미로밖에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어휘력을 길러야 사고의 폭을 넓힐 수 있다는 현실적인 생각을 할 수 있다니, 내게는 큰 역발상이었다.

결론적으로 그렇게 추천하고 싶지는 않다. 철학사를 버리고 개념만 취한 책은 겉핥기밖에 될 수 없다. 간단한 철학사 입문서로는 디테일은 버렸지만 후려치기로 뼈대를 파악할 수 있는 <지대넓얕>이 더 좋다고 본다. 오류도 많고 후려치기는 정말 위험하지만 입문서로 ‘즐기기‘에는 훨씬 낫다(단, 정말 입문의 개념이지 <지대넓얕>으로 철학을 파악했다고 보면 큰일난다. 나처럼 뭣도 모르고 허세만 가득한 소리를 할지도 모른다. 이 독후감만 봐도 알 수 있다). 소설로 쓰인 철학사 <소피의 세계>와 만화로 그려낸 <만화로 보는 지상 최대의 철학 쑈>도 재밌다.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처럼 개념만 쏙쏙 뽑아낸 책 중에는 <철학의 13가지 질문>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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