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문학동네 시인선 32
박준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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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1)

그렇게 인기가 많아서 18쇄까지 찍은 시집인데, 여전히 나는 이해하지 못한 글들만 잔뜩이다. 머리와 가슴에 들어오지 않아도 역시 계속 읽어나가야만 뭐든 되겠지. 생소한 표현과 연결되지 않는 개념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무딘 감성으로 꾸역꾸역 읽어내고 있다.

혹자는 박준 시인의 실제 모습과 시집의 괴리가 너무 커서 싫다고 했다. 유행에 편승하고 오글거리는 감성에 올라탄 글이라는 혹평은 덤. 작가가 작품을 쓸 때의 자아는 생활의 자아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기에, 그가 느낀 괴리는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사랑의 달달함보다 헤어짐 뒤에 느껴지는, 과거의 행복과 대비되는 쓸쓸함, 후회, 슬픔, 그럼에도 꿋꿋이 살아내는 모습… 글쎄, 난 이 시집에서 오글거리는 감성 따위2 느낄 새가 없었다.

마음에 드는 시 몇 편 옮긴다. 옮겨쓰면서도 참 먹먹하다.




창문들은 이미 밤을 넘어선 부분이 있다 잠결이 아니라도 나는 너와 사인(死因)이 같았으면 한다.

이곳에서 당신의 새벽을 추모하는 방식은 두 번 다시 새벽과 마주하지 않거나 그 마주침을 어떻게 그만두어야 할까 고민하다 잠이 드는 것

요와 홑청 이불 사이에 헤어 드라이어의 더운 바람을 틀어넣으면 눅눅한 가슴을 가진 네가 그립다가 살 만했던 광장(廣場)의 한때는 역시 우리의 본적과 사이가 멀었다는 생각이 들고

나는 냉장고의 온도를 강냉으로 돌리고 그 방에서 살아 나왔다

내가 번듯한 날들을 모르는 것처럼 이 버튼을 돌릴 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아서 맥주나 음료수를 넣어두고 왜 차가워지지 않을까 하는 사람들의 낯빛을 여관의 방들은 곧잘 하고 있다

˝다시 와, 가기만 하고 안 오면 안 돼˝라고 말하던 여자의 질긴 음성은 늘 내 곁에 내근(內勤)하는 것이어서

나는 낯선 방들에서도 금세 잠드는 버릇이 있고 매번 같은 꿈을 꿀 수도 있었다.

_ ’나의 사인(死因)은 너와 같았으면 한다’



나는 통영에 가서야 뱃사람들은 바닷길을 외울 때 앞이 아니라 배가 지나온 뒤의 광경을 기억한다는 사실, 그리고 당신의 무릎이 아주 차갑다는 사실을 새로 알게 되었다

비린 것을 먹지 못하는 당신 손을 잡고 시장을 세 바퀴나 돌다보면 살 만해지는 삶을 견디지 못하는 내 습관이나 황도를 백도라고 말하는 당신의 착각도 조금 누그러들었다

우리는 매번 끝을 보고서야 서로의 편을 들어주었고 끝물 과일들은 가난을 위로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입술부터 팔꿈치까지 과즙을 뚝뚝 흘리며 물복숭아를 먹는 당신, 나는 그 축농(蓄廳) 같은 장면을 넘기면서 우리가 같이 보낸 절기들을 줄줄 외워보았다

_ ‘환절기’



(전략)
어쨌든 나는 이곳의 회화를 사랑하기로 합니다 영양식 식단에 딸려 나오는 우유만 있으면 그들은 혼자 밥을 먹는 일에도 아파하지 않습니다 ‘원재료명들과 공장 주소와 식품의 유형과 이 제품은 재정경제부 소비자 피해보상규정에 의거 교환 또는 보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의 글자들을 한 자 한 자 떼어 맞춰보면 그리운 사람의 이름을 불러볼 수도 있습니다
(후략)

_ ‘이곳의 회화를 사랑하기로 합니다’ 에서



미인은 통영에 가자마자
새로 머리를 했다

귀밑을 타고 내려온 머리가
미인의 입술에 붙었다가 떨어졌다

내색은 안 했지만
나는 오랜만에 동백을 보았고
미인은 처음 동백을 보는 것 같았다

˝우리 여기서 한 일 년 살다 갈까?˝
절벽에서 바다를 보던 미인의 말을

나는 ˝여기가 동양의 나폴리래˝ 하는
싱거운 말로 받아냈다

불어오는 바람이
미인의 맑은 눈을 시리게 했다

통영의 절벽은
산의 영정(影幀)과
많이 닮아 있었다

미인이 절벽 쪽으로
한 발 더 나아가며
내 손을 꼭 잡았고

나는 한 발 뒤로 물러서며
미인의 손을 꼭 잡았다

한철 머무는 마음에게
서로의 전부를 쥐여주던 때가
우리에게도 있었다

_ '마음 한철'



나는 오늘 너를
화구에 밀어넣고

벽제의 긴
언덕을 내려와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냐며
말을 건네는 친구에게

답 대신 근처 식당가로
차를 돌린 나는 오늘 알았다

기억은 간판들처럼
나를 멀리 데려가는 것이었고

울음에는
숨이 들어 있었다

사람의 울음을
슬프게 하는 것은
통곡이 아니라

곡과 곡 사이
급하게 들이마시며 내는
숨의 소리였다

너는 오늘
내가 밀어넣었던

양평해장국 빛이라서
아니면 우리가 시켜 먹던
할머니보쌈이나 유천칡냉면 같은 색이라서

그걸 색(色)이라고 불러도 될까
망설이는 사이에

네 짧은 이름처럼
누워 울고 싶은 오늘

달게 자고
일어난 아침
너에게 받은 생일상을 생각하다

이건 미역국이고 이건 건새우볶음
이건 참치계란부침이야

오늘 이 쌀밥은
뼈처럼 희고
김치는 중국산이라

망자의 모발을 마당에 심고
이듬해 봄을 기다린다는
중국의 어느 소수민족을 생각하는 오늘

바람은
바람이어서
조금 애매한

바람이
바람이 될 때까지
불어서 추운

새들이
아무 나무에나
집을 지을 것 같지는 않은

나는 오늘

_ ‘오늘의 식단 -영(膜)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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