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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밀한 설계자들 - 세상을 변화시키는 새로운 종족
클라이브 톰슨 지음, 김의석 옮김 / 한빛비즈 / 2020년 4월
평점 :
절판
IT기업에 일할 때가 생각났다. 그때 좀 더 힘을 냈으면 아마 지금 나는 다른 일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쉬움이 크다. 먼저 시작했고 분위기도 좋았지만 결국 주저앉았다. 왜 그랬을까. 가장 큰 요인은 프로그래밍이다. 어떻게 설계를 해야 할지 몰랐다. 돈도 있고 시스템도 충분했지만 데이터베이스를 어떻게 구성해야 할지 제대로 계획하지 못했다. 디테일한 구조 설계가 되지 않으니 하드웨어 장비 구입으로 대신하려고 했다. 돈은 들어가지만 효과는 나오지 않았다.
밤새 일해도 신나는 것은 생각한 대로 그 결과가 나와줄 때다. 힘이 드는 것은 아무리 해도 답이 보이지 않을 때다. 홈페이지를 통해 이용자와 만나기 위해서는 이용자가 혹할만한 요소가 있어야 한다. 그게 기획자가 하는 일이다. 어떤 아이템으로 가입을 유도하고 머물게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일단 온 다음에는 여러 요소들을 배치해서 머물게 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 들어와서 나갈 때까지 이용자가 한 일을 모니터링하는 게 프로그래머의 일이다. 액션과 반응을 체크하고 구조를 좀 더 정밀하게 만들어야 한다.
기획을 하면서 옆에서 바로 수정, 적용시켜줬던 프로그래머가 생각이 난다. 집에 들어가는 일도 없이 거의 밤을 새우면서도 요구하는 것들을 바로 반영해 줬다. 말로 하면 도깨비방망이처럼 서비스에 반영이 되어 홈페이지를 통해 이용자의 반응을 얻었다. 프로그래머가 신기했다. 어떻게 이런 것을 다 알고 하는 걸까. 기계언어와 프로그래밍 언어를 알아야 기계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게 아닌다.
<은밀한 설계자들>은 프로그래밍에 대한 책이다. 프로그래머들이 어떤 일들을 하고 있는지를 알려준다. 그들이 어떻게 세상을 바꿔 놓고 있는지 깨우쳐 준다. 페이스북을 시작으로 해서 알파고까지 다양한 플랫폼이 소설처럼 눈길을 빨아들인다. 책이 두꺼워 언제나 다 읽지 싶었다. 저자의 방대한 취재와 글쓰기 덕분에 이런 책을 만나는 것은 행운이다. 한 줄의 언어로 세상을 바꾸는 기반을 만드는 사람들의 흥미로운 이야기가 가득하다.
"프로그래머는 오늘날 지구상에 잘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 인류가 소프트웨어로 이루어진 세상에 살고 있는 만큼, 프로그래머는 세상을 만든 건축가라 할 수 있다."-25쪽
이 책은 모두 11장으로 이뤄졌으며 해커에 대한 이야기, 교육에 대한 이야기 등 프로그래밍과 관련한 다채로운 이야기들이 흥미롭게 펼쳐진다. 프로그래머들의 특성에 대한 언급은 눈길을 끈다. 충분히 공감하는 내용이다.
"프로그래머들은 그들만의 사고방식 때문에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자주 문제에 부딪히곤 한다. 나와 이야기했던 몇몇 프로그래머들은 정답을 말하기 어려운 감정적인 문제에 대해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접근을 취하려다, 오히려 문제를 일으킨 적이 있다고 조심스럽게 이야기하기도 했다."-170쪽
초반부에 저자가 언급한 넷스케이프에 대한 것도 공감한다. 웹브라우저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지만 지금 넷스케이프는 없다. 왜 그랬을까. 왜 거기까지 밖에 가지 못한 걸까.
이 책의 미덕은 깊이다. 세밀한 이야기들이 좋다. 한계는 실리콘 밸리 중심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좀 더 다양한 국가의 특이한 개발자들을 담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다음번에는 그런 내용으로 다뤘으면 한다. 할 수 있다면. 이 책은 물론 개발자들이 읽으면 좋겠지만 개발자들의 세상이 궁금한 사람들이 읽는 게 더 좋다. 진로를 고민하는 고등학생이나 대학에서 프로그래머로서 살고 싶은 꿈을 키우는 청년들이 보면 어떨까. 개발하느라 개발자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다룬 내용을 좋아하지는 않을 것 같다. 독특한 종족이니까.
이제 우리나라도 소프트웨어 교육을 본격화하려고 한다. 학교 과목에도 넣고 아이들에게 코딩 교육도 이미 시키고 있는 부모들도 있다. 꼭 뭔가를 개발하기 위해서 배우는 게 아니라 결국 생각의 흐름을 구조화하는 것이 아닌가. 프로그래밍은 다른 일에도 삶에도 필요한 일이다.
이 책은 한마디로 세상을 바꾸는 종족에 대한 탐구 보고서다. 갇혀 있는 생각에서 좋은 프로그램이 나오지 않는다. 어떤 사고를 해야 할까. 그들만의 사고방식을 만나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