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동물들보다 더 영리한 돼지들이 농장의 모든 정책을 결정하는것은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졌다. 비록 그들의 결정 사항도회의에서 다수결에 의해 승인을 받아야 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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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언어
프랜시스 S. 콜린스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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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언어](프랜시스 S. 콜린스, 김영사)

내가 신앙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던 시기는 고등학생 때였다. 그전까지 성경을 신화로 이해했다.-파울러의 [신앙의 발달단계]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아이들이 처음 신앙을 받아들일 때는 신화, 이야기로 이해한다. 그냥 이야기에서 신앙으로 넘어가는 그 시기가 중요한데, 우리나라는 성경을 이야기로만 가르치는 교회가 대부분이라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어쨌든, 중3 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가 [새벽나라] QT집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청소년 QT책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어릴 때 아빠가 [예수님이 좋아요]라는 초등학생용 QT책을 종종 사주셨는데, QT를 어떻게 하는지 몰라서 QT책을 그저 읽기만 했던 터였다. 그렇게 친구를 통해 [새벽나라]를 알았고, 직접 구매해서 읽었다. [새벽나라]에는 창조과학회에서 다룰 만한 내용을 다룬 꼭지가 있었다. 욥기에 나오는 큰 하마가 공룡이라는 이야기가 제일 기억에 남는다. 그때부터 성경을 신화로 이해하는 단계를 벗어난 것 같다. 그 꼭지를 읽으려고 [새벽나라]를 구매하기도 했다.
고등학생 때 인터넷이 상용화되면서, 야후에 있었던 ‘창조론과 진화론‘ 게시판에서 활동했다. 고등학생 때까지의 성경지식과 과학지식으로 진화론 옹호론자들에게 반박(?)했다. 내가 알던 지식의 깊이가 얕아서 제대로 반박하지는 못했지만. 내가 믿는 하나님이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던 것 같다. 대학생 때도 다음 카페에서 ‘창조론과 진화론‘ 토론(?)을 잠깐 했다. 이번에는 곧 시들해졌다. 깨달은 것은, 창조론과 진화론은 영원히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뿐이었다.
대학생 때 ESF에서 성경공부를 하면서, 하나님의 실존을 더 이상 의심하지 않았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give&take‘의 하나님이었다는 것도 깨달았다.
서평에서 내 신앙의 여정(?)을 이렇게 길게 이야기하는 것은, 이 책의 독서모임 때문이다. 독서모임에서 진화론과 성경이 충돌하는 지점이 있어서 교회를 떠나는 사람이 많다는 말을 들었다. 개인적으로는 진화론과 성경이 충돌하는 지점 때문에 교회를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교회를 떠나기로 이미 마음을 먹은 상태에서, 이유만 그렇게 댄 것뿐일 것이다. 자신이 인식하든 인식하지 못하든 간에. 다른 예로, 신유의 은사로 병고침을 받아 믿은 사람은 그 문제로 다시 신앙을 버릴 수도 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로 그 ‘질병‘이 하나님을 만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마치 로렌스 크랩을 보는 듯하다. 크랩이 신앙과 상담을 조화시키기 위해 애썼던 것처렁, 콜린스도 신앙과 과학을 조화시키기 위해 애쓰고 있다. 바이오로고스라는 말을 써가며. 그리고 글쓴이는 유전학으로 신의 존재를 더 잘 깨달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 말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후가 궁금하다. ‘그래서 어떻다는 말인가?‘
지금껏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인간은 여러 방법을 동원했다. 나는 ESF에서 [길]을 공부하며 그 방법들을 배웠다. 이 책에 등장하는 지적설계론, 글쓴이가 서술하고 있는 인간에게 도덕법이 존재한다는 점 때문에 신이 존재한다고 설명하는 방법 등 다양하다. 그래서 이 책에서 신이 있다고 증명하는 내용은 새로울 것이 없는 내용이었고, 감흥도 생기지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 어려운 내용을 사용해가면서까지 설명해야 하는 부분이었는지 글쓴이의 의도가 궁금할 뿐이다. 170-171쪽에서 굴드의 서평을 인용하며, 유명한 과학자 중에서 반은 신을 믿고, 반은 안 믿는다고 적었는데, 유명한 과학자를 언급한 것은 인간 이성에 호소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성경보다 인간 이성을 우위에 두고 있다고 해야 할까.
이 책은 철저하게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서만 서술한다. 내가 보기에는 편협한 하나님이다. 신앙과 과학을 섞으려는 시도를 하며 성경을 과학과 같은 급으로 생각했다. 성경이 세상의 학문과 섞일 수 있는 학문의 일종인지 묻고 싶다. 인간 이성 수준이 그렇게 높은 걸까. 성경과 과학을 같은 선상에 두고 보는 것은, 성경을 과학책으로 읽으려는 시도 아닐까?
또, 이 책은 일반은총의 영역만을 다룬다. 즉, 단순히 하나님이 존재하는지 여부에만 관심이 있다. 신이 존재한다는 증명은 개신교가 아니라도 가능한 이야기이다. 그런 면에서 범신론적인 분위기도 자아낸다. 현 시대는 신의 존재를 믿기만 해도 믿음이 있다고 여긴다. 신의 존재를 믿는 것에서 믿음이 시작한다고 하더라도, 그 이상 넘어가지 못한다면 그 믿음이 무슨 소용일까? 그렇게 따지면, 다른 신을 믿어도 똑같지 않나? 그래서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류의 책은 독이 든 성배 같다는 생각이 든다.
과학과 신앙이 대치되는 부분이 있다. 또, 심리학과 신앙이 대치되는 부분도 있다. 우리가 접하는 학문 중에 신앙과 대치되지 않는 학문이 과연 존재하기는 할까? 그런 점에서, 과학이 유난히 신앙과 부딪히는 것처럼 말하지는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 이성과 신앙은 부딪히게 되어 있다. 믿음은, 그 이성을 뛰어넘는 일이다. 물론, 맹목적인 믿음은 배격한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유난히 동성애에 과격하게 반응한다. 죄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려면 모든 죄에 민감해져야 하지 않을까? 성 문제가 있는 목회자의 뉴스를 쉬쉬하고, 우리가 평소에 저지르는 수많은 죄들은 회개하지 않고 넘어가기 일쑤면서, 동성애가 제일 큰 죄인 양 반응하는 게 참 이상하다. 마찬가지로, 진화론만 신앙과 대치되는 것인 양, 과학만 신앙과 대치되는 것인 양, 부분만 보는 시각이 아쉽다. 모든 학문(세계)을 대하는 기독교인의 자세가 어떠해야하는지 관점이 정리되어 있다면, 굳이 진화론에만, 동성애에만 국한된 신앙인의 모습을 보이지는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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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먹으라 (핸디북) - 영적 독서
유진 피터슨 지음, 양혜원 옮김 / IVP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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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먹으라](유진 피터슨, IVP)

최근 유진 피터슨의 발언으로 조금 시끄러웠긴 하지만, 취할 건 취하고 버릴 건 버리자는 생각으로 계속 읽었다. (개혁주의적 관점에서) 발언 하나로 읽지 못할 것 같으면 제임스 패커 <하나님을 아는 지식>, 베니 힌 <안녕하세요 성령님>도 읽으면 안 될 텐데. 외국까지 갈 건 뭐 있나. <파워 로마서>는 또 어쩔 건지. 외국 목사님에 대한 경각심보다 한국 목사님에 대한 경각심이 우선이어야 하지 않나. 또한, 나와 반대되는 지점에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 의견은 모조리 버릴 것이 되는 것도 아니다. 여러 가지 배울 점들도 있다고 생각한다.
유진 피터슨을 처음 접한 것은 대학생 때였는지 교사를 하게 된 이후였는지 잘 생각나지 않는다. 아는 후배가 <메시지>라는 책을 갖고 있었는데, 성경책 같으나 성경책 같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한창 <시심>으로 묵상을 할 때 성경 개괄 내용 중에 <메시지>의 일부를 봤던 것 같기는 하다.
이 책은 2012년 말씀묵상캠프 때 목사님이 추천하셔서 산 책이다. 산지 꽤 오래 되었으나 책에 흥미를 잃은 세월이 길어 앞의 일부만 읽다가 보지 않고 있었다. 그 목사님은 <이 책을 먹으라> 이외에도 <사랑에 항복하다>, 존 파이퍼 <생각하라> 등의 책을 추천하셨고, <사랑에 항복하다>는 읽었으나 <생각하라>는 아직 책장이 펼쳐지지 못한 채 책꽂이에 꽂혀 있다. 언젠가는 읽을 것이라 기대하며.
그 목사님이 추천한 책을 샀던 것은 그 목사님이 말씀을 묵상하는 방식이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경을 어떻게 전체적으로 보아야 하는지, 성경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실제적으로 알 수 있었다. 즉, 새로운 지경이 열렸다. 상담을 공부하지 않으셨음에도 상담에서 던져야 하는 통찰력 있는 질문들이 성경을 통해 던져졌다. 상담에서만 그러한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게 아니었고, 성경을 통해 가능하다는 게 충격이었다. 그 이후 상담에 대한 관점이 로렌스 크랩 편에서 제이 아담스 편으로 돌아선 건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 책을 사고 학교에 들고 다니면서 5년 전 5학년 아이는 이 책이 진짜 먹는 거냐고 깨물어서 이 자국이 생기기도 했고, 올해 아이는 ˝책을 진짜 먹어요?˝라고 묻기도 했다. 제목에 있어서만큼은 충분히 흥미를 유발하고 있다.
아무튼, 나한테 맞지 않게 서론이 길었다. 괜한 변명 같기도 하다.
말씀묵상캠프를 진행하셨던 목사님은 이 책에서 ‘렉티오 디비나‘와 ‘하가‘를 가져오셨구나, 라고 생각했다. 개인적인 생각이긴 하지만 유진 피터슨이 묵상하는 방법을 취하시지는 않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야기 형식이라 쉽게 읽을 수 있었다.
성경을 왜 읽는가? 유진 피터슨은 사람들이 성경대로 살기 위해서 성경을 읽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대목에서 나는 질문을 던진다. 성경대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은 성경대로 살 수 있는가? 성경대로 사는 목적은 무엇인가? 조금 더 본질적인 접근이었으면 좋았겠다.
그리고 하나님을 계시하면서 그 계시에 우리가 동참하도록 끌어들이는 존재가 성경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시고 성경도 인격적이지만 성경을 인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나의 목적을 위해서 성경을 이용하고 있으며, 저자의 목적은 받아들이지 않는 비인격적 태도를 취한다고 한다. 내가 이해한 바로는 나의 목적을 위해 성경을 이용하는 것이 새로운 성삼위일체로 표현되는 주권적 자아를 의미하는 것 같았다(66-67쪽). 아무튼 사람 중심으로 성경을 해석하려 한다는 부분에서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또한 우리는 성경의 내용에만 집중할 뿐 형식에는 잘 집중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무슨 말이냐면, 소설을 뉴스로 읽을 수 없다는 말이다. 이 대목에서는 <언어의 직공이 되라>와 연결되는 지점이 있었는데, 이야기를 지나치게 추상화하여 성경의 원 의미를 훼손하고 있다는 것. 즉, 입체적인 성경을 평면으로만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통합적으로 보지 못하고 단편적으로만 바라보는 시선들. 그리고 책을 읽으면 독자가 해석하듯이 성경도 그렇다는 것도. 여기까지도 공감.
그리고 훌쩍 뛰어넘어서 성경을 읽는 것은 순종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대로 생각해보자면 나 중심적으로 성경을 읽는 것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성경을 읽는 것에 대한 차이가 명확하게 진술되어 있지 않고, 또한 그것은 가시적인 것이 아니며, 그렇기에 성경을 보는 독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면 어느 사람에게는 순종의 부분이 다른 사람에게는 아닐 수도 있는데 과연 순종이라고 할 수 있을까? 너무 성급하게 순종을 이야기함은 아닌지. 그리고 저자가 말하는 순종은 무엇일까? 단순히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선한 일만을 말하는 걸까?
뒷부분은 렉티오 디비나와 메시지를 집필하게 된 배경을 설명해주고 있다. 렉티오 디비나는 말하자면 입체적인 읽기인데, 텍스트를 읽는다, 묵상한다, 기도한다, 산다의 네 가지 요소가 들어 있다. 성경은 읽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에는 공감했고, 읽는다, 묵상한다, 기도한다까지는 어느 정도 수용할 수 있으나 ‘산다‘에서 막히는 부분이 있었다. ‘산다‘에서는 ‘관상‘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저자는 ‘관상‘을 우리가 흔히 아는 관상기도와 다르게 말하고 있었다(나는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는데, 명상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하나님으로 채워진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잘 모르므로 여기까지;;). 관상은 그냥 살아내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왜 순종이라는 표현 대신 관상이라는 표현을 썼는지 궁금했다. 추측컨대, 읽는 것과 실천하는 것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서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책 전체에 전반적으로 칼 바르트가 흐르고 있어 내 신앙관과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전반적으로 인간의 편에서 하나님의 입장을 고려하며 보는 성경이라는 느낌이 강했고, 그것은 기도와 성경 읽기를 은혜의 시선에서 보는 내 관점과 달리 인간의 반응으로 보는 이 사람들의 입장이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본 회퍼 <시편 이해>가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부분도 있었고, 성경을 다른 각도로 보는 지점이 생긴 것도 감사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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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한 일을 이루기 위해선 감정을 조절하고 재미있는 일이라도자제할 수 있어야 한다.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의 순위를 정하고 집중하는 능력도 필요하다. 이를 실행기능(executive function)‘이라고 하는데, 실행 기능의 중추 역시 전두엽이다. - P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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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직공이 되라 - 건전한 성경 해석의 비결 자세히 읽기 시리즈 1
김지찬 지음 / 생명의말씀사 / 199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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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직공이 되라]
김지찬 씀/생명의말씀사

(신대원에서 공부하는) 동생의 추천으로 읽게 되었다. 작년엔가 추천했는데 이제야 읽는다.
직공은, ‘직물을 제조하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라고 사전에 나와 있다. 언어의 직공이 되라는 말은, 언어를 직물로 비유하여 날줄과 씨줄을 엮듯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어야 함을 의미하는 게 아닌가 싶다.
특별히 여기에서 말하는 언어는 성경에 나오는 언어이다.
서론과 결론을 제외하고는 세 파트로 나누어져 있는데, 소리와 의미, 비유적 언어와 의미, 수사법과 의미가 그 세 파트이다. 제일 깨달음이 많았던 부분은 소리와 의미 파트였다. 유사 발음, 동음이의어, 각운, 두운, 모운 등 이런 것들은 히브리어나 헬라어를 모르면 알 수 없는 영역이기에 신기한 것들이 많았다(예를 들면, 부끄럽다와 벌거벗다가 유사발음). 비유적 언어나 수사법과 관련한 부분은 학생 때 국어 시간에 들어봤던 내용들이었는데, 성경에 적용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게 조금 충격적. 성경이 문학책은 아니지만 문학적 기법을 쓰고 있음을 인정한다면 그 기법에 대해 알 필요가 있는데 노력하지 않았던 것 같다. 한편으로 어느 것이 팩트이고 어느 것이 비유적 기법인지 구분하지 못했던 부분도 있었던 것 같고, 비유적 기법과 수사법의 영향으로 생기는 언어의 묘미에 대한 감흥이 없었던 것 같다.
1994년 내용을 예시로 많이 다루고 있어서 세대의 간극이 느껴지긴 하지만, 예시가 있어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성경에 쓰인 문학적 기법에 대해 조금 더 연구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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