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먹으라 (핸디북) - 영적 독서
유진 피터슨 지음, 양혜원 옮김 / IVP / 2011년 11월
평점 :
품절


[이 책을 먹으라](유진 피터슨, IVP)

최근 유진 피터슨의 발언으로 조금 시끄러웠긴 하지만, 취할 건 취하고 버릴 건 버리자는 생각으로 계속 읽었다. (개혁주의적 관점에서) 발언 하나로 읽지 못할 것 같으면 제임스 패커 <하나님을 아는 지식>, 베니 힌 <안녕하세요 성령님>도 읽으면 안 될 텐데. 외국까지 갈 건 뭐 있나. <파워 로마서>는 또 어쩔 건지. 외국 목사님에 대한 경각심보다 한국 목사님에 대한 경각심이 우선이어야 하지 않나. 또한, 나와 반대되는 지점에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 의견은 모조리 버릴 것이 되는 것도 아니다. 여러 가지 배울 점들도 있다고 생각한다.
유진 피터슨을 처음 접한 것은 대학생 때였는지 교사를 하게 된 이후였는지 잘 생각나지 않는다. 아는 후배가 <메시지>라는 책을 갖고 있었는데, 성경책 같으나 성경책 같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한창 <시심>으로 묵상을 할 때 성경 개괄 내용 중에 <메시지>의 일부를 봤던 것 같기는 하다.
이 책은 2012년 말씀묵상캠프 때 목사님이 추천하셔서 산 책이다. 산지 꽤 오래 되었으나 책에 흥미를 잃은 세월이 길어 앞의 일부만 읽다가 보지 않고 있었다. 그 목사님은 <이 책을 먹으라> 이외에도 <사랑에 항복하다>, 존 파이퍼 <생각하라> 등의 책을 추천하셨고, <사랑에 항복하다>는 읽었으나 <생각하라>는 아직 책장이 펼쳐지지 못한 채 책꽂이에 꽂혀 있다. 언젠가는 읽을 것이라 기대하며.
그 목사님이 추천한 책을 샀던 것은 그 목사님이 말씀을 묵상하는 방식이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경을 어떻게 전체적으로 보아야 하는지, 성경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실제적으로 알 수 있었다. 즉, 새로운 지경이 열렸다. 상담을 공부하지 않으셨음에도 상담에서 던져야 하는 통찰력 있는 질문들이 성경을 통해 던져졌다. 상담에서만 그러한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게 아니었고, 성경을 통해 가능하다는 게 충격이었다. 그 이후 상담에 대한 관점이 로렌스 크랩 편에서 제이 아담스 편으로 돌아선 건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 책을 사고 학교에 들고 다니면서 5년 전 5학년 아이는 이 책이 진짜 먹는 거냐고 깨물어서 이 자국이 생기기도 했고, 올해 아이는 ˝책을 진짜 먹어요?˝라고 묻기도 했다. 제목에 있어서만큼은 충분히 흥미를 유발하고 있다.
아무튼, 나한테 맞지 않게 서론이 길었다. 괜한 변명 같기도 하다.
말씀묵상캠프를 진행하셨던 목사님은 이 책에서 ‘렉티오 디비나‘와 ‘하가‘를 가져오셨구나, 라고 생각했다. 개인적인 생각이긴 하지만 유진 피터슨이 묵상하는 방법을 취하시지는 않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야기 형식이라 쉽게 읽을 수 있었다.
성경을 왜 읽는가? 유진 피터슨은 사람들이 성경대로 살기 위해서 성경을 읽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대목에서 나는 질문을 던진다. 성경대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은 성경대로 살 수 있는가? 성경대로 사는 목적은 무엇인가? 조금 더 본질적인 접근이었으면 좋았겠다.
그리고 하나님을 계시하면서 그 계시에 우리가 동참하도록 끌어들이는 존재가 성경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시고 성경도 인격적이지만 성경을 인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나의 목적을 위해서 성경을 이용하고 있으며, 저자의 목적은 받아들이지 않는 비인격적 태도를 취한다고 한다. 내가 이해한 바로는 나의 목적을 위해 성경을 이용하는 것이 새로운 성삼위일체로 표현되는 주권적 자아를 의미하는 것 같았다(66-67쪽). 아무튼 사람 중심으로 성경을 해석하려 한다는 부분에서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또한 우리는 성경의 내용에만 집중할 뿐 형식에는 잘 집중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무슨 말이냐면, 소설을 뉴스로 읽을 수 없다는 말이다. 이 대목에서는 <언어의 직공이 되라>와 연결되는 지점이 있었는데, 이야기를 지나치게 추상화하여 성경의 원 의미를 훼손하고 있다는 것. 즉, 입체적인 성경을 평면으로만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통합적으로 보지 못하고 단편적으로만 바라보는 시선들. 그리고 책을 읽으면 독자가 해석하듯이 성경도 그렇다는 것도. 여기까지도 공감.
그리고 훌쩍 뛰어넘어서 성경을 읽는 것은 순종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대로 생각해보자면 나 중심적으로 성경을 읽는 것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성경을 읽는 것에 대한 차이가 명확하게 진술되어 있지 않고, 또한 그것은 가시적인 것이 아니며, 그렇기에 성경을 보는 독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면 어느 사람에게는 순종의 부분이 다른 사람에게는 아닐 수도 있는데 과연 순종이라고 할 수 있을까? 너무 성급하게 순종을 이야기함은 아닌지. 그리고 저자가 말하는 순종은 무엇일까? 단순히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선한 일만을 말하는 걸까?
뒷부분은 렉티오 디비나와 메시지를 집필하게 된 배경을 설명해주고 있다. 렉티오 디비나는 말하자면 입체적인 읽기인데, 텍스트를 읽는다, 묵상한다, 기도한다, 산다의 네 가지 요소가 들어 있다. 성경은 읽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에는 공감했고, 읽는다, 묵상한다, 기도한다까지는 어느 정도 수용할 수 있으나 ‘산다‘에서 막히는 부분이 있었다. ‘산다‘에서는 ‘관상‘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저자는 ‘관상‘을 우리가 흔히 아는 관상기도와 다르게 말하고 있었다(나는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는데, 명상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하나님으로 채워진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잘 모르므로 여기까지;;). 관상은 그냥 살아내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왜 순종이라는 표현 대신 관상이라는 표현을 썼는지 궁금했다. 추측컨대, 읽는 것과 실천하는 것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서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책 전체에 전반적으로 칼 바르트가 흐르고 있어 내 신앙관과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전반적으로 인간의 편에서 하나님의 입장을 고려하며 보는 성경이라는 느낌이 강했고, 그것은 기도와 성경 읽기를 은혜의 시선에서 보는 내 관점과 달리 인간의 반응으로 보는 이 사람들의 입장이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본 회퍼 <시편 이해>가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부분도 있었고, 성경을 다른 각도로 보는 지점이 생긴 것도 감사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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