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심으로 사는 나라 - 기도와 삶의 부흥을 이끄는 주기도 강해
박영돈 지음 / IVP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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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심으로 사는 나라](박영돈, IVP)

2월부터 읽은 책인데, 5개월만에 다 읽었다. 중간 중간에 읽어야 할 책들이 있다 보니(성서교육회 독서모임, 개혁주의 성경공부에서 읽는 책) 집중해서 읽기 어려웠다. 큰 그림을 그리지 못한 느낌이 든다.

박영돈 교수님은, 지금은 은퇴하셨지만 고신대학원에서 교수님으로 재직하셨던 분이다. 페친 중 한 명이 박영돈 교수님 글에 가끔 ‘좋아요‘를 누르는 것을 보고 박영돈 교수님 글을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유튜브에 교수님 설교(?)를 편집한 영상을 보기도 해서 교수님이 어떻게 책을 쓰셨는지 궁금했다. [성경으로 풀어낸 사도신경] 책을 보고 살짝 충격을 받기도 해서 고신대학원에서 강의하신 분이니 주기도문 강해를 [성경으로 풀어낸 사도신경]처럼 하셨을 것 같다는 기대감으로 책을 읽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 기대가 너무 컸던 것 같다. 아니, 내가 기대하던 방향과 달랐던 것 같다. 내 생각과 같은 생각의 책을 찾았던 것은 아니다. [성경으로 풀어낸 사도신경]처럼 풀어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하지만 밑줄 그어야 할 부분이 많았고, 띠지를 붙여서 다시 한 번 더 보아야 할 부분도 많았다.
주기도문은 산상수훈 중 가운데에 위치해 있다. 그래서 매우 중요한 기도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깊이 생각해본 적은 없기 때문에 이 책을 통해 깊이 깨달았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있었다. 교회에서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주기도문을 외우지만 이방인처럼 중언부언 외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생각하고 있다. 따로 묵상하는 시간을 내야 할 것 같다.
이 책은 주기도문 설교집이다. 부제는 ‘기도와 삶의 부흥을 이끄는 주기도 강해‘이다. 어렸을 적 교회 목사님이 소위 ‘부흥사‘로 불리던 분이셨다. 2000년쯤 ‘부흥‘이란 곡도 나오면서 교회의 양적 부흥을 말하는 설교자도 많았다(이 곡의 의도가 그러하다는 뜻은 아니다.). 그래서인지 ‘부흥‘에 대해 말하면 색안경을 끼게 된다.

주기도문의 첫 부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로 시작한다. 아버지라는 데에서 묵상할 부분이 많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진 육신의 아버지에 대한 이미지는 그리 긍정적이지 않습니다. ...(중략)...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을 인간 아버지를 통해 이해하는 데는 심각한 한계가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에서 우리가 어떤 아버지가 되어야 하는지를 배우고 도전받을 필요가 있습니다.(35쪽)

따라서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것은 복음에 대한 믿음의 반응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놀라운 일과 그로 인해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와 특권에 대한 감사와 찬양의 반응입니다. 무엇을 얻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구속으로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어 주신 놀라운 은혜를 찬양하기 위해 아빠를 부르는 것입니다.(42~43쪽)

하나님이 자신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명하신다는 것은, 우리의 호출에 반드시 응하신다는 약속에 스스로 매이신다는 뜻입니다.(57쪽)

하나님을 아버지, 아빠라고 부르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다. 육신적인 아버지의 의미를 넘어서서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나에게 아버지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봐야겠다.

예전에 한신대학교(기장)에서 학생회장이었던가, ‘민중의 이름으로‘ 기도한다고 했다가 논란이 되었던 적이 있다. 다음 인용이 그 논란에 대한 개혁주의적 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우리가 ‘아버지‘를 부르며 기도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공로를 힘입어 예수님과 같은 아들의 자리에 서서 아들의 특권을 가지고 기도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말의 의미입니다.(74쪽)

요즘 한국교회의 답답한 점 가운데 하나, 복음이 구원으로 끝난다고 여기는 것에 대해서는(이런 생각을 하게 된 대표적인 질문이 ‘오늘 밤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라고 생각한다.)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두 번째 간구 ‘나라가 임하시고‘에 있는 내용이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내가 구원받는 것입니까? 내가 천국에 가는 것입니까? 복음을 그런 차원에서만 이해하면 결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온전한 기도를 드릴 수 없습니다. 복음은 예수님이 왕이시라는 메시지입니다.(105쪽)

다음 문단은 참 위로가 되었다.

우리의 미미한 기도를 그분의 나라를 앞당기고 확장해 나가는 중요한 방편으로 택하신 이유는 우리를 자신과 함께 왕적 권위를 행사하는 자녀로 대우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중략)... 기도는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하늘에 앉게 된 것을 구체적으로 체험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이 세상을 다스리는 특권을 누리는 것입니다.(108~109쪽)

다음은 기도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더 생각해야 했던 대목이었다. 요즘 기도를 쉬는 죄를 범하고 있어서 사실상 할 말은 없지만, 공적 기도의 자리에 나오는 것을 (스스로) 대단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도는 늘 어렵다.-세 번째 간구,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에 있는 내용이다.

이렇게 기도는 삼위 하나님과의 연합 및 교제인 동시에, 하나님과 함께 그 뜻을 이 땅에 이루어 가는 동역이기도 합니다. 사귐과 동역은 사실상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기도를 하나님과의 사귐으로만 생각하면 그분의 임재를 홀로 누리는 영적 이기주의에 빠질 수 있습니다. 반면에 기도를 하나님과의 동역으로만 여기면 기도가 고역스러운 의무가 되고 맙니다. 교회와 세상을 위한 봉사와 사역으로서의 기도는 매우 힘든 것이지만,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에서 오는 영적 즐거움과 평강이 이 수고에 활력을 불어넣어 줍니다. 그래서 기도가 힘들지만 즐거운 행위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163~164쪽)

그리고 다섯 번째 간구,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고‘에서 ‘여러분의 심령이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용서를 맛본 때는 언제입니까? 언제 마지막으로 회개하셨습니까?‘(209쪽)는 너무 찔렸고, ‘회개할 것이 없을수록 회개가 깊어진다‘(211쪽)는 소제목과 ‘회개할 것이 많을수록 회개가 없다‘(213쪽)는 소제목도 통찰의 문구라 ‘아, 그렇지.‘ 하면서 읽었다.우리가 용서해야만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인가에 대해서도 언급하는데,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용서의 비밀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있습니다. 용서란 인간에게 불가능한 일입니다. 오직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용서할 수 있습니다. ...(중략)... 하나님의 용서가 반드시 우리의 용서로 열매 맺고 계속 이어져야 한다는 바로 그 의미에서, 주님은 우리의 죄사함이 우리가 다른 이를 용서하는 데 달려 있는 것처럼 말씀하신 것입니다.(219쪽)

여섯 번째 간구,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에서 주목했던 부분은 다음 내용이었다.

가난보다 부의 시험을 이기기가 더 어렵습니다. 낮아졌을 때보다 높아졌을 때 교만의 시험에 빠지기 쉽고, 무명이었을 때보다 유명해졌을 때 인기와 명성의 유혹에 쓰러지기 쉽습니다.(243쪽)

국회의원들이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도, 정상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목회자들이 쉽게 유혹에 빠지는 것도, 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 아닐까. 만물보다 더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 하였다. 나이가 들수록 (경제력을 가지게 되므로) 가난하기보다 부하게 되고, 높아지는 위치에 있을 확률이 높다(교사의 경우에는 부장이나 관리자로 볼 수 있겠다.). 그만큼 쓰러지기 쉽다는 말일 것이다. 나이가 들면, 어릴 때보다 판단력이 높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유혹거리는 그만큼 더 늘어나 있다. 여전히 기도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 시험이 되지 않도록 항상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249쪽)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험을 주시는 것은 ‘우리 안에 믿을 만한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자신의 무력함을 알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기도할 것을 아시기 때문‘(250쪽)이다. ‘만왕의 왕이 드리는 기도를 함께 드리는 우리는 얼마나 영광스러운 특권을 지닌 사람들입니까?‘(295쪽)

기도와 찬양을 드리는 태도에 대해 언급하신 내용을 인용하며 서평을 마친다.

기도와 찬양은 감정과 감동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바라보는 관점으로 하는 것입니다. 미래에 온전히 나타날 하나님 나라와 영광을 바라보며 그 관점에서 우리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해석할 때만, 낙심되는 상황에서도 비로소 찬양할 수 있게 됩니다.(2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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