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가야 할 길 아직도 가야 할 길
M.스캇 펙 지음, 최미양 옮김 / 율리시즈 / 2011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아직도 가야 할 길](스캇 펙/최미양 옮김, 율리시즈)

나는 이 책 제목을 어디에서 본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아빠 서재에서 봤던 것 같은데 잘못된 기억일까. 어째서 이 책 제목을 알고 있는지,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은 무엇인지 도통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이번 달 독서모임 책이므로 읽어보았다.
스캇 펙 책은 처음이다. 스캇 펙이 어떤 사람인지 검색해 보았는데, 책 앞면에 나온 소개 이외에 더 자세한 소개는 없었다. 집에 책장이 한 장도 넘어가지 않은 채 얌전히 꽂혀 있는 [거짓의 사람들]이라는 책이 있는데, 그 책이 스캇 펙 책인 줄 이제 알았다. 아마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학원 수업 들으면서 추천받은 책이었던 것 같은데 이 책을 읽고 보니 그 책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아마도 읽는다면 한참 뒤에 읽게 될 것 같다.). 스캇 펙이 기독교인인 줄 알았는데(정확하게는 기독교인으로 이 책을 집필한 줄 알았는데-이 책을 아빠 서재에서 봤다면 당연히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했던 것..) 아니었다. 이 책을 집필하기 전까지 불교도였고, 이 책을 집필한 이후에 공개적으로 기독교인으로 개종을 선언했다고 한다. 심지어 신학자도 아니고, 정신과 의사였다. 그래서인지 책 내용이 매우 흥미로웠다. 그리고 이 책 집필 이후, 인간 심리와 기독교 신앙의 통합을 지향하는 글쓰기를 했다고 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 할 말은 많지만, 그러면 또 서평이 길어질 것 같으므로 일단 넘어가기로 한다.
총 4부로 이루어져 있다. 훈육, 사랑, 성장과 종교, 은총이다. 은총 파트는 번역은 은총이지만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의 은혜를 은총으로 번역한 것으로 보아서는 은혜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이번 독서모임에서는 각자가 한 파트씩 맡아서 발제문을 만들기로 했고, 내가 맡은 파트는 3부 성장과 종교 파트여서 3부를 더 공들여 읽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제일 흥미롭고 재미있었던 파트는 1부 훈육이었다. 1부에서 저자의 통찰력을 보고 감탄을 연발했다.

진정으로 삶이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되면, 즉 진정으로 그 사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면, 삶은 더 이상 힘들지 않게 된다.(19쪽)
삶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기본적인 도구는 훈육이다... (중략)... 삶이 힘들다는 것은 문제를 직면하고 해결하는 과정이 고통스럽다는 것을 말한다... (중략)... 문제를 해결하는 이 모든 과정 속에 삶의 의미가 있다.(20쪽)

삶이 힘든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머리로만 이해하고 가슴으로 체험하지 못한 것인지 여전히 삶이 힘들다. 그런데 이러한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훈육, 자신을 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저자의 말은 뭔가 아이러니하다. 인생의 위기를 겪으면서 깎여져 나간다고 하는데, 이것이 훈육의 결과라고 봐도 될지 모르겠다. 삶이 힘든 것을 환경 탓으로 돌리지 않고, 문제를 직면하고 해결하는 과정이 고통스러운 것이라고 말한다. 선택은 자신이 하는 것이라고 늘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문제의 원인을 (다른 곳에서) 찾으려고 했던 것 같다. 문제를 직면할 용기는 가지지 못한 채.
저자가 말하는 훈육은 즐거운 일을 뒤로 미루는 것, 책임을 지는 것, 진리에 대한 헌신, 균형잡기 네 가지이다. 훈육은 사용법의 문제보다, 이를 사용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느냐, 없느냐가 관건이다. 그리고 이 도구들은, 고통을 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고통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다(23쪽). 사람들은 고통에 대항하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 더 고통스러운 편을 택한다.
저자는 즐거운 일을 나중으로 미루는 것은 삶이 주는 고통과 즐거움을 맛보는 순서를 정한다는 의미(25쪽)라고 말했다. 즐거움을 뒤로 미루는 능력을 발달시키지 못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부모의 양육방식이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한다(27쪽). 부모의 삶이 무절제하면서 자녀에게 절제를 가르쳐줄 수 없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이유는 사랑이다. 부모가 아이를 사랑한다는 것은 아이에게 시간을 바치는 것을 의미하고, 그것은 부모에게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가치있는 존재인지 가늠하는 척도가 된다.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이 느낌은 자기 절제의 초석이다(32쪽). 자기존중감을 가진 아이들은 안정감을 지니게 된다. 안정감이 없다는 것은 버림받을 것에 대한 두려움이며, 그 두려움을 가진 사람들은 ‘세상을 위험하고 무서운 곳으로 인식하고 미래에 더 큰 즐거움이나 안전을 보장받는다고 해도 현재의 어떤 즐거움이나 안전을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미래는 참으로 미심쩍기 때문이다.‘(35쪽) 즐거운 일을 뒤로 미루는 것. 어릴 때는 그렇게 했었다. 오히려 성인이 된 지금 즐거운 일을 먼저 하고자 하는 욕구가 커져 버렸는데, 그것은 스스로를 가치있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 어릴 때와 지금, 달라진 모습을 보이게 되었을까?
두 번째 훈육은 책임을 지는 것이다. 이 말은, 우리가 문제를 해결하기 전, 먼저 문제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는 것(44쪽)으로부터 시작한다. 외부에 책임을 전가한다는 것은 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없다는 말이다. 그저 동정받고 싶은 것 아닐까. PK에 대한 생각이 바뀐 것도, 대학원 수업을 하면서부터였는데, 사실 내게 PK는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PK라는 말 자체에서 생각할 수 있듯이, 목회자 자녀들, 즉, 부모와 나 사이의 문제를 목회자와 목회자 자녀인 나 사이의 문제로 특수하게 바라봤던 것이 오히려 더 독이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특별한 문제를 가진 사람이다.‘라고 생각하고 싶은 것 말이다. 그 특별한 문제에 대한 책임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목회하는 부모님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것, 그런 생각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말한다. ‘... 사는 동안 책임져야 할 것과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을 분간하는 것이 실존의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절대 완전히 해결될 수 없는 문제다.‘(50쪽)
세 번째 훈육 진리에 대한 헌신은 직면이라고 보아야 할까. 우리가 옳다고 믿는 가치관은 계속 수정되어 나가야 한다는 내용인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영역이기도 하다. 내가 갖고 있었는지도 모르고 있었던 비합리적 신념에 맞서 합리적 신념으로 바꾸는 인지상담을 좋아해서일 것이다(말이 쉽지 실제로 비합리적 신념을 비합리적 신념이라고 인정하기까지는 시간이 꽤 오래 걸린다. 머리로는 이해해도 가슴으로 와닿지 않을 때도 종종 있다.).
그리고 네 번째는 앞의 훈육들을 훈육하기 위해 필요한 훈육인 균형잡기이다. 이 파트에서는 마음에 와닿았던 구절들로 내 생각을 대신한다.

그리고 삶에 모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죽음이다.(101쪽)
...포기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먼저 소유해야 한다는 것이다.(107쪽)

저자는 1부에서 말한 훈육의 기술들(?)을 사용할 힘과 에너지와 의지는 사랑이라고 말하면서(108쪽) 2부에서 사랑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서술한다. 저자는 사랑을, ‘자기 자신이나 타인의 영적 성장을 도울 목적으로 자신을 확대시켜 나가려는 의지‘라고 정의한다(114쪽). 사랑에 빠지는 것(흔히 말하는 남자와 여자의 사랑)과 사랑을 엄밀히 구분하고 있지만, 플라톤의 동굴 이론처럼 사랑에 빠지는 것이 참 사랑의 그림자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 또, 사랑이 아닌 것과 사랑인 것에 대해 차례로 서술하고 있는데(저자는 사랑과 사랑이 아닌 것을 행동의 목적이 무엇인가로 구별한다. 진정한 사랑의 목적은 영적 성장이다.(166쪽)), 다음 대목은 생각해볼 만해서 적어본다.

다른 사람을 위해 뭔가를 한다고 생각할 때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자신의 책임을 거부하고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무언가를 할 때에는 그것을 하기로 선택했기 때문이고, 그것이 우리를 가장 만족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다른 사람을 위해 한다 해도 사실은 우리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행위다.(165쪽)

실제로 우리가 교회에서 예수님을 위해 무언가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나를 만족시키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많다. 교회 봉사들이 대부분 그러하지 않나? 그런 의미에서 교회 봉사는 최대한 적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입장이긴 하다. 죄인된 사람이 예수님을 ‘위한다‘는 게 가당키나 한 건지. 자기 만족을 위해 했으면서 예수님을 위해 했다는 것은 너무 위선적이다.
다음 구절을 끝으로 2부를 마친다.

사랑은 노력이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음의 본질은 게으름이다. (186쪽)

훈육을 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가 사랑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3부 성장과 종교는 어떻게 이어지는 걸까, 생각했더니 자기 성장을 하는 데 훈육이 필요하고, 훈육을 하는 데 사랑이 필요하며, 그 사랑에 대한 통찰력을 얻으려면 종교라는 주제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며 연결짓는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종교의 편협한 이해가 아니라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을 통틀어 종교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중에는 과학도 포함된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사람들은 종교를 가지고 있다. 사실 저자에게 놀란 것이, 이 책을 집필했을 때는 불교도였다고 했는데 323쪽의 질문에 도달한 것이었다. (이 세상에 드러나는 모든 더럽고 비참한 문제들이) 하느님이 인간에게 행한 것인가 아니면 인간이 하느님에게 저지른 것인가? ... 인간이 하나님을 믿는 경향이 문제일까, 인간이 독단적인 게 문제일까? ... 우리가 제거해야 하는 것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인가 아니면 독단주의인가?
그래서 3부에서의 내 발제문은? 독서모임이 끝나고 나서 말하도록 하겠다.
2부에서 사랑하지 않음의 본질은 게으름이라고 했다. 이 게으름은 눈에 보이는 것만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게으름의 주된 형태는 두려움이다(393쪽). 이 저자의 말에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는다는 성경구절이 생각났다.
4부 은총에서는 우리가 겪고 있는, 과학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적적인 일들을 말한다. 심리치료 역시 증상을 보고 진단을 할 수 있지만, 어떻게 낫게 되는지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은총이라고 말한다. 4부의 은총 파트는 성경 구절을 신선하게 해석(?)했다는 점에서 참신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저자의 생각에 동의하기는 어려웠다. 그럼에도 이 책은 이야깃거리가 많고, 독서모임 때 각자 어떤 발제문을 가지고 생각을 나누게 될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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