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내안에 하나님이 없다 -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신비 그리고 그분과의 인격적인 사귐
필립 얀시 지음, 차성구 옮김 / IVP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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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내 안에 하나님이 없다](필립 얀시/차성구 옮김, IVP)

필립 얀시 책으로는 아마도 네 번째 읽었던 책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것도 이미 13, 14년 전쯤 되었다. 다시 읽게 된 것은 이번 달 독서모임 책이기 때문이다. 지난 달 독서모임 책이었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만큼 고구마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역시나 고구마였다. 얼른 사이다를 마셔야 할 것 같다(사이다로 낙찰된 책은 [유사 그리스도인]). 아무래도 필립 얀시와 나는 신앙의 결이 무척이나 다른 모양이다. 게다가 얀시를 수용하는 것도 어렵다. 나이가 들수록 고집만 세진다더니 아직 불혹도 아닌데 벌써부터 이러면 어쩌나.

얀시의 머릿속을 따라가기가 쉽지 않다. 오히려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더 쉬웠던 것 같다.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는 사례의 나열이기나 했지, 이 책은 사례도 있고, 다른 사람의 말도 있고, 여러 가지가 짬뽕으로 섞여 있다 보니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집중해야 해서 힘들었다.
어릴 때 논리야 시리즈를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세 권 중 어느 책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이런 내용이 있었다. 세계에서 제일 예쁜 눈, 제일 예쁜 코, 제일 예쁜 입, 이런 식으로 제일 예쁜 부분만 모은 얼굴이 실제로는 제일 예쁜 얼굴이 아니더라는 내용.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이 책이 그런 느낌이 들어서였다. 얀시는 똑똑한 사람임에 틀림없고, 책도 많이 읽었고, 경험도 많이 한 사람인데, 그런 것들을 다 끌어모으니 제일 좋은 책이 되지는 않은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또, 분당우*교회 목사님 설교도 생각났다. 얀시처럼 예민한 감성, 감정에 호소하는 것 같은 서체와 분위기가 많이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지난 달 독서모임 책에서 얀시에게 실망했기에 이번에도 실망감 가득 안고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것이 아닐까, 계속 자기검열을 했다.
이 책은 대략적으로 의심에서 시작해서 회복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이라고 소개해야 할까. 의심이 믿음으로 가는 출발점임에는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내 신앙이 자란 것은(자랐다고 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이 계시는지에 대한 의심이 만연했던 중고등학생 시절 때부터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66쪽에 재미있는(?) 기도가 나온다. ‘부유한 나라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주로 ‘주님, 이 고난을 내게서 물리쳐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는 반면, 옥에 갇히고 핍박받는 그리스도인들과 가난한 나라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주여, 이 고난을 견뎌 낼 힘을 주소서!‘라고 기도한다.‘ 이것은 부유한 나라와 핍박받는 그리스도인, 가난한 나라와 상관이 없는 기도라고 생각한다. 내 기도가 바뀐 과정이 이랬다. 처음에는 ‘힘든 일을 겪지 않게 해주세요.‘였고, 그 다음에는 ‘힘든 일에서 벗어나게 해주세요.‘였고, 그 다음은 ‘힘든 일을 잘 버틸 수 있게 해주세요.‘였다. 아마도 그 다음은 ‘내가 매일 기쁘게 순례의 길 행함은‘이 되겠지만 그 단계까지는 아직 한참 남은 것 같다. 어쨌든, 사람은 누구나 고난을 겪고, 그 가운데 믿음으로 이겨나갈 때마다 기도는 바뀌게 되는 것 같다는 게 내 생각이다.
대학생 때 선교단체 간사님이 ‘믿음은 이성적인 것도, 감정적인 것도 아니다.‘고 하신 적이 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루이스의 말을 인용하면서 ‘분명 그런 믿음은 논증이 아닌, 감정을 통해 형성된다.‘고 한다. 이 구절을 읽으니 [신앙감정론]을 꼭 읽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곧 복직인데 한 달에 세 권 읽을 수밖에 없고 도대체 언제 읽느냐는 말이다.). 믿음이 감정을 통해 형성된다? 믿음은 은혜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나. 교리를 공부하는 이유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을 때 더 풍성히 하나님과의 교제를 누리기 위함이 아닌가. 음, 루이스의 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루이스도 늘 어려웠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는 마음이 너무 힘들었고, [나니아 연대기]는 소설 속에 녹아든 루이스의 세계관에 경탄하며 읽었고, [순전한 기독교]와 [고통의 문제]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읽었다. 맥락을 생각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해석하는 것일까.
이 책에서 의문나는 몇 구절들을 소개하며 내 생각을 써본다. 싸우자는 것은 아니고, 개혁주의적 입장에서 생각한 것임을 밝힌다.

그 교리 가운데 우리가 예상했던 방식대로 효력을 발휘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15쪽)

자칫 교리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언짢았다. 교리와 신학을 가르쳤다면 지금 한국교회가 이렇게까지 바닥을 치고 있을까.

5세기의 신비주의자나 글도 모르는 이민자가 20세기의 신학자보다 더 깊이 하나님을 알 수도 있다.(32쪽)

아무래도 나는 신비주의를 수용할 생각이 없어서, 신비주의에는 거부반응이 든다. 신비주의자들의 확신은 성령님이 주시는 것인가? 그 확신은 성경적인가? 기도할 때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라고 말하는 경우가 왕왕 있는데, 그 확신은 성령님께서 주신 확신이 분명한가? 개인적인 기도는 은밀하게 해야 하는 것이라면, 굳이 저렇게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신 것 운운하는 이유는 믿음을 굳게 세우기 위함이 아니라면 왜 하는 걸까?

즉, 지금 현재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는 증거가 없기 때문에 우리와 관계를 맺고 계신 하나님을 떠올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과거를 되돌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소개하신 것 역시, 택하신 백성들에게 자신과 함께한 과거의 역사를 상기시키고, 그 위대한 조상들 역시 ‘시험‘과 ‘의심‘의 시간을 견뎌야 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기 위해서였다.(99쪽)

우리가 과거를 되돌아 보아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떠올리기 위해서인가? 시편에 등장하는 수많은 역사 이야기가 그런 이유였나? 단지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함이 아닐까? 과거를 돌아보면 하나님이 떠오르는 것은 맞지만, 하나님을 떠올리기 위해 과거를 계속 되돌아 본다는 것은 좀 이상한 것 같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 것도,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셨던 것이 아닌가? 과거의 역사를 상기시키려는 의도로 말씀하셨을 수는 있지만, ‘시험‘과 ‘의심‘의 시간을 견뎠던 위대한 조상들을 생각하게 하기 위한 의도였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너무 자의적인 해석인 것 같다.

제일 황당했던 주장은 이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는 본능적인 열망에 사로잡혀 그분에게 완전히 순종하고 싶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없다. 신앙 생활이란, 때로는 마치 그 모든 것이 사실인 것처럼 행하는 행동으로 이루어진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나님이 나를 무한히 사랑하시며, 선이 악을 정복할 것이고, 결국에는 그 모든 역경을 극복하게 될 거라고 가정하는 것이다. 비록 완전히 확신할 수 없고, 신령한 기운이 내려와 나를 자극하는 일이 없을지라도 말이다. 하나님이 사랑 많은 아버지인 것처럼 여기고, 그들이 정말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이웃들을 대한다.(120쪽)

모든 것이 사실인 것처럼 행하다니, 이 말의 속뜻은 나는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사실로 받아들이겠다라는 것 아닌가? 신랑은 이 부분을 듣더니 ‘세뇌‘, ‘자기기만‘이라고 했다. 믿음은 없지만 그렇게 ‘여긴다‘는 것. 내가 그렇게 살아봐서 안다. 그것은 가식이다. 가짜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다. 부모님이 목회자이시니 믿음이 있는 양, 사실인 것처럼 여기고 행동했다. 부모님이 그러했듯, 나도 다른 사람의 이목을 신경썼다. 껍데기를 부수면 아무것도 없는데. 그렇게 ‘여기면‘ 믿음이 생기나? 천만의 말씀. 믿음은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이다. 행동이 없기에 믿음이 없다고 여긴다면, 실제로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닐까? 믿음이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여겨서‘ 행동하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또 다른 죄를 짓는 것이다. 가차없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가차없어야 바닥까지 갈 수 있고, 그래야 간절해질 수 있다. 믿음은 생기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다. 믿음이 생기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하나님을 결코 ‘우연히‘ 만날 수 없다. 내가 나서서 찾지 않는 이상, 하나님을 생각나게 하는 가시적인 단서를 우연히 발견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나님을 찾아나서는 행동, 그같은 추구가 있어야만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121쪽)

내가 하나님을 찾아나서다니, 개혁주의에서는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인간에게 찾아오신 것이지, 사람이 하나님을 찾아나서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 부분은 얼핏 보면 우리의 노력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이게 바로 알미니안적 발언.). 하지만, 우리가 노력하는 것 같은 그 일들이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마음을 주셔서 되는(섭리) 일이라는 것이 개혁주의의 입장이다.
늘 소제목의 처음과 끝에 작은 글씨로 소제목과 연관 있는 글들을 실어놓는데, 155쪽 소제목 밑에 이런 글이 있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을 추구할 수 있는 정도의 암시만 주실 뿐
자신을 완전히 발견할 수 있을 정도의 충분한 것을 알려 주시지는 않는다.
거기서 더 나아가면 우리는 자유를 잃게 될 것이나
하나님은 우리의 자유를 귀하게 여기신다.
-론 한센

이 부분을 본 신랑은 이 글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며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알려고 해도 알 수 없다. 하나님이 친히 알려주셨다. ‘ 하나님이 암시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님을 완전히 발견하려고 해도 할 수 없다는 말이다. 더 나아간다면 자유를 잃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고 가정할 때 하나님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나는 결정적으로 무엇 때문에 하나님 편에 서게 되었는지를 여러 자리에서 말해 왔는데, 그것은 성경도, 기독교 서적도, 누군가의 설교도 아니었다. 내가 하나님께로 돌아선 것은 자연과 클래식 음악, 낭만적인 사랑을 통해 이 세계 속에 누군가의 선함과 은혜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162쪽)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로 이 부분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님 편에 선다는 것이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일반계시로도 충분히 하나님을 알 수 있으니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구원의 문제는 특별계시를 통해서만 가능한 문제이기에.. 여기서 얀시가 발견한 하나님은,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연, 클래식 음악, 낭만적인 사랑을 통해 하나님(신)을 만나는 것은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가능한 것이니까.

이 외에도 정말 많지만, 시간과 지면 관계상 생략한다. 적으면 적을수록 얀시와 내 신앙의 결이 다르다는 것을 확인할 뿐이었다. 3부의 하나님에 대한 내용도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성경을 너무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고, ‘4부 연합 : 전혀 다른 나와 하나님이 하나가 되다‘는 제목만 보더라도 신인합일을 이야기하고 있고(이 말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말하는 것은 아닐 테니 말이다.), 5부 성장의 3단계도 하나님을 너무 인간에 끼어맞추려고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6부 회복은 에덴으로의 회복을 말하는 것 같아 계시록의 새 나라와 새 땅이 에덴은 아닐 텐데, 라는 생각이 들어 답답했다. 이번 책도 정말 꾸역꾸역 읽었다.
20대 때에 도움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통해 얻게 된 것이 무엇이었는지 모르겠다. 거짓 확신이었을까. 모호하게 설명하며 대충 뭉뚱그려 놓음으로 모든 사람을 수용하는 것처럼 보이는 책은, 나에게는 너무 넓은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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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22 02: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4-22 07:1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