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을 하는 여자.

한 시간 남짓 되는 출근길은 여러모로 유용한 시간이다. 학생들이 많이 타기 때문에 다른 버스보다 책을 읽는 이도, 이어폰을 낀 사람도 눈에 많이 띈다. 핸드폰으로 문자를 주고 받고 게임을 하는 사람도 보이지만 대다수는 아침 일찍 일어나느라 졸린 눈을 감고 잠을 청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오늘 내 옆에 앉은 남학생은 미처 마치지 못한 리포트를 열심히 하느라 정신이 없는 와중에 감기가 들었는지 연방 코를 훌쩍인다. 남들보다 냄새, 소리에 좀 예민한 편인 나는 일부러 신경을 쓰지 않으려 눈을 감지만 일정한 박자로 훌쩍... 고개를 들면 좀 나으련만 숙제를 하느라 그러지도 못하는 눈치다.

통로를 넘어 옆에 앉은 아가씨는 자리에 앉자마자 커다란 가방을 열고 화장품을 하나씩 꺼내기 시작한다. 석 달 넘게 같은 시간대의 버스를 타다보니 대략 듣게 된 휴대전화 내용으로 모 고교에 다니는 기간제 교사임을 알게 되었다. 이 아가씨는 버스를 기다리느라 줄은 선 사람들 사이에서 앞이 지나치게 간격이 떨어지던 상관 않고 멍하니 서 있다가 새치기를 당하기 일쑤여서 뒤에서 보는 내가 조바심을 내게 만드는 스타일이다. 그런데 항상 젖은 머리로 버스에 올라타서 시작하는 일은 커다란 체크무늬 가방을 열고 기초 화장품부터 꺼내어 정성들여 화장을 하는 것이다. 아가씨가 스킨, 로션, 에센스, 영양크림을 정성들여 바르고 나니 한 십분은 훌쩍 가는 것 같다. 달리는 버스에서는 눈이 어지러워 책을 읽지도 못하고 옆의 학생이 훌쩍이는 소리에 잠을 자지도 못하는 나는 마침 옆에 앉은 아가씨의 화장하는 진지한 동작을 옆 눈으로 다 보게 되었다.

난 화장도 잘하지 않는 게으른 성격일 뿐 아니라 거울을 보는 모습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게 어색한 좀 내숭스러운 성격이여서 남이 있으면 화장실에서 거울도 슬쩍 한번 보고 마는데 아가씨는 사람이 꽉 들어찬 버스 안에서 전혀 남을 의식하지 않고 화장을 하니 내가 관심을 가져도 크게 실례는 아닐 것 같다.

기초화장을 끝낸 아가씨는 이제 메이크업 베이스를 바르느라 한 오 분, 파운데이션을 바르느라 또 오 분을 보낸다. 그 작은 얼굴에 그렇게 꼼꼼하게 바르는 파운데이션은 거의 예술의 경지이다. 버스 앞좌석 등받이에 기대어 가방위에 올려놓은 거을을 보며 얼굴 구석구석 찾아서 바르고 두드리는 그 세밀함. 마지막으로 명암을 주는 작업까지 끝내고 이제 콤팩트를 꺼내어 살짝 두드리듯 찬찬히 구석구석 눌러대기 시작한다. 상표를 보니 'CLIO'다. 처음 보는 상표라서 나도 모르게 클리오 이렇게 중얼거린다. 이제 도화지를 원하는 색으로 꼼꼼히 채운 예술가는 가방에서 하나씩 기묘한 작업도구를 꺼내어 본격적으로 화폭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곱게 밀어서 거의 보이지 않던 눈썹이 우아한 자태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달리는 차안에서 어찌 저리 날렵한 손놀림으로 가벼운 Touch를 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본격적으로 감탄하기 시작한다. 눈을 살포시 아래로 뜨고 연필로 속눈썹이 난 부분의 아이라인을 살짝 그릴 때는 난 신기(神技)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계속 가방 속으로 손은 들락거리고 그럼에 따라 아가씨의 얼굴은 세수만 한 애 띈 얼굴에서 직장 생활에 익숙한 사회인으로 변해간다. 바로 옆자리에 앉은 남학생이 불편하여 몸을 뒤채던 말던 아가씨의 다소 부산스러운 창조생활은 계속되고 난 그 큰 가방 속에서 속눈썹을 위로 올리는 집게가 나오지 않는 게 다행스러울 뿐이다.

시계는 이제 버스를 탄지 40분이 지났음을 알리고 있다. 작업은 거의 끝나가고 마무리 작업이 남았다. 입술라인 형성 작업과 입술 면을 채우는 가장 진지한 작업이 남았음을 알고 있다. 달리는 차안에서 립스틱을 바르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 사람은 다 안다. 그런데 나의 짓궂은 기대(?)와 어긋나게 아가씨는 화룡정점을 하듯 커다란 붓으로 립그로스까지 바른 후 가방을 챙기기 시작한다. 젖었던 머리도 이제 말랐고 버스에 타던 사람과 지금 옆에 앉은 사람은 너무도 달라서 새삼스럽게 그 얼굴을 쳐다보게 된다.

인조인간처럼 표정 없는 얼굴로 변한 아가씨다. 내가 그렇게 보아서 그런가? 한 시간 여 동안 저토록 정성스럽게 화장을 하는 아가씨는 마음과 머릿속을 화장하는 데는 하루에 얼마만큼의 시간을 투자할까? 반성해, 오늘도 대충 엘리베이터를 내려오며 립스틱 몇번 칠하는 너는 직장 여성으로서 예의가 없다고 말을 듣잖아? 아 난 지금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나중에 우리 아들이 저런 아가씨를 데려와서 결혼하겠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군. 내 터무니없는 상상은 짧은 시간 동안 이어진다. 아니야. 저 타입은 아닐 거야. 저 엉뚱하도록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대담함을 우리 아이는 감당하기 어려울 거야. 솔직히 말해봐.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거지 뭐. 아니 그보다도 저렇게 두꺼운 화장품으로 감춘 젊은 피부가 너무 안타깝군. 그냥 말그레한 피부가 훨씬 예쁘던데 그걸 본인은 모르나보지...  아 나도 늙었군. 별 걱정을 다하고... 이크 내릴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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