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의 경제학, 유모의 세상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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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군(大同郡) 부산면에 자기의 손자 딸을 살해한 일로 그의 할머니 되는 여자가 소관 대동서(大同署)에서 취조를 받는 중이라. (……) 이 씨(44세)는 작년 4월에 자기의 며느리가 죽자 젖 때문에 손녀 김증숙(2세)을 매달 4원씩 주기로 하고 유모를 두었던 중 생활 곤란으로 그 돈 4원을 매달 줄 수가 없자 지난 1일 오후 2시 경에 자기의 손녀를 유모의 집으로부터 자기 집으로 데리고 오다가 미리 준비한 양잿물을 물에 타 먹여 죽인 후에 부근 공동묘지에 파묻어버렸다.
― “생활난으로 손녀를 독살”, 〈동아일보〉, 1927년 7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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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잣집의 경우 유모가 상주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다수의 유모들은 자신이 젖을 먹일 아이의 집에 출근을 하는 식이었고, 부모가 유모의 집에 자신의 아이를 데리고 가기도 했다. 과거에 ‘젖동냥’이라는 ‘훈훈한’ 풍습이 있었다는 사실은 다양한 방식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젖’이야말로 사업의 밑천이었고, 그 밑천을 ‘기부’하기 위해서는 큰 결단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유모의 젖이 친모의 젖보다 좋지 않다는 말이 많았지만, 그래도 유모를 구하는 집이 줄지는 않았다. 유모를 구하는 광고를 내고, 직업소개소를 통해 유모를 구했지만 유모들은 공급보다 수요가 훨씬 더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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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서부립 인사 상답소(京城府立人事相談所)에는 최근 유모를 구해달라고 의뢰하는 사람이 많아서 현재의 의뢰받은 것만 하여도 40여 명이 부족하다는데 유모가 되고자 희망하는 사람은 인사상담소에 신청함이 좋겠다더라.
― “유모가 부족”, 〈동아일보〉, 1929년 9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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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적 관점에서 보자면 유모를 하는 데 있어서 특별한 ‘자본’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살림살이가 넉넉하지 못한 집에서 ‘부업’으로 유모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유럽의 노동자 가정에서도 남아도는 자신의 ‘젖’을 밑천 삼아 유모일을 하는 경우가 흔했다. 유모의 남편들도 자신의 부족한 수입을 보충해주는 아내의 ‘부업’을 싫어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부업이 아닌 ‘전업’으로 유모를 하는 사람들의 경우도 있었는데 이들은 정말 삶의 밑천이 오직 ‘젖’ 밖에 없는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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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식의 일을 생각하니 살려고 발버둥치는 나의 앞에는 눈물이 앞서지 않을 수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하고 고개를 돌려 눈물을 씻으며 침착한 어조로 자기의 지난 일을 추억에 넘치어 이야기 하였습니다. (……) 삼년 전 일인데 아들 낳은 지 석 달 만에 먹고 살 길이 없어서 사랑스러운 자기의 어린 아기는 남편에게 맡겨서 암죽[곡식이 밤 가루로 쓴 죽]으로 기르게 하고 돈을 벌어 남편 살리기 위하여 유모가 되었는데 젖을 빼앗긴 자기의 어린 것은 난지 다섯 달 만에 참혹한 형상으로 죽어버렸습니다. 처음에는 집에 잠시 다녀온다고 하고 틈틈이 가서 뼈만 남은 어린 것을 품에 안고 눈물 섞인 젖을 마음 졸여가며 먹이던 것이 말이 어찌하여 주인의 귀에 들어갔는지 하루는 불러놓고 하는 말이 “우리 집 아기 젖을 유모 마음대로 하려거든 일 없으니 가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쫓겨나면 세 식구가 굶어 죽지 아니하면 아니 되는 형편이니, 에라 지식은 또 낳으면 있거니와 남편이나 살려 보자하고 주인에게 다시 가서 다시는 그러지 않기를 맹세한 후, 그 후로는 그 짓도 계속하지 못하고 그와 같이 죽어버렸답니다.
― “돈벌이 하는 여성의 이면과 표면-어머니 대신으로 젖을 먹이는 인자한 젖어머니 살이”, 〈동아일보〉, 1928년 3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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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봉보부인’이라든지, 유모가 아이의 첫 스승이라든지 하는 사고방식은 통하지 않았다. 유모의 제사를 챙기고, 유모 또한 어머니라는 식의 사고방식도 사라진지 오래였다. 근대 초기 유모의 위상은 조선시대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유모는 더 이상 아이의 첫 스승도 아니었고, 또 한 명의 어머니도 아니었다. 한 아이에게 중요한 것은 ‘유전적 어머니’였고, 유모는 ‘젖어멈’으로서 기능적인 존재에 불과했으며, ‘젖’은 일종의 상품이자 ‘교환가치’를 지닌 상품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유모를 고용한 집에서는 유모의 ‘젖’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근대 사회는 유모의 젖을 단순히 ‘돈으로 교환 가능한 상품’으로 만들었고, 일부 여성들 또한 유모의 젖을 하나의 상품으로 취급했다. 그럼으로써 자신들의 위치, 즉 ‘어머니’라는 위치를 더욱 강고하게 만들려고 했다. 그렇지만 여성들은 스스로가 유모의 젖을 하나의 상품으로 취급할수록, ‘모성’을 극단적으로 강조할수록,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 인간이 아닌 ‘어머니’의 이름으로 자신을 가둘 수밖에 없었다.

*덧붙이는 말
이것으로 <사라진 직업의 역사> 연재를 마치겠습니다. 지금까지 마실 와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 반갑고, 고맙고, 기쁜 마음 오래도록 간직하겠습니다. 언젠가는 ‘전자책’에 밀려 ‘사라질지’ 모르는 ‘종이책’의 형태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오랜 시간 제 글의 ‘첫 독자’였던 ‘자음과모음’ 편집부 인문팀 식구들께도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모두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