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다른 사람과의 섹스를 꿈꾸는가 - 성 심리학으로 쓴 21세기 사랑의 기술
에스더 페렐 지음, 정지현 옮김 / 네모난정원 / 2011년 10월
평점 :
절판


 

 성(性)에 대한 담론은 무궁무진할 것이다. 먹고 자고 사랑을 나누는 세 가지 일은 가장 기본욕구로 본능에 가깝다.이것 가운데 하나라도 부족하게 되면 신체적, 정신적 건강에 결핍을 초래하게 된다. 그러나 사람이 살아가는 가운데 그 어떠한 이유로든 세 가지가 균형과 조화를 이루기만 무척 어렵다. 일과 삶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것이 현대인들이 처해 있는 상황이다. 특히 부부 사이에 사랑을 나누는 행위가 불만족스러우리 만큼 삐걱거리고 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사랑을 나누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외부적 환경과 타성에 젖어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두루뭉술하게 흘러가고 만다. 부부는 두 개의 성이 모여 한 배를 타고 인생의 항해 끝을 향해 가는 것인데, 사랑을 나누는 행위가 분명 부부의 관계를 더욱 밀착시키는 윤활제일진대 그렇지 못하는 데에 문제의 발단이 아닌가 싶다.

 

 현재 나는 오십 초반으로 신혼시절과 두 아이가 어릴 때엔 자주 스킨십도 하고 성적인 욕구도 강했다. 본능과 사랑이 강하게 작용했던 것 같다. 그런데 결혼을 하게 되면 부부라는 단어만 생각하면서 살아갈 것으로 '착각'을 했던 것일까. 부부 간에 침대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의 교환은 파라다이스의 심연을 유영하는 기분일 때도 있고, 의무감 내지 책임감에서 어쩔 수 없이 이루어지는 성적 행위도 있다. 전자가 당연히 이상적이고 멋진 성 행위이면서 부부의 금슬을 더욱 빛나게 한다. 하지만 아이가 생기고 사회적 지위, 삶의 질 등이 커다란 변화를 보이면서 먹고 자고 사랑을 나누는 행위는 마음 만큼 쉽게 굴러가지 않는다. 인간의 성 행위는 단지 번식 행위 및 심심풀이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부부 사이에 녹이 슨 성적 욕구에 윤활유를 주입하여 활기차고 윤기나는 삶의 패턴으로 전환해 나가야 하지 않을까.

 

 요즘 부부는 외벌이보다는 맞벌이가 대세다. 업무의 양, 질이 어떠하든 사회라는 격랑 속에서 헤쳐 나가야 한다. 적자생존이라는 말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을 정도로 현실에 부합하는 대목이다.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지출이 큰 교육비와 생계비, 알 수 없는 불안한 내일에 대한 걱정, 조직에서 살아 남기 위해 신경을 써야 하는 것들 등으로 몸은 움직이지 않고 머리와 내면은 초췌해 간다. 무덤덤하고 재미없는 생활의 연속이다. 게다가 놀이문화가 발달하지 않은 한국 사회에선 부부가 주말과 같은 휴일을 활용하여 부부의 금슬을 쌓아 가는 마음의 여유가 크지 않다. 내 경우엔 휴일엔 다음 주를 맞이하기 위해 부족한 수면을 채운다. 기껏해야 놀이터, 외식, 사우나에 가는 것이 고작이다. 신혼초엔 새파랗다고 할 정도로 몸과 마음이 싱싱한 야채와 같았는데, 나이가 들면서 점점 목마른 채소밭의 야채와 같이 몸과 마음은 시들시들해져 간다.

 

 심리치료 전문가로 활동 중인 에스더 페렐 저자는 현대 사회의 부부들이 심리적 스트레스로 인해 성적 행위가 점점 줄어가고 있다는 것을 다양한 성 상담자들의 사례를 들어 얘기하고 있다. 성에 대해 전문가는 아니어도 이 글을 읽다 보면 부부라는 명제와 성 행위의 근본이 무엇인가, 왜 성 행위가 줄어들고 있는가, 뜸해진 성 행위를 개선할 방법은 없는가 등을 생각하게 된다. 그 가운데 인간은 동물과 같은 야수적 성 행위가 아닌 매력과 탐닉을 추구해 가는 심리적 작용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부부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성 행위는 기분 좋은 친밀감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하고 에로틱한 욕구의 본질과 가치를 충분히 느껴야 한다. 부부라는 형식과 의례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치르는 성적 행위는 '속 빈 강정'에 다름 아닐 것이다. 또한 남자는 힘으로 여자는 사랑을 받는 것으로 전통적인 성 행위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시대 착오적인 발상이 아닐까. 성 행위를 하기 전에 서로가 이 문제에 대해 솔직하고 담백하게 의견을 나눠야 한다. 성 행위를 전제로 부부의 도리, 친밀감, 쾌락,오르가슴, 육체의 신비 등에 대해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한국 사회는 겉으로는 성 문화가 개방되어 있는 듯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다는 분위기가 강하다. 이것은 성 행위에 대한 계층 간의 인식의 차이가 크게 작용하는 듯 하다. 유교적 문화의 지배를 받은 연령층과 포스트 모더니즘으로 대변되는 젊은층들과이 느끼는 성 행위에 대한 인식은 사뭇 별세계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하고 애정을 느낀다면 속으로 느끼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몸과 마음으로 생각과 감정을 표출하는 것이 이상적인 행위라고 생각한다. 친밀감과 우정의 깊이가 깊어갈수록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사랑을 표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아이가 있고 생각하는 것이 복잡해져 가고 삶의 질이 팍팍해질수록 사랑만큼 애정을 확인하고 친밀도를 더 깊게 하는 것은 없다는 생각을 새삼 해 본다.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에서 "에로티시즘은 타인에게 다가가는 움직임이다. 이것이 에로티시즘의 본질적인 특성이다."라는 말을 새삼 되새겨 본다.

 

 요즘에는 초등학교 저학년부터 성에 대한 호기심, 욕구가 싹튼다고 한다. 이러한 호기심, 욕구가 이성을 제대로 이해하고 사랑하는 과정과 책임, 결과 등을 알아가는 데 이정표가 되어야 한다. 일선 교육현장에서든 가정에서든 이제는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성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성적 욕구, 행위도 노력과 의지, 타협이 뒤따라야 한다. 일방적이고 비도덕적인 성 행위가 빈번해질수록 사회적 건강도는 낮아질 수 밖에 없다. 몸보다 머리와 내면과의 적절한 타협과 소통을 통해 부부 간의 성 행위가 친밀감과 애정의 깊이로 전환해 갔으면 한다. 가장 편안하고 멋진 공간에서 부부만의 이상적인 에로스가 펼쳐지기를 나 또한 노력해 가련다. 부부 간의 성 행위에 앞서 가장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진리는 '신뢰'라는 것을 이제야 깨닫는다. 이것이 성적 유대감을 깊게 하는 바로미터라고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