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벌레와 메모광
정민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삶의 주름을 펴기 위해선 독서와 메모가 최고다

 

공부벌레라는 소리보다는 책벌레라는 소리가 왠지 운치있게 들린다.공부벌레라고 하면 뭔가 수단과 방법이라는 도구를 연상되기 때문이고,한국 사회에서 수험과 관련한 각종 시험에 대비하기 위해 머리를 싸매면서 악전고투를 해야 하는 순수함이 덜 담겨져 있어서이다.반면 책벌레라고 하면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 생각을 다듬고 정리하여 기록으로 남기려는 학자적 면모가 드러나기에 책벌레에 대한 이미지는 선비가 책을 읽는 풍모가 연상되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막힌 통로를 뚫어 주는 소통장이 연상되어 좋다.

 

 신혼 시절 서울 변두리 지역에 방 두 칸자리 반지하방에 살았던 적이 있다.평소 내가 보고 정리하는 책과 노트는 왠만하면 버리지를 않는다.어학을 전공했기에 어학관련 도서 및 무역학,그리고 짬짬이 읽던 대중 소설을 조그마한 책꽂이에 꽂아 놓고 시간을 내어 읽고 또 읽었다.그런데 여름날 폭우가 쏟아지면서 반지하의 하수도가 제대로 작동을 하지 못하고 역류(逆流)하는 바람에 큰 방,작은 방으로 물이 넘쳐 흘러 들었다.'아닌 밤 중에 홍두깨'라는 말이 실감났다.그날은 회사를 쉬고 팔과 다리를 걷어올리고 아내와 함께 대야,찜통으로 하루 종일 물을 퍼냈다.물에 젖은 것은 침대부터 각종 새간살이가 주가 되었는데,내가 아끼던 각종 도서까지 침수되어 너덜너덜 거렸다.살짝 스치기라도 하면 그만 아예 사라질 운명이었기에 아기 다루듯 몇 권만이라도 건져야겠다는 일념으로 한 쪽 구석에 놓고, 해가 나는 시간대에 옥상에다 비에 젖은 책을 채반에 올려 놓고 마르기를 기다리고 기다렸다.햇빛에 반사되어 젖은 책장이 한 장 한 장 마르면서 뿌듯하기만 했다.울퉁불퉁하고 얼룩이졌을 망정 뽀송뽀송한 감촉과 다시 읽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하기만 했다.다시 그러한 시절을 맞이하고 싶지는 않지만 오랜 시간 흐르고 보니 폭우로 인해 집안 전체를 물바다로 만들어 놓고,나는 나대로 비에 젖은 책들을 옥상에 말리던 시절은 잊을 수가 없다.

 

 

 쇄서(曬書)는 1년에 한두 차례 볕 좋고 바람 시원한 날 방안의 책을 모두 꺼내 바람 잘 드는 마루나 그늘에 펼쳐놓고 뽀송뽀송하게 말리는 독서인의 연중행사다. -p32

 

 나는 지금 책을 읽되 정리다운 정리를 제대로 못한 채 곧바로 서평에 들어간다.이것을 건축에 비유하자면 날림공사가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든다.쉽게 지어지는 건축물이 있는가 하면 최대의 정성과 인내를 쏟아내야 자연재해에도 끄덕이지 않는 견고한 건축물이 탄생하기 마련이다.하지만 나는 책을 읽고 감명 깊은 문장,내 삶에 이식하고 싶은 내용을 다시 되새겨 보는 시간을 많이 갖지를 못해 늘 날림공사를 하는 건축주라고 자탄한다.옛말에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이 있는데,같은 책을 몇 번이고 읽고 또 읽어 저절로 뜻을 알게 된다고 했다.또한 한 우물을 파라는 말도 의미 깊은 말이다.독서든 사회 생활이든 한 분야에 전문가로 거듭 나려면 이것 저것 섭렵하는 것보다는 자신에게 적합하고 몰두할 수 있는 분야를 정하여 외길을 쉼없이 정진해 나가는 것이 전문가로 가는 길이고 세상에 빛을 발할 수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 고전 문학 및 독서를 통한 인문학 배양에 관해 연구와 통찰력을 보여주는 정민(鄭珉) 저자는 직접 뵙지는 못했지만 차분하고 선비적인 풍모가 무척 인상적이다.이에 걸맞기라도 하듯 『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예공화국/문학동네』에 이어 이번에는 『책벌레와 메모광』을 소개하고 있다.책벌레와 메모광들의 삶의 이력은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주요 문인들에 치중하고 있다. 책과 메모에 얽힌 얘기들을 소상하게 보여 주고 있다.그들은 현대인과 다름없이 책을 읽고 메모를 하면서(메모 리딩) 생각을 정리해 나갔다.정민 저자는 뉴욕 옌칭(燕京)도서관의 고서와 장서인 그리고 추사 김정희를 전문 연구한 후지쓰카 지카시(藤塚隣)를 알게 되면서 다양한 문인들의 삶의 족적을 헤집어 갈 수가 있었고,그들이 남긴 고서 속에서 발견한 각종 메모,사연 등을 되살리고 있다.비록 고서와 장서인은 장구한 시간 속에 풍화 작용하여 헤지고 변색되고 미라와 같은 몰골로 변했지만 저자는 이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불어 넣어 주려 정성과 노력을 쏟아 부었던 흔적이 역력하다.

 

 

 이 글은 크게 두 개의 장(章)으로 나뉜다.하나는 책벌레에 관한 이야기이고 또 하나는 메모광에 관한 이야기이다.매우 단박하게 다가온다.한중일 고서에 찍힌 장서인의 역사가 한자리에 도열해 있는 듯한 경건한 분위기마저 감돈다.제본을 위해 종이들을 이어 붙이는 과정,습기.곰팡이 제거를 위한 포쇄 행사,장서인의 인장,메모,책을 빌리고 반납하지 않아 제기한 소송 케이스 등에 대한 이야기들이 예스럽고 단아한 모습으로 독자들의 시선을 집중시킨다.책을 읽다 이의.의문을 제기할 만한 사항,생각을 정리하여 다시 자신만의 것으로 체화할 만한 사항 등이 수많은 세월이 흘렀건만 선명하게 표기되어 있다.게다가 여름날 읽었던지 모기가 책 속에 압사되어 있기도 하고,만추의 서정을 음미하기라도 하듯 책갈피로 은행잎을 고이 삼았던 흔적도 보인다.또한 남에게 사례를 받고 그를 위해 책을 베껴 써주던 용서(傭書)라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근자 글쓰기를 위한 예비단계로 필사가 유행하고 있는데 필사와 용서는 행위의 목적이 다르지만 글쓰기 연습 면에서 좋은 방법이라고 여겨진다.

 

 

 조선시대의 책벌레로는 단연 청장관 이덕무이고 메모광은 다산 정약용이다.두 분은 사회적 신분이야 어떻든 평생을 수불석권했던 책벌레였고 자신만의 생각을 다듬어 체계화했던 것이 가장 큰 특장점이다.책벌레였던 이덕무는 자신의 거처에 구서재(九書齋)란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아홉 가지 독서 활동을 신념으로 삼아 실행에 옮겼던 분이다.

 

 독서(讀書),간서(看書),초서(鈔書),교서(敎書),평서(評書),저서(著書),장서(藏書),차서(借書),포서(曝書)라는 아홉 가지 활동을 했다. -p112

 

 나는 메모다운 메모가 습관화되지 못해 하다 말기를 반복하고 있다.또한 나이가 들어가면서 의외로 건망증이 잦다.신변잡기에 대한 것부터 시간 단위별 계획과 이행 점검 등을 착실하게 못해 실수,시간 낭비가 많아진다.이와는 대조적으로 메모를 습관화하여 생각을 정리하고 통합하여 자신만의 콘텐츠가 들어간 창의적 글쓰기를 하는 분들을 본받고 싶다.시간을 거슬러 조선후기에 살았던 책벌레와 메모광들은 끊임없이 메모하고 쉴새없이 적었다.메모지에 적고 책의 여백(餘白)에 적고,그것도 모라자 종이를 붙여가며 적었다.좋은 습관은 몸에 배이기 어렵지만 일단 배이게 되면 생리작용과 같이 욕망이 강렬해지고 그 힘은 막강해지리라.오늘날엔 굳이 종이와 펜이 없어도 컴퓨터와 스마트폰의 에버노트가 메모를 대신해 주고 있으니 얼마나 편리한 세상인가.타성에 젖은 자신을 일깨울 시간이다.자신만의 생각을 다듬어 콘텐츠를 만들고,글쓰는 사람으로서 창의력과 전문성을 배양하는데 메모만큼 좋은 습관은 그 어디에도 없다고 생각한다.적으면서 뇌 기능이 원활해지고 치매예방에도 좋다고 하니 여러모로 유익하기만 하다.그래서 언제 어디서든 간단 명료하게 메모를 하기로 스스로 약속했다.메모는 생각과 기억을 되짚어 주고,그 결과와 효과는 추량하기 어렵다.책을 읽는 것은 좋지만 생각과 기억을 살리고 멋진 글을 쓰기 위한 단초로 메모다운 메모를 못한 것이 내내 후회스럽다.이 후회가 기폭제가 되어 메모를 조금씩 늘려가려 한다.잘다듬은 생각과 논리는 나만의 콘텐츠가 되어 주는 동시에 창의력을 발휘하는 원천이 될 것이다.그렇게 변한 나 자신을 기대해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