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와 사도 - 위대한 군주와 잔혹한 아버지 사이, 탕평의 역설을 말한다
김수지 지음 / 인문서원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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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상적으로 정치권력은 부자(父子) 사이에도 나누지 않는,넘겨 주지 않는 법인가 보다.그만큼 권력이라는 속성이 매우 편협한 울타리와 같은 장치일 것이다.권력을 장악은 자신의 존재감을 부각시킴과 동시에 확고한 영역 유지를 기도(企圖)하는 것이다.또한 정치 권력은 갖은 술수와 음모가 난무하는 가운데 누가 힘의 역학에서 밀리지 않고 오래도록 버텨 나가느냐도 관건이다.나는 정치 권력에 있는 사람들의 생존방식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일종의 '도박(睹博)'과 같이 요행수를 노리는 사람들이 많다고 생각한다.특히 정치 권력이 사회를 주름잡고 있는 세태 속에서는 정치 권력을 쥐기 위해 건곤일척을 하는 정치생들이 꽤 많다.

 

 부자간에도 나누지 않는다는 정치 권력의 속성을 단적으로 잘 보여 주는 예는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임은 부정할 수가 없다.일반인들의 상식을 뛰어 넘는 비정하기 그지 없는 부 영조와 아들 사도는 살얼음판을 걷는 형국이나 다름 없었다.그것은 영조의 태생 과정과 당대 사회적 배경(당파 싸움 등),이복 형이면서 선대왕인 경종의 죽음의 배후는 영조가 즉위하면서 심리적으로 평탄하지 않았을리라.영조는 보기 드물게 83세라는 장수(長壽)에 52년간 한 시대를 풍미(風靡)했던 왕이었다.영조는 탕평책이라는 포용 정책을 기치로 내걸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한 위장전술이었다는 생각도 많이 든다.그는 기본적으로 노론(老論)의 지지를 등에 업고 소론(少論) 포용 탕평책까지 수용하면서 다양한 정책을 실현해 갔다.

 

 무수리 출신 숙빈 최씨와 숙종 사이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진 영조는 항설에는 친부가 다른 사람이고 선대왕이며 이복형인 경종을 독살한 것으로 의심을 받고 있다.경종의 짧은 치세,죽음을 맞이하고 노론의 두터운 지지에 의해 임금이 된 영조는 맏아들 효장세자를 재위 4년(효장세자 10세)만에 잃고 빈자리를 영조가 이어받은 셈이다.(연잉군으로) 숙종부터 영조,정조에 이르는 사회적 당파 싸움과 관련한 일련의 주요 사건(환국,처분,독대,옥사,난(亂),옥사,화변)은 조선 사회를 이끌어 가던 위정자들의 일대 도박과도 같은 암투가 끊이지를 않았다.특히 척신(戚臣)들에 의한 정치 연출은 예나 지금이나 해소해야 할 중대 사안이 아닐 수가 없다.

 

 사도세자는 15세에 영조의 대리청정 임무를 받고 국정의 전면에 나서게 된다.정치적 역량이 없는 사도세자는 내외적으로 바람 잘 날이 없었던 정치 환경에 놓여 있었다.특히 사도에 대한 중상모략과 깎아 내리기 등은 그에겐 커다란 시련이고 굴욕이었다.부왕 영조는 무신난,균역법 등의 각종 정치 실패에 따라 탕평(湯平)을 내걸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반대파인 소론(少論)을 의식한 정치적 꼼수에 지나지 않았다.사도세자는 정치적 실험대에 놓여 있었던 유약한 존재였다.영조의 눈과 귀에는 그를 모함하고 허위 고자질이 끊이지를 않았다.나주 벽서 사건,처가인 홍씨 집안의 권력잡기,나경언의 고변 등으로 영조는 사도세자를 차기 왕으로 옹립하는데 만족을 하지 못했다.문제는 영조의 뇌신경계에 있었다.일종의 정신분열증에 의한 왕세자 죽이기였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뒤주에 집어 넣어 죽이고자 했다.절박한 심정으로 살고 싶고,살려 달라는 세손(정조)의 울부짖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죽여야 속이 풀였던 것 같다.권력의 틈바구니 속에서 영조가 택한 세자의 죽음은 억울하기만 하다.가혹한 영조,끈질긴 신하,무력한 세자로 이어지면서 세자는 불여귀가 되었다.세손 정조는 친부를 죽인 세력들에겐 복수로 응하지 않고 스스로 자백을 얻어내면서 정치 권력을 유지하려고 했다.영조의 잘못된 판단에 의해 희생양이 되어 버린 사도세자의 진혼곡을 듣는다.권불십년처럼 정치 권력은 비정하고 무상하기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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