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왕후
함영이 지음 / 말글빛냄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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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 지도자가 부각되고 있는 시점에서 과거 역사 속의 여성 지도자의 뒤안길을 살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실록과 사료에 의한 것일지라도 한 인물에 대한 평가는 매우 조심스럽고 중립적인 시선으로 접근해야 마땅하다.특히 남존여비와 같은 남성 위주의 조선시대에 여성이 국사를 일임했다는 것은 파격적인 행보로 다가올 수도 있다.조선 27대 임금 가운데 비록 여왕은 존재하지는 않았지만 임금 곁에서 반려(伴侶)로서 정사에 대한 막후 교섭,관여,조언,정책 만들기 등은 얼마든지 가능했다.독불장군이라는 말이 있듯 든든하고 아낌없는 부군의 신임과 격려에 힘입어 정치적 감각을 발휘했을 것이다.

 

 나는 조선시대 역사에 대한 큰 물줄기에서 벗어나 지류(支流)에서 벌어졌던 사안들에 대해 나름 관심을 갖고 있다.이러한 참에 조선시대 최초의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한 여성을 만나게 되었다.그 인물은 바로 세조의 정비, 정희왕후(貞熹王后)였다.놀라운 것은 배운 바가 없어 까막눈에 일자무식이지만 부군 세조 곁에서 터득한 정치적 감각은 훗날 어린 성종을 대신하여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정확하게 말하면 청정(聽政)의 정치를 행사했다고 본다.그 기간은 성종 즉위(1469)년부터 1476년까지 청정을 했다.어찌된 일인지 정희왕후가 청정을 할 시기엔 조선의 정정(政情)과 사회상은 비료적 평온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부군 세조는 정희왕후에게 깊은 신뢰와 애정이 컸기에 그녀의 척족들에게 내린 벼슬도 정비례했던 것이다.청정에 들어가고 나올 때에 정희왕후는 늘 세조의 힘을 빌렸던 것으로 보인다.

 

 군주이며 부군이었던 세조는 조카 단종을 영월로 유배시킨 장본인이며 이 사건에는 정희왕후의 입김이 작용했던 것으로 보이고,단종의 정비 정순왕후에겐 늘 미안한 마음이 가득했다고 한다.또 하나 정희왕후에 대한 실책은 세조의 계비(繼妃)이며 연산군의 생모였던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내리게 하여 연산군이 폭정을 일삼는 도화선이 되었던 것이다.나아가 공신과의 결탁,부패척결 미온 및 외척 관리 미흡 등이 있다.반면 그녀는 청정을 시작하면서 정치가답게 정사를 펼쳤다.군주로서 독단을 내릴 때도 있고 원상(院相)들의 수렴을 거쳐 대왕대비에게 아뢰게 하여 정책결정을 해 나갔다.국사를 훈구세력들과 자주 의논하고 권력의 안정을 도모하고 신진세력을 키워 나가는 작전을 펼쳤다.청정 첫 행보로 민생을 살피는데 역점을 두었다.호패법폐지,경제 살리기 측면에서 양잠업 장려 등이 있다.청정을 마치고 성종이 치세하던 시절엔 경국대전이 완성되기도 했다.

 

 정희왕후는 2남 1녀를 두었다.요절한 맏이인 의경세자(懿敬世子),족질로 고생했던 예종(睿宗,14개월 치세)이 일찍 세상을 떠나면서 그녀에겐 현덕왕후(단종의 어머니)의 저주,젊은 임금의 건강악화로 권력의 공백이 생길 염려가 있고,세조의 왕위 찬탈에 대한 저주를 온몸으로 감싸면서,이 모든 것을 자신의 운명으로 여겼다.길지 않은 기간 정치 기간 중 정희왕후의 정치력은 시험대에 오를 수 밖에 없었다.벼슬과 잇속을 챙기려는 공신들의 아귀다툼,부패와 비리,척족들 관리는 그녀에게 한계상황이었을 것이다.요즘말로 하면 민생 위주의 경제 살리기,과거 정권과의 화해 등을 구사하면서 밝은 미래를 꿈꾸었을지도 모른다.세조의 정비이면서 조선시대 첫 청정을 했던 정희왕후라는 인물을 인식하는 시간을 갖게 되어 다행스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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