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정, 정명공주 - 빛나는 다스림으로 혼란의 시대를 밝혀라
신명호 지음 / 생각정거장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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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사 시간에 미처 접하지 못하고 배우지 못했던 부분이 세상에 나오게 되면 시선과 이목을 집중케 한다.또한 그렇게 발굴되고 소개되는 사료와 인물,사건들을 접하면서 당대 정치,사회상을 머리 속에 새롭게 그려가게 된다.역사와 관련한 이야기는 중립적인 입장을 취해야 하고 객관성을 띠어야 하기에 독자인 나로서는 저자가 전하려는 바를 놓치지 않으려 애를 쓴다.새롭게 세상에 소개되는,베일에 가려졌던 새로운 인물 정명(貞明)공주는 풍전등화와 같았던 시간과 세월을 용케 견디어 내면서 보기 드물게 83세까지 살았던 사람이다.그렇다면 정명공주는 어떠한 인물이었을까.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선조는 의주로 몽진을 가게 되고 그를 대신하여 정사를 펼치기도 했던 광해군 사이에 왕위 계승 문제에 의혹과 균열이 생기면서 궁궐의 암투는 서서이 급물살을 타게 된다.선조는 제 1왕비 의인(懿仁)왕후가 아기를 갖지 못하고 세상을 뜨고 제 2왕비인 인목(仁穆)대비를 왕비로 맞이하게 된다.선조에겐 대비 외에 공빈(共嬪) 김씨와 인빈(仁嬪) 김씨라는 두 후궁이 있었다.19세에 왕비가 된 인목대비는 딸 정명공주와 아들 영창(永昌)대군을 낳게 된다.특히 후궁에게서 낳은 광해군은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인목대비가 낳은 영창대군을 적장자 원칙에 의해 차기 왕위로 옹립하려는 분위기를 읽으면서 정명공주와 영창대군,인목대비 제거를 시도하려 한다.선조는 52세와 55세에 정명공주와 영창대군을 낳지만 이미 정사를 치르지 못할 정도로 심신이 쇠약해지면서 세상을 떠나게 된다.선조는 혼미한 상태에서 유교칠신에게 영창을 부탁한다.광해군은 왕으로 즉위하지만 인목대비 측근들의 세력이 커질까 우려한 나머지 먼저 영창대군을 강화도로 위리안치한다.

 

 신명호 작가가 쓴 《화정,정명공주》는 임진왜란에 의해 임금의 정전이 불타면서 정릉동 임시 행궁에서 벌어지던 왕궁의 권력 암투를 묘사하고 있다.참고로 이 글은 《계축일기》를 핵심 자료로 하고 《광해군일기》와 《추안급국안》을 보조 자료로 하여 정명공주의 인생을 살피고 있다.

 

 영창 추대 세력을 축출하는 계축옥사(1613년)가 발발하고 사건과 깊게 관련한 역모인 서양갑,김제남 등이 체포되고,인목대비,정명공주는 유릉(裕陵 의인왕후) 저주조사차 체포된다.놀라운 점은 정명과 영창이 봉작 후의 처우가 대단했다.영창을 위리안치 하면서 그가 받았던 혜택들은 광해군에게 고스란히 돌아가게 되었다.광해군에게 선조는 생각하기도 싫은 왕이고 아버지였다.살아서는 권력으로 자신을 짓누르고 죽기 직전에는 유언장으로 자신을 위협했으니 인목대비 및 친혈육 및 척신들은 저주의 대상이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인목대비가 대비가 된 후,선조 및 의인왕후의 지밀궁녀들을 측근으로 받게 된다.자신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속셈이었다.광해군이 인목대비보다 아홉살이나 많지만 대비는 어디까지나 대비인 법.허나 유릉 저주 사건이 일파만파 번지면서 인목대비 및 정명공주 측근들이 줄줄이 몰살,고문을 받고 죽게 된다.게다가 인목대비와 정명공주를 배신했던 공노비들까지 있었고 영창대군까지 의문의 죽음을 당하게 되었으니 인목대비에겐 누구를 믿고 살아야만 했단 말인가.정명공주만큼은 자신이 끝까지 보호하고 은둔시키기 위해 죽은 사람으로 널리 알리기도 했다.

 

 

 

 

 이러한 일련의 궁궐 권력 암투로 인해 정명공주와 인목대비는 각각 서인(庶人,평민) 및 후궁으로 강등된다.인목대비가 폐서인이 되기 위한 죄목 10가지에 대한 요청과 상소는 영창대군 때보다 더 치밀하고 시간까지 길게 잡았다.이렇게 정명공주는 왕비인 어머니가 후궁으로 강등되고 자신은 폐서인이 되면서 죽는 날까지 숨 한 번 크게 쉬지 못하고 한많은 세월을 감내해야 했다.그녀가 쓴 화정(華政 빛나게 다스려라)은 서궁 유폐 시절의 작품으로 남성적인 기상을 떠오르게 한다.광해군이 인목대비를 역모죄로 유폐시키면서 효보다 충을 더 강조했다.광해군 자신에게 불충을 저질렀던 이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처단했으며,그것이 민심이라고 확신했다. 1623년 야밤에 거사된 인조반정(능양군에 의해 실시)은 옥새를 서궁의 인목대비에게 올리고 도망치던 광해군은 은신처인 의원의 친척(정담수)가 광해군의 소재지를 밀고하면서 인조반정은 무혈 승리하게 된다.인목대비의 철저한 복수극이 완성되었던 것이다.이로써 인목대비는 서궁에서 대비로,영창대군과 정명 공주는 각각 대군과 공주로 복귀했다.공주의 재산도 환급되었다.인목대비의 친정 부모 모두 신원(伸寃)되고 재산은 환급되었다.정명공주는 인조반정 당시 21세로 과년을 훨씬 넘긴 나이로 남편감은 연하인 18세 홍주원으로 노론 명문가 풍산 홍씨 출신이다.당시 정명공주의 신혼 살림집(안국동)은 궁궐처럼 거대하고 으리으리했다고 한다.이것은 인조가 인목대비와 정명공주를 극진히 배려했기 때문이다.정명공주의 삶은 파란만장 그 자체이다.흥미로운 점은 남편 홍주원의 후손들이 잘 되었다는 것이다.정조 시절의 혜경궁 홍씨를 비롯하여 홍봉한,홍인한이 돈녕보첩(敦寧譜牒)에 잘 소장되어 있다.정명공주의 죽음은 《숙종실록》 16권 11년(1685년)에 기재되어 있다.생과 사의 경계에서 정명공주는 지난 시절을 어떻게 회고하면서 살아 갔을까.한 여인의 굴절된 삶과 권력의 무상함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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