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독
박완서 지음, 민병일 사진 / 열림원 / 2014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박완서 작가 서거하고 유작 및 개정판이 간간이 출간되고 있다.서랍장 속에 꼭꼭 숨겨 놓은 미필작이든 작가를 추모하기 위해 색다르게 탄생되고 있는 개정판이든 읽어 가다 보면 작가의 내면세계와 삶의 변주곡이 잔잔하게 물결친다.한국전쟁의 후유증을 그린 글부터 서거하기 직전까지 내놓은 작품들이 삶의 현장을 목도한 것들을 소재로 삼아 박완서 작가 특유의 입담과 필치로 전개되는 글들이 주가 되었다.소설,수필과 같은 삶의 다채로운 무늬를 한 폭의 수채화를 연상하게 하면서 삶의 진수를 맛보기 위한 마중물과 같은 소재거리도 내게는 오래 인상에 남고 있다.

 

 

 

  작가가 남긴 몇 편의 글들을 접하면서 '소풍 같은 날' 같은 언어를 제법 접했다.열심히 일한 자 모든 것을 내려 놓고 어디론가 떠나라라는 연상이 들 정도로 소풍,여행은 무거운 심신을 내려 놓고 다가오는 삶의 부족한 분(分)을 채우기 위한 활력소가 되기도 한다.그래서 소풍과 같은 나그네 길은 모든 것이 신비롭고 자유스러우며 (어린 아이가)사물과 사람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면서 소묘해 가는 과정은 아닐까 한다.묵직하게 어깨를 짓누르는 삶의 무게도,번잡함과 불안한 삶 속에서 타국으로 안내해 주는 나그네의 언어는 상큼하게 개인 맑은 창공을 응시하는 것과 같다.

 

 

 

 

 노래의 날개 위에 피어나던 선생님의 박꽃 같은 미소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까? 에테르는 '항상 빛나는 것'을 뜻하는데,'거기로부터 사라질 리가 없는 하늘의 빛'을 의미한다. - 사진작가 민병일의 작가에 대한 그리움과 찬사(讚辭) -

 

 박완서 작가는 소리내어 웃는 모습보다는 수줍은 듯 하얀 박(조롱박)꽃과 같은 자태를 띠면서 윗니가 아랫니를 감싸는 듯 활짝 미소를 짓는 모습은 자애로운 어머니의 모습과 같아서인지 글귀들도 생활 속에서 직조된 것들이 많다.일상의 언어를 담담하고 현실감있게 풀어내는 박완서 작가는 당시 칠십을 앞두고 고지(高地)로 불리는 티베트와 네팔의 모습을 민병일 사진작가가 사진으로 담고 여정의 후일담을 기록과 기억으로 잘 묘사하고 있다.

 

 

 

 

 티베트는 맑게 개인 청명한 가을날과 같이 푸르기만 하다.푸르름이 시린 쪽빛으로 변해 사람의 눈까지 빨려 가게 할 정도로 우주의 시원인 태고의 신비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1990년대 중,후반의 여행기로서 20년이 좀 미치는 세월이기에 지금 티베트와 네팔의 모습은 산업화와 도시화의 물질문명이 침투되고 있지는 않을까 한다.라마교는 면면히 내려오는 티베트의 신성한 신앙이면서 죽기 전 포탈라궁(宮)을 직접 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한다.익히 알고 있겠지만 그들은 라마교를 몸과 마음으로 숭상하는 것 같다.오체투지(五體投地)를 몸소 행한다.티베트를 최초로 통일한 토번(吐蕃)왕국의 송첸캄포 왕이 왕비 문성 공주가 당나라로부터 가져온 석가모니불을 모시기 위해 창건했고,왕의 사후 공주가 선왕을 기려 창건했다고도 하는 절이 조캉 사원이다.신비스럽고 경외스럽기까지 한 티베트의 불교 사원이 가장 핵심 여정이 아닐까 한다.

 

 

 

 

 버스를 타고 여행지를 경과하는 과정에서 티베트 사람들의 일상은 매우 단조롭고 소박하기만 하다.야크가 농작의 일등 공신이며 야크가 죽으면 버리는 것이 없다고 한다.야크가 배설하는 분(糞)은 짓이겨 크기를 정해 햇빛에 말려 땔감으로 사용한다고 한다.해발 5천미터 이상에서 자라는 꽃의 강인한 생명력과 아기자기한 자태는 감탄의 연발이다.'연꽃 속의 보석'이라는 '옴마니반메훔'이 불교의 지혜로서 티베트에는 불교적 색채가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다.이렇게 태초의 신비를 간직하고 있는 티베트와 같은 천혜의 풍광을 도시화,산업화로 짓이긴다고 한다면 이 행위는 신성모독(神聖冒瀆)이 아닐 수가 없다!또한 티베트 사람은 달라이 라마를 정신적 지주로서 신성시하고 있다.

 

 

 

 

 티베트를 떠나 네팔로 진입하게 되면 티베트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감각에 휩싸이게 된다.네팔 북쪽은 히말라야 산맥과 가깝고 남쪽은 습지 및 열대우림으로서 인종은 인도인과 흡사하다.네팔은 인도와 같이 사후 윤회사상을 믿으며 부타의 가르침이 강하게 지배하고 있다.눈동자 절로 불리는 스와얌부나트 사원은 중생의 삶을 멀찌감치서 관장하고 있는 것과 같은 상징성을 띠고 있다.한국 물가와는 절대 비교할 수 없는 낮은 가격,화장의 현장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죽어 한 줌 재가 되고 마는 덧없는 인생이라는 허무감이다.네팔에서는 포카라 가야 히말라야의 설산을 제대로 완상할 수가 있다.마치 알프스 몽블랑을 연상케 하면서 산맥 아래는 목가적인 전원 풍경이 파노라마와 같이 펼쳐진다.

 

 

 

 

 티베트,네팔 경제소득 면에서는 한국보다는 낫지만 그들이 느끼는 삶의 질은 한국인보다는 높다는 것을 마음으로 느꼈다.수분지족(守分之足)이 바로 그것이다.다만 절대 빈곤층이 사회적 지원을 받지 못하다 보니 걸인과 노숙자들이 많은 것도 눈에 띄는 대목이다.또한 위생시설,청결의식이 낮아 아직도 머리와 몸 안에서 이를 잡는 풍경은 1960,70년대를 연상케 한다.낯설지만 신비스럽고 때묻지 않은 티베트,네팔에서 배울 점은 인위적인 것보다는 자연스러운 것이었고,인간과 자연이 물질문명을 숭배한 나머지 다가올 재앙을 초래하고 있다는 어리석음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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