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준이 답이다 - 한일협정 50년, 실종된 한일관계
허남정 지음 / 씽크스마트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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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철강왕으로 불리워지는 박태준에 대해서는 이번 도서를 통해 구체적이고 제대로 알게 되었다.경제개발계획이 수립되면서 입국(立國) 차원에서 중화학공업인 포항제철을 세운 분이 박태준이다.1968년 포항제철이 세워지고 정치계에 입문하기까지 그는 철강무역을 통해 대일 흑자를 이룩했고 세계적인 수준의 광양제철소를 한국의 기술로 건설했던 분이다.그가 한일경제 협력의 막후교섭 일명 실질적인 로비스트 역할을 했다고 본다.이것이 '박태준식 극일(克日)이다.

 

 그 어느 때보다도 한.일관계가 냉랭하고 경색된 분위기가 지속되고 있다.일본은 러시아에 빼앗긴 홋카이도 동북쪽 북방영토 4개 섬 반환을 비롯하여 독도,센카쿠 열도에 대한 영토분쟁을 일삼고 있으며,과거 제국주의 시대에 저질렀던 위안부 문제,(그들의 정신적 상징인)일본 총리들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로 이웃 국가인 한국,중국 그외 일제로부터 피해를 입었던 국가들에게 정신적,심리적 상처와 고통을 안겨 주고 있다.이러한 가운데 한국이 지난 시절 일본으로부터 받았던 정신적,물질적 피해는 심대하기만 하다.일본 정부가 2011년 일본 동북지방의 쓰나미 피해와 원전사고에 따른 방사능 유출로 피폐한 일본인의 민심을 외부로 돌리려 하는 의도도 다분한 가운데,작금 아베 총리의 대한(對韓)정책은 초강경일변도이고 한국 정부 역시 받아내야 할 것만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박태준 인물에 대한 개인적인 이미지는 약간 어눌한 언변에 청렴결백하다는 것이다.2011년 세모 무렵 작고하면서 매체를 통해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알게 되었다.그가 갖고 있는 재산을 전부 청암재단에서 관리하고 가족에게는 일푼 어치도 상속을 하지 않았다고 하니,그 의미와 가치는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가 없다.박태준은 육사 6기 출신으로 육군 소장으로 예편을 하고,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 이후 한일경제협력은 한국의 산업화에 기여했는데,한일경제협력의 막후 교섭은 박태준이 길을 낸 것이다.물론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 및 신임에 의해 포철을 세우고 일본으로부터는 자금과 선진기술을 도입했던 것으로 보여진다.그는 한일경제협력에 있어 일본 총리를 비롯하여 고위급 인사들과의 막역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우정과 실리를 챙겼던 것이다.

 

 한일국교 정상화 당시 일본으로부터 받은 경제적 보상은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경제후진국이었던 한국의 중화학공업의 발전을 위해 자금과 기술을 전수한 점을 도외시하고 지난 시절 입었던 정신적 피해에 대한 요구만을 일삼고 있는 것에 대해 일본 정부 및 우익단체는 더욱 핏대를 내세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다.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들이었던 일본,독일,이탈리아를 놓고 볼 때 일본 정부는 이웃나라를 대하는 자세와 태도가 매우 비겁하고 온당하지 못하기만 하다.그들은 겉으로는 한일관계가 미래발전을 위해 전향적으로 나서자고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할 것들을 왜곡,조작,기만하면서 상처와 고통을 받았던 한국 국민들에게 '쿨'한 사과를 못하는 것이다.이것이 일본 섬나라 근성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갖게 한다. 

 

 박태준은 한일경제협력과 미래지향적인 동반관계를 위해 수많은 일본의 지인들을 만나 (한국정부를 대표하여) 막후 교섭을 진행해 왔다.그가 진행해 왔던 일본 고위급 관료 및 인사들과 만남과 진지한 교섭은 중화학공업의 불모지였던 한국 경제를 회생시키고 부국으로 가는 디딤돌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그는 최고의 엘리트 교육를 거쳐 청렴과 원칙을 고수하면서 실용주의를 견지했다.침착 중후하면서 인간관계,정열적인 장인정신,애국사상을 높게 본받을 만하다.또한 한일 과거사 문제에 대해 그는 일본은 악이라는 고정관념이 역사적 진실을 찾는 노력과 깊이 있는 성찰을 방해한다고 지적하고 있다.일본에게도 한국인의 DNA에 없는 장점이 많이 있다.그 장점을 십분활용하면서 협력 가능성이 무한한 미래를 위해 일본과 협력하는 '실용적 한일 관계' 강조하기도 했다.나아가 한일 국교 정상화 40주년을 맞이하여 그는 기조강연을 통해 "한국인의 언어 정서에서 친일의 친(親)이 '사이좋다'라는 본래의 뜻을 회복할 때 한일 수교는 '절친한 친구 관계'로 완성될 것이라고 말했다.이러한 관계가 정착이 되려면 관건은 일본이 과거의 진실을 직시하는 진실된 역사 인식과 역사 교육에 달려 있다고도 했다.

 

 박태준은 친일파라기 보다는 지일파에 가깝다.그는 수많은 일본 출장길에 늘 최신 일본 서적을 탐독하면서 일본을 깊이있게 알려고 노력했다.에도시대의 사무라이 정신은 실용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그의 직업정신과 대인관계는 감정에 치우치기 보다는 이성과 논리에 입각한 실용정신에 바탕을 두고 있다.그는 죽음을 맞이하면서 그의 재산을 가족에게 상속하지 않고 재단에 남겼던 것이다.기업인으로서 흔치 않은 노블리스 오블리제 몸소 실천했던 분이다.한일관계가 냉랭하고 경색한 관계가 지속되고 한일국교 정상화 50주년에 즈음한 시기에 박태준과 같은 인물이 등장하여 꼬일대로 꼬인 한일관계를 정상 가동해 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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