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 평전
안도현 지음 / 다산책방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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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8년 월북작가 및 그들의 작품이 해금(解禁)되면서 월북작가에 대한 재평가 및 작품에 대한 소개가 줄을 잇고 있다.해방후 이념과 사상에 의해 남한에서 북한으로 넘어 갔다든지 남으로 내려 오고 싶어도 38선이 가로 막혀 내려 올 수 없었던 작가들도 있다.월북작가들은 주로 일제 강점기에 문인으로서 빛을 발휘하던 분들이고 작가와 작품에 따라서는 ~파(派) 및 계보가 형성되기도 했다.학창시절 국어 교과서에서는 소개가 되지 않아 모르고 지냈던 작가들의 삶과 작품에 대해 늦게나마 접할 수가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그중에 시인이면서 대동아전쟁으로 일본군에 징집을 피해 중국 신징(창춘)에서 해방 직전까지 은둔생활을 하고,해방이 되면서 소련에 의해 끊겨진 경의선으로 인해 더이상 남으로 내려 오지 못하고 북한에서 생의 후반기를 살다간 백석시인의 삶과 작품 세계를 안도현시인은 백석시인에 대해 집중 조명하고 있다.사회에서 배제된 소외되고 힘없는 계층들에 대한 연민의식을 잘 그리고 있는 안도현시인의 시는 백석시인의 시세계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 만큼 백석시인에 대한 삶과 시세계에 대해 누구보다도 아낌없는 예찬을 펼쳐 놓고 있다.

 

 백석시인은 1912년 평북 정주에서 태어나 1996년 양강도 삼수 관평리에서 생을 마감하게 된다.평북 정주는 민족주의 성향이 짙은 고장으로 오산학교를 비롯하여 애국지사,사회인사를 많이 배출한 곳이다.조만식선생을 비롯하여 이승훈,함석헌선생,한경직 목사,시인 김억과 김소월,화가 이중섭 등이 오산학교 출신이면서 정주와 인연이 깊다.백석은 1930년 <조선일보> 신년현상문예에「그 모母와 아들」로 당선이 된다.1929년 광주학생의거에 영향을 받은 오산학교 학생들은 1930년 연초 학생들의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게 되는데,백석은 당시 <동아일보> 정주지국장을 하던 방응모의 지원하에 일본 아오야마학원 영어사범과에 입학을 하게 된다.일본 유학 중에 백석은 이시카와 다쿠보쿠의 시를 탐독하면서 그를 정신적 스승으로 삼는다.그러면서 백석은 자신만의 시세계를 구축해 나가는데 주로 향토색이 짙은 고향의 산천과 추억을 그린 시가 주종을 이룬다.그는 조선일보 교정부에 입사를 하게 되고 백석,신현중,허준이 3인방을 형성하면서 청춘의 낭만을 만끽하게 된다.당시 백석은 박경련여인을 연모하다 보니 신문사 업무 일로 남해쪽을 탐방하다 박경련과의 만남을 갈구하지만 신현중에게 박경련을 빼앗기고 만다.박경련의 부모는 백석과 신현중의 집안과 신분을 비교하여 신현중에게 딸을 주었던 것 같다.

 

 백석이 시인으로서 전성기는 1935년부터 1941년까지 7년 동안이 된다고 한다.시집 《사슴을 발표하면서 격찬과 비판이 엇갈리지만 비판은 오히려 백석만의 시세계를 공고히 다져 나가는 계기가 된다.다니던 조선일보사를 사직하고 영어교사가 꿈이었던 백석은 함흥의 영생고보에 영어교사로 부임하는 한편 백석은 외국어에 관심이 많아 러시아어도 영어 못지 않은 수준으로 끌어 올린다.한참 피가 끓어 오르는 청춘시기에 연모하던 박경련마저 빼앗기는 꼴이 되니 상심이 컸지만,권번(券番)출신인 자야(김영한)와 가까워지면서 1년 정도의 동거생활을 하게 된다.1930년대 문인들이 하나 둘씩 소개가 되고 있는데,이미 알고 있는 작가도 있고 생소한 작가도 있다.모두(冒頭)에서도 말했듯 이념과 사상에 의해 분단된 상황에서 납북 인사 및 북한에 잔류한 작가들에 대해서는 반공을 국시로 삼았던 해방 이후부터 해금시기까지 꽁꽁 얼어붙은 동면의 시기였다.1930년대 백석은 여류 시인들과도 자주 어울린다.최정희,모윤숙,노천명이다.그러나 일제는 대동아공영권의 차원에서 조선의 젊은이들을 강제 징집을 하던 시절이라,백석은 결단코 일본군 앞잡이는 하지 않겠다는 각오하에 자야와의 단꿈을 잠시 접고 중국 신징(창춘)으로 몸을 옮긴다.그곳에서 대략 5년 정도를 보내게 되는데 시쓰기는 거의 접고 세관원과 같은 일을 하면서 해방이 될 날만을 기다린다.

 

 백석의 삶의 후반기라고 할 수 있는 북한 생활은 찬밥 신세와 별반 다름없다.월북한 작가들과의 모임 및 토론 등이 있었지만 백석은 러시아 문학 작품의 번역에 몰입한다.백석은 고리키의 작품에 심취했던 것으로 보이며,그가 남긴 동시는 고작 4편 정도이다.아동문학과 관련하여 백석만의 동시세계를 펼쳐 나가고자 했지만 북한에서의 글쓰기도 주체사상에 어긋난다는 명분하에 백석은 개마고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삼수갑산 관평리에서 생을 마감하는 날까지 농장(염소,양 키우기)일을 하게 된다.북한식 하방운동이 아닐 수가 없다.또한 남북 분단이 낳은 문학사의 비극이 아닐 수가 없다.서울에서 1년 정도 동거했던 자야(김영한)은 후일 산자락에 위치한 요정을 법정스님에게 시주하면서 요정은 길상사로 탈바꿈하게 된다.평범한 농민의 신분으로 돌아간 백석은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간 작가였다.그는 친근한 평안도 방언과 토속적인 음식을 주재료로 시쓰기를 일관하고 있다.비록 평안도 방언이 주는 어감은 익숙하지는 않지만 백석시인이 생전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어린시절 자주 먹던 음식들이 그에게는 잊을 수 없는 기억과 추억으로 살아 있었을 것이다.나아가 그의 시세계는 백석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혼(魂)이 살아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아울러 안도현작가는 백석의 삶과 작품을 평하려 최대한의 자료와 증언을 생생하게 되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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