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스크랩 - 1980년대를 추억하며 비채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선 5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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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문.잡지 따위에서 필요한 글이나 사진을 오리는 것을 스크랩이라고 한다.내 경우 스크랩에 대한 단상은 우선 귀찮고 번거롭다는 생각과 시간,노력을 기울이는 정신 노동이라는 선입견이 많아 꾸준하게 하지를 못했다.자발적이고 좋아서 했던 경험보다는 취업 준비를 하기 위해 모신문 사설을 거의 매일 복사하여 모았던 적이 있다.대학 4학년 시절 수업외에는 거의 취업 준비로 너나 나나 분주하기만 했다.모두가 숨죽여 취업준비에 여념이 없다 보니 동창들이 모두가 경쟁상대로 보이면서 각박하기만 했다.미래의 생계를 준비해야 하는 시기에서 필요한 부분은 뭐든 섭렵해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마음 속에 자리 잡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1980년대 초반 대학에 들어가 1980년대 말에 대학을 졸업한 나에게 대학시절은 달콤하고 설레이고 낭만이 가득찼던 시기이기도 했던 반면,찌든 자취 생활을 감내해야 하는 몸과 마음이 혼돈스럽기도 했다.시간과 세월이 흐르고 나니 '그런 시절도 있었구나'하면서 꼭꼭 묻어 놓은 그 시절의 기억과 추억을 새롭게 끄집어 낼 수 있다는 점에서 삶은 늘 앞으로 나아가고 시들지 않은 생명력에 스스로 안위를 느꼈다.1980년대 초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 온 나는 서울의 모든 모습이 대명천지와 같이 넓고 밝은 것이 꿈만 같았다.내가 다닌 대학이 비교적 서울 중심권이 아니어서인지 아늑하고 사람의 온기가 어느 정도는 살아 있어 다행스러웠다.일명 빨간 벽돌,빨간 기와 일색인 문화주택가와 꼬불꼬불 뱀,지렁이와 같이 길게 이어지는 골목길을 지나 싸고 맛있으며 덤이 존재했던 재래식 시장의 상인들의 여유와 넉넉함이 묻어나기도 했다.

 

 내가 1980년대 직.간접적으로 겪었던 사건.사고의 기억은 셀 수 없을 정도이다.우선 가장 큰 사건은 정치인들의 버마 아웅산 묘지 시한폭탄 폭발사고와 김현희에 의한 KAL기 폭파 사건,연일 군부독재 타도 및 정치민주화를 요구하는 학내시위,1986년 아시아 게임과 1988년 하계 올림픽 대회 등이 어제의 일과 같이 선연하다.1980년대에는 군생활을 하기도 했으며,고교시절 부진한 학업을 만회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여 약간의 장학금도 받기도 했다.자취생활 내내 내게 도움을 주셨던 할머니께 조금이나마 용돈을 드리고 절친들과 대학촌 먹자골목에서 막걸리 파티를 하기도 했던 단합된 순수함이 살아 있었던 시절이었다.대학 1학년 시절에는 타대학 여학생들과의 설레는 소개팅이 있어 몇 번의 만남을 통해 이성을 알아가기도 했다.학교,자취방을 주로 오가는 것이 주가 되었다.외국어를 전공했기에 언어 실습실을 오고 가면서 외국어 실력향상에 매진하기도 했다.발음,문장을 반복하여 듣고 말하는 것이 외국어 향상의 지름길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 시간이었다.그다지 화려하지도 않고 톡 튀는 대학생활이 없었던 평범하기 이를데 없는 시절이었다.다만 내가 나아가야 할 길이 무엇인가를 잊지 않으면서 정도를 걸으려고 했던 점은 지금의 생활태도 및 삶의 방향에 흔들림이 없다는 사실이다.

 

 1980년대 내가 20대 초반이었다면 무라카미 하루키는 30대 초반에서 중반으로 넘어가는 시기였던 것으로 보여진다.작가로 데뷔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절이고 젊은 피와 열정이 넘치던 무라카미 하루키는 몇 종의 미국 잡지를 읽으면서 오래 간직하고 싶은 에피소드 및 기사 81편을 정리하여 독자들 곁에 다가 왔다.1982년부터 1986년 사이에 일어난 기사를 기본으로 하면서 무라카미 하루키만의 생각과 감정을 이입시키고 있다.시간과 세월이 흐르면 만물이 풍화 작용에 의해 사라지고 퇴색된다.기억마저 희미하게 바뀌면서 결국에는 관심과 흥미에서 사라지기도 하는데,스크랩 속에 나오는 에피소드들을 접하다 보니 문득 색이 바랜 흑백 사진을 바라보는 격이다.희미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아니 잊혀지고 만 사진들의 파노라마가 시간의 순서에 따라 기억이 새롭게 살아나듯 무라카미 하루키의 스크랩은 인간의 생각과 감정의 공통분모를 그대로 재현해 주는 것도 있지만 생각과 감정,취향과 기호의 이질적이고 상이함에 의해 무덤덤하게 다가오는 것들도 있다.그것은 인간의 생각과 취향 등이 다를 수 밖에 없기에 넓은 마음으로 수용하는 수밖에 없다.뉴욕을 중심으로 미국 주요 잡지에 기재된 글들이기에 1980년대 미국 사회의 사정과 트렌드,사고방식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물론 운석 사냥꾼,애완동물을 관리하는 사회복지사,마이클 잭슨 닮은 사람,사설 교도소,묘석털이 등이 호기심을 끌기에 충분했다.요즘 한국 진주에 운석이 떨어져서 운석을 사냥하려는 사람이 줄을 섰다는 뉴스를 접하다 보니 운석 사냥꾼의 얘기가 더욱 흥미로울 수 밖에 없었고,교도소 수용시설을 미정부차원보다는 민간이 교도소를 운영하는 것이 훨씬 제반경비가 덜 든다는 점도 이색적인 부분이었다.무라카미 하루키는 1983년 치바 우라야스시에 건립한 디즈니랜드와 1984년 LA 올림픽 경기에 대한 소식도 실었다.

 

 이 《더 스크랩을 읽으면서 문득 상기되는 것은 작가에게 있어 스크랩은 글을 쓰는 창작의 동기,소재,영감의 작용으로서 충분하다는 생각이다.스크랩은 순간 순간 신경을 써야 하는 정신적 노동이지만 정성과 열의가 쌓여 가면서 훗날 자신이든 누군가에게 하나의 역사적 자료가 될 수도 있고,창작을 하는 작가에게는 더 없는 글의 생산 요소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짐작하게 되었다.81편의 스크랩을 읽다 보니 1980년대 초.중반의 뉴요커의 일상과 뉴스를 바로 면전에서 접하는 것과 같은 친근감을 느끼게 되었고,무라카미 하루키작가 특유의 센치멘탈하면서 소소한 낭만이 어우러진 오후 한나절 누군가와 거리를 거닐며 산책을 하는 것과 같이 심적인 여유와 에너지 충전이 저절로 되는 단백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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