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 - 천황을 맨발로 걸어간 자
김용상 지음 / 고즈넉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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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제위기,빈부격차,민생외면 등의 차가운 시대를 살아가는 이즈음 지도자다운 지도자가 그리울 뿐이다.역사 이래 백성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던 인물은 과연 얼마나 될까.사후가 아닌 생전에 받고 그들이 그린 나라의 설계도대로 이루어졌다면 오랜 기간 민생고는 없었을 거라는 생각까지 든다.그런데 나라 살림이라는 것이 혼자의 생각과 힘만으로는 되지 않는 법이다.지도자는 이실직고를 잘하는 수하를 내치지 않고 국가의 대계,국가의 발전을 위해 겸허하게 경청하고 의논하여 수용해 나가려는 정치신념과 철학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다.과거는 그렇다치고 현대사회는 대의정치이기에 선거를 통해 지도자가 탄생되는데,지도자가 후보시절 그를 지원하면서 아낌없이 밀어 주었던 주변세력에게 '권력 나눠먹기'를 하고 만다.권력의 속성상 그럴 수 밖에 없는 처지를 이해를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잘못 그린 인사(人事)는 지도자를 비롯하여 국가의 발전과 사회구성원간의 위화감 등을 조장할 수도 있기에 우려스럽기까지 한다.

 

 엊그제 김탁환작가의 정도전에 관한 『혁명 1,2』를 의미있게 읽었는 바,고려말의 어수선한 정치권력의 다툼과 분열,갈등의 양상이 바로 엊그제 일과 같은 착각마저 들게 한다.정도전이라는 인물은 역성혁명의 주역이고 불세출의 인물임에는 틀림없다.자신의 권력욕을 다져 나가기 위해 몇 번의 유배와 유랑생활도 권력의 좌에 앉기까지의 수행과정이었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해 본다.권력의 좌에 앉게 되면 세상은 바로 자신의 소유물인양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덜 떨어진 정치주구(走狗)와 같은 존재가 없지 않아 있다.이와 견주어 보면 정도전이라는 인물은 현실의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고 그 문제점을 낱낱이 정리한 연후에 밑그림을 구상하면서 자기와 정치적 노선을 함께 할 인물들과의 대화,소통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꿈꿔 나갔던 것으로 보인다.그는 대쪽같은 성격과 시류를 간파하는 통찰력의 소유자라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고 그가 남긴 몇 편의 저작물은 오늘날 그 시대와 그를 연구하는데 커다란 도움이 되고 있다.

 

 그 시대에 오늘의 민주주의라 할 수 있는 '백성이 먼저인 나라'를 꿈꾸었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다. -작가의 말에서 -

 

 정도전은 나이 차이는 있지만 정몽주와 같이 이색의 문하생으로 시작하여 학문적 소양을 넓혀 나가고,정몽주를 통해 맹자의 사상에 심취하기도 한다.정도전은 동북면 병마사로 있는 이성계를 찾아가 그와의 인간적인 관계를 트게 되고,이성계는 정도전의 참신하면서도 대국적인 면모에 감복하면서 정치인생을 나눠간다.최영이 잃어 버린 고구려 고토를 수복하기 위해 요동정벌에 나설 무렵 군사적으로 열세에 놓여 있는 고려의 상황을 이성계와 정도전은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게 된다.당시 고려는 승려 신돈이 노비와 토지개혁을 내걸었지만 실상은 무모한 권력욕에 다름 아니었다.게다가 우왕,창왕이 신돈의 자손이라는 말까지 나돌기도 했다.또한 무신과 승려들이 경작가능한 토지를 움켜 쥐고 국가권력까지 장악하고 있던 터라 왕조의 힘은 허수아비와 같은 존재였다.또한 무장 이인임은 공민왕이 피살되고 자신의 의지대로 우(禑)를 보위에 앉히고 국사를 제멋대로 주무렀던 것이다.이러한 상황하에서 백성들은 노예와 같은 삶을 영위해야 하고 흉년이라도 들면 민생고는 하늘을 찌르는 듯 했다.그래서 전국적인 민란과 봉기가 일어났던 것이다.

 

 

 "간쟁보필(諫爭輔弼)하는 신하는 국가에 없어서는 안 되는 신하요,군주의 보배라고 했습니다." "간은 임음이 잘못된 계책을 세웠을 때 이의를 제기해서 받아들이면 좋고 아니면 물러난다는 것이요,받아들이지 않으면 목숨을 버리더라도 거듭 간하는 것이 쟁입니다." -P35

 

 정도전과 같은 신진사대부들은 친원반명정책을 쓴 반면 이인임과 같은 인물은 친원반명정책을 고수했으니,서로 엇박자를 보이면서 힘겨루기가 시작되었던 것이다.결국 이성계 세력은 신돈,이인임,이색 등을 척살 내지 유배의 길을 걷게 했다.그러는 가운데 이성계의 다섯 째 아들 이방원은 문과에 급제하면서 무장의 신분이었던 이성계는 마음 든든한 자식이 아닐 수가 없었다.이방원은 아직 정치권에는 속해 있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주변세력을 착실히 다져 가면서 정치야망을 키워 나갔던 것이다.이제 정도전은 유배,유랑,관료생활(전의부령,남양부사,성균관 대사성)을 거쳐 본격적으로 민생을 위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내놓게 되는데 그것은 전재개혁(田制改革)이었고 구체적인 실행계획,반대세력 대응방안 등은 조준과 함께 하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권문세족의 사전을 혁파,국가 소유의 공전(公田)으로 편입시킨 뒤 일부는 관료들에게 과전(科田)으로 나눠주어 신진관료층의 경제적 토대를 마련해주고,나머지는 애초 경작했던 백성들에게 돌려주는 것입니다." -P167

 

 수도 개경이 한양으로 천도되면서 개국의 물살은 더욱 거세지고 권력다툼 역시 본격화되어 간다.이성계가 해주에서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고 돌아오던 중 낙마하여 커다란 부상을 입게 되면서 자리에 눕게 된다. 문신으로서 풍부한 경륜과 안목을 갖춘 정몽주는 이성계와는 가까우면서도 멀게 느껴지는 사이이다.정몽주는 이성계와의 정치적 노선은 비슷하지만 고려를 없애고 새나라를 건설한다는 점에서는 이견을 고수한다.이성계가 낙마하여 자리에 누워 있다는 소식을 듣고 병문안을 왔다 가는데,이방원이 정몽주를 불러 놓고 그의 의중을 탐색한다.정몽주는 고려의 충신으로 남겠다는 것이다.이미 정몽주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주도면밀하게 계획을 세웠던 이방원은 그의 수하들(조영규 등 자객)을 시켜 선지교에서 무참하게 척살하고 참수까지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새 왕조인 조선을 위해 정도전이 할 수 있는 일은 새 왕조가 훨훨 날 수 있게 깃을 쳐주는 일,그것이 자신의 몫이고 할 일이라고 스스로 다짐한다.그리고 그 뜻과 의지,에너지를 활용하려 했던 것이다.백성이 주인이 되고 백성의 삶을 우선시 하려 했던 정도전의 뜻은 비록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오늘날과 같이 민생이 극도의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그로부터 난국에 대한 답을 얻을 수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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