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월의 미, 칠월의 솔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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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나간 어린시절엔 조부모님,부모님,동네어른들,친구들 모두가 영원히 함께 살아가리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다.시간과 세월,시대의 흐름 모두가 정지되어 꿈과 희망을 찾아 가고 사랑과 우정을 녹슬지 않도록 오래도록 유지하고 싶었다.산과 들판으로 둘러 싸인 시골 마을에서 제법 큰 도회지로 나오고 또 다시 서울 한복판으로 출세를 하였다.내가 어린시절 품고 있었던 소박한 꿈은 변화를 해야만 하는 시대의 흐름과 내 자신의 각성 및 인지 앞에서 무너지고 새로운 환경에 맞추어야 하고 스스로 길들여지도록 동화되어만 갔던 것이다.단잠과 같이 꿀맛 같았던 어린시절은 문명적으론 살아가기가 꽤 불편한 점도 있었지만 오손도손 정을 나누면서 자급자족하던 이웃 사람들과의 시래기맛 나는 구수한 인연은 도시화,산업화가 되면서 희미해져만 간다.내 삶의 방향과 DNA기질,품성을 낳아 준 그 본향은 빛바랜 고서와 같기만 하지만 들춰보면 꼭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잔병치레를 유난히 많이 했던 나는 00소아과에 돈을 뿌리면서 대신 면역기능이 좋아져 지금까지 커다란 질병이 없이 사는 게 나에겐 행운이라는 생각을 한다.일찍 남편을 잃고 7남매를 억척스레 보살피고 키우던 고모님은 먹고 살기가 힘든 것도 힘들었지만 먹었던 음식에 체하여 사경을 헤맨 적이 있다.할아버지,할머니,남동생인 아버지는 딸이요 누나인 고모가 나을 수 있도록 온갖 약과 정성을 쏟아 죽을 운명에서 오래 살 운명으로 바뀌었다.지금은 90이 가까운 나이이지만 정정하고 잘 드시고 여기 저기 딸네집을 전전하면서 인생후반부를 후회없이 사시는 것 같다.또 하나 내 나이 열살 무렵 객지에서 그릇 장사를 하시던 아버지께서 나를 비롯한 가족을 남겨 놓고 본가에 계시는 조부모님 문안을 드리러 가는데 마침 기차 좌석이 없었던 것이었는지 맨 뒤칸 문틈에 기대여 젊고 활력있는 목소리로 "아빠, 잘 다녀 올게"라는 사십대 초반의 모습이 돌아가실 무렵에는 이가 거의 망가지면서 홀쭉이가 되시고 숙환으로 어머니 무릎에 기댄 채 운명을 달리하셨다.

 

 글은 잘 살고 화려하고 잘 나가는 주인공의 삶보다는 그늘진 곳에 소외되어 살아가는 일반 서민들의 가엾은 삶을 작가의 경험과 상상력을 가미하여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 독자들로 하여금 찡한 여운과 생명력 넘치는 환희를 동시에 맛보게 해주는 것이 살포시 미소가 나오며 공명을 느끼게 한다.살아가는 서민들의 삶 속에는 아픔과 상처,번민과 고뇌가 묻어 난다.시간이 흐르고 되돌아 보면 지금의 시련과 고난과 비교하여 대수롭지 않았던 일인데 '당시엔 왜 힘들다,괴롭다,막막하다'라고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차 있었을까라고 스스로 성찰하기도 한다.이러한 사연들이 그리 멀지 않은 과거이고 과거였기에 손을 내밀면 바로 잡힐 것 같기도 하고 꿈 속에선 내 자신이 그 모습,그 자리에 우뚝 서 있기만 하다.현실로 돌아오면 괜한 생각,덧없는 세월을 한탄했구나라는 각성이 일기도 한다.다시 올 수 없는 지난 시절을 아픔과 상처,회한과 우울을 담담하게 그리고 있는 김연수작가의 <사월의 미,칠월의 솔>은 총 11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소설 모음집이다.

 

 사십대 초반의 김연수작가는 남성적인 육중한 문체보다는 섬세하고 감성적인 문체를 선보이고 있다.소리나지 않게 잔잔하게 내리는 사월의 빗소리는 음계 '미'로 들렸고 칠월의 비는 장대비와 같이 뚝뚝 떨어지는 '솔'로 들렸을 것이다.제목에서 다가오듯 창가에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지난 시간과 세월을 음미하는 글 속의 인물들의 사연 만큼이나 애잔하고 촉촉한 느낌을 안겨 준다.사랑과 실연,삶의 고통과 회한에 대한 기억의 편린들이 당시에는 어떻게 오고 갔는지 모를 정도였지만 지나고 보면 인간의 성장 과정에 꼭 있을 법한 이야기이고 사연들이다.작가는 이념과 사상에 의한 월남한 작가의 얘기와 죽음을 노 전(前)대통령 추모와 섞어 들려 주기도 한다.개인의 아픔이 아닌 국가의 몸뚱이가 흔들리는 아픔을 동시에 맛보게 하기도 한다.인상 깊은 소설은 주쌩뚜디피니를 듣던 터널의 밤이다.작고한 엄마의 음성을 기억하고 추억을 맛보기 위해 남동생과 안산 터널을 야밤에 쌍라이트를 켜고 그곳을 찾아 가는 여정에서 엄마의 존재는 참으로 위대하기만 하다.그리고 방화범인 청소년 동욱의 빗나간 삶을 작중 화자인 담임이 교도소에서의 만남과 격려 그리고 착실하게 교도생활을 하면 밝은 내일을 재기할 수 있다는 희망 섞인 멘토에서 그래도 삶은 차갑지만은 않다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되었다.

 

 소설 11편 모두가 잔잔한 정중동의 모습이 연상된다.기쁨과 슬픔,만남과 이별 그리고 다시 만남,기억과 추억의 소야곡들이 구슬프게 전해지는 것 같다.그리 멀지 않은 1990년대부터 근자에 이르는 이야기를 개인과 사회의 모습을 교차시키면서 들려 주고 있다.김연수작가는 직접 만나 뵙지는 못했지만 천상 이야기꾼이 아닐까 한다.마치 범생이 강의 내용을 메모지에 빼곡하게 정리해 나가는 모습이 연상되고 이를 다시 길게 해석하고 기술하는 스토리텔링의 파워풀한 힘을 느끼게 하였다.당시엔 다하지 못한,할 수 없었던 말과 행동,눈빛을 솔직하고 담담하고 자연스럽게 진실로 그때의 삶을 사랑했고 사랑한다 말해야 한다고 김연수작가는 5년간의 글쓰기 작업 속에서 하고 싶었던 진심이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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