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이의 살림집 - 근대 이후 서민들의 살림집 이야기
노익상 / 청어람미디어 / 2010년 1월
평점 :
절판


'가난은 나라도 구제 못한다'라는 말이 있다.가난의 되물림은 후손들에게 육체적,정신적인 시련과 고통이 뒤따를 것이기에 하루 하루를 이어 가는 것이 고된 부역과도 같을 것이다.'보릿고개'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우선 입에 풀칠을 하는 것이 삶의 우선 순위이었던 시절에는 조상들의 애환은 말도 못했을 것이다.'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고 했듯이 의지 가지 없었던 사람들은 정처없는 유민(流民)과 같이 부유(浮遊)한 삶을 이어가야만 했다.인간에게 삶은 생명력을 바탕으로 본능적으로 살고자 하는 의식이 있기에 특히 가난한 이들에게의 삶은 신산하지만 생명력은 강인하면서도 꿋꿋하게 지탱해 나갔던 것으로 생각한다.

 

 1980년대,1990년대 중후반의 한반도의 산하를 10년 간 다니면서 5년 간의 긴 원고작업 끝에 탄생한 이 글은 작가의 섬세하고 꼼꼼한 필치에 아련한 기억과 추억을 끄집어 내게 한다.이렇게 가난한 삶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조상대대로의 가난이라는 되물림이 주요 원인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오붓하게 산과 내를 두르고 있는 전통적인 한국의 시골 동네의 모습과는 다르게 외따로 살아 가던 '외딴집'을 비롯하여 외주물집,독가촌,막살이집이 나오고,사람들이 들어오고 나가는 기관격인 분교,간이역,차부집,여인숙 등이 소개되고 있다.나아가 1960년대 후반 도시개발에 따른 미관주택,시민아파트,문화주택 등이 순서대로 소개가 되고 있다.이는 개인의 삶과 시대의 흐름을 투영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여 한국현대사의 가난하게 살아 가던 이들의 가옥구조부터 소규모의 기관들 속에 그들의 애환이 강퍅하기도 하고 인정이 살아 있기도 하다.

 

 조선 후기 철종 이후 유민의 증가가 빠르게 증가하면서 산골 깊은 곳에는 주인 없는 땅을 불사르고 그곳에 화전을 일구어 살아가는 화전민들이 늘어나는데 이들은 외딴집의 형태를 띠면서 살아 갔다.그리고 조림사업을 한다는 차원에서 외딴집들을 듬성 듬성 모아 놓은 독가촌 그리고 탄광촌에 주로 자리잡은 외주물집(길가에 놓인 연립형식 집들)이 있으며 일제강점기에 생겨난 산골마을의 분교(간이학교)와 간이역은 그 이름만 들어도 추억이 묻어 난다.내가 다니던 국민학교는 면소재지의 중심이었기에 분교 형태는 아니었지만 면의 면적이 크다 보니 학교에서 10여키로 떨어진 산골 마을의 어린이들에겐 면소재지 학교로 통학하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에 1970년대 두 개의 분교가 생겨나게 되었다.모교에서 가르치던 교사가 분교로 발령받아 아침이면 자전거로 출근하던 교사의 수수한 모습이 지금도 뇌리에 선연하다.

 

 1968년 북한 공비들에 의해 무참히 살해 당한 이승복 어린이의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발언과 울진 삼척 공비 침투 사건 그리고 김신조에 의한 박정희 암살 미수사건을 통해 '도서벽지(島嶼僻地)'주민을 효율적으로 통제관리하기 위해 화전정리사업이 대대로 이루어지게 되었다.그것은 외딴집의 집단화 및 분교 교육의 전면적 개편이었다.1970년대 초 새마을 운동이 일어나면서 초가에서 슬레트집으로 바뀌고 돌담에서 벽돌담으로 바뀌게 되는데,도회지 대로변은 양옥집 형태의 미관주택이 늘어나게 된다.도회지의 주택의 경우 1968년 창전동에 시민아파트가 2년을 넘기지 못하고 붕괴되는 사태가 빚어지게 된다.박정희 군사정권은 무허가 건물 세대를 서울 인근으로 집단 소개(疏開)시키게 되고 1988년 서울 올림픽이 끝나면서 과밀한 서울도시를 분산하기 위해 베드타운(일산,분당 등)을 건설하면서 대형아파트 건설붐이 내집마련의 꿈과 맞물려 번창해 가고 있다.지금은 이미 지어 놓은 아파트가 남아 돌아 건설업체는 온갖 사탕발림으로 주민들을 유혹하고 있다.

 

 사람과 사람이 모이고 흩어지는 장소에는 단연 간이역과 차부집의 향수가 있을 것이다.벽지에는 자주 오지는 않지만 시내로 나가는 시내버스 그리고 각역마다 정차하는 비둘기호 등이 있었다.간이역에는 산과 들이 있고 청정한 공기의 내음이 마음을 설레이게 한다.차부집은 버스를 기다리기 위해 또는 비와 눈을 피하기 위해 잠깐 차부집 안으로 들어가 주인과 얘기를 나누기도 하고 군것질거리도 사기도 한다.간이역과 차부집은 세상살이와 더불어 사람들간의 정담과 소통 그리고 소소한 정보를 교환하는 중개지점이기도 하다.그리고 내가 대학시절과 신혼초에 살았던 문화주택은 (일본식)붉은 기와장과 붉은 벽돌담 그리고 대문 옆에 자리잡은 재래식 화장실이 있었다.정해진 날에는 똥물을 수거하는 차가 '딸랑딸랑'신호를 보내면서 약간의 법석이 일어나곤 한다.인간의 몸에서 배설된 똥물이 잠시 인상을 찌푸리게 하며 그 내음은 몇 시간 가기도 했다.

 

 이제는 기억과 추억으로만 남게 된 외딴집,외주물집,독가촌,차부집,막살이집,문화주택(지금도 일부는 남아 있다) 등에서 예전에는 느끼지 못한 향수와 추억이 새롭기만 하다.사람과 사람간의 교류와 소통이 줄어든 아파트 주거는 개인의 삶을 어느 정도 높여주고는 있지만 어린시절의 공동체적인 의식은 사라지고 이기적인 편의위주의 삶이 가속화되고 있다.지금보다도 더 개인주의로 흘러 갈 후세대들은 물질은 풍요로워지고 문명은 더욱 발달해 가겠지만 후세들의 삶의 질과 사회구성원간의 화합은 과연 어떻게 흘러갈지 하나의 의문으로 남게 되었다.가난한 이들의 삶은 누구를 해코지 하지 않고 자연과 더불어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그대로 받아 들이면서 힘들었지만 인간의 정을 나누면서 살았던 이들의 삶이 현대인의 삶과는 크게 대비가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