튜더스 - 세계사를 바꾼 튜더 왕조의 흥망사
G. J. 마이어 지음, 채은진 옮김 / 말글빛냄 / 2011년 9월
평점 :
절판


 

 

영국 역사상 튜더 왕조(1485~1603) 118년간의 5대에 걸친 그들의 치세 및 업적을 살펴보면 개성이 다르고 치세도 다르며 대외관계도 확연하게 다름을 알게 된다.특히 당시의 종교개혁과 신.구교간의 갈등이 가장 크고 영국이 근대화로 이어가는 과도기였으며 '해가 지는 않는 나라'의 기틀을 만드는 계기도 되었다.약 450년간 잉글랜드를 통치했던 플랜태저넷 왕조가 보스워스 전투에서 패하고 랭커스터 가문의 모계혈통인 헨리튜더가 왕위에 오르면서 튜더 왕조의 시조가 되는데 그가 바로 헨리 7세이다.

 

헨리7세(1485~1509)는 귀족가문의 수를 줄이고 사법위원회를 설치하면서 귀족들의 재산압수가 두드러지게 눈에 띈다.교회권력과 주교직은 왕실에 공헌한 자들에게 보상이 갔다.헨리7세는 왕권강화와 왕실의 수입을 늘리고 국고를 튼튼히 하기 위해 외국과의 전쟁은 피하면서 국내의 안정을 이루었지만 구두쇠에 폭군같은 이미지로 자리매김 되고 있다.

 

헨리8세(1509~1547)는 절대적 권력의 소유자이며 여섯 명의 부인 중에서 두 명을 처형하는 등 피와 배신의 꼬리표를 달고 있다.그는 캐서린 왕비와의 결혼무효 소송으로 로마교회와의 갈등이 증폭되면서 종교개혁에 불을 지폈으며 마르틴루터의 개혁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개신교 확장에 앞장서면서 그가 이룬 업적은 지상권,취임세 폐지법,성직자 복종법 시행,교황 배척하고 영국의 국교를 만들어 스스로 국교의 수장으로 자임한다.대외관계로는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의 적대적인 경쟁 속에서 국가의 안전을 위해 신중했으며 지방 신사계급 등의 신흥 상류계급을 탄생케 했다.왕권을 확립하기 위해 공포정치를 시행했는데 그의 실책으로 인해 백성들의 분노와 원성을 잠재우기 위한 수단으로 토머스 울지 등을 처형하고 영국 국교회의 수립을 공고히 하기 위해 토머스 모어,존 피셔 등의 측근들도 숙청하기도 했다.그의 곁에는 늘 크롬웰이 있었다.교회에 대한 지배권은 그와 의논하고 시행했는데 '첫 열매와 십일조 법'은 그에 의해 탄생되었다.

 

에드워드6세(1547~1553)는 9세에 왕위에 올라 16세에 생을 마감하면서 짧은 왕권을 행사했는데 그의 어머니와 오빠에 의해 섭정(攝政)이 이루어졌다.급진적 종교 개혁과 복음주의 개혁을 가속화하면서 구.교의 보수주의자들을 한 명도 죽이지 않은게 주목된다.

 

메리1세(1553~1558)은 영국 최초의 여왕으로서 당시 스페인과의 합스부르크왕가와 정략결혼으로 조카인 펠리페 2세와 결혼하지만 잉글랜드의 왕으로 인정해 주지 않기에 펠리페는 스페인에 머무르고 스페인과 네덜란드 섭정에 나선다.그녀는 전통교회로 회귀하고 영국 국교에 반하는 각계각층의 신도들을 이단 혐의로 화형에 처하는데 이를 '피의 메리'라고 불리워진다.재위 5년만에 운명을 달리하지 않았다면 탁월한 정치를 펼쳤을 것으로 평가받는다.특이한 점은 남편을 맞이하는 일에 관심이 없고 연애에 대한 관심이나 성적인 흥미를 보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엘리자베스1세(1558~1603)은 잉글랜드 역사상 가장 장수한 여왕으로서 구.신교를 적절하게 통제하면서 잉글랜드 국교화의 확립과 국내적 안정을 위해 힘썼으며 근대민족국가로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장본인이다.특히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칼레를 물리치면서 해상강국으로 부상하고 해외식민지 개척에 대한 초석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무일푼의 헨리7세가 보스워스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면서 튜더 왕가의 시조가 되고 5대에 걸친 왕가가 잉글랜드를 통치하면서 종교개혁과 구.교도간의 갈등과 해외식민지의 기초 마련,영국 국교의 수립 및 저항세력 숙청 등 일련의 역사적 사건들과 개인의 성향과 기치 등의 면면을 살펴 보는 계기가 되었다.당시 잉글랜드와 주변국에 있었던 프랑스,스페인,독일,이탈리아,네덜란드와의 종교적,경제무역,외교적 관계도 다소나마 이해하는 계기가 되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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