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파탈 - 치명적 매혹과 논란의 미술사
이연식 지음 / 휴먼아트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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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성(性)개방이 어느 정도 개방화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아직까지는 드러내 놓고 갑론을박하는 수준은 아니라고 보지만 가까운 사이에서는 은연중이든 고의적이든 대놓고 성에 대한 얘기를 스스럼없이 주고 받기도 하며 포르노를 탐닉하면서 이성의 은밀한 부분에 대해 나름대로 상상을 하기도 하며 실전에 서투르기만 했던 자신을 추스르고 기회가 오면 상상력을 실천으로 옮기는 경우도 있다.이성을 알고 몸을 섞어 가는 과정은 서로에게 애정의 싹이 트고 신뢰가 형성이 된 경우에 욕망은 제대로 불타오를 수가 있을 것인데,일부는 성에 굶주린 사람마냥 동물적인 감각으로 속사포식으로 행하기에 물의를 빚기도 하며 뒤끝이 개운치 않은 사례도 있다.

 

세계 각국의 미술사를 통해 본 알몸이냐,누드냐를 놓고 치열한 공방전이 일어나기도 하고 시대가 변하고 의식구조가 개방되면서 알몸 & 누드 공방은 어느 정도 수그러들고 이를 예술적인 가치로 승화하는 경우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개인적으론 알몸이라 하면 피사자에겐 수치심을 불러 일으키고 상업적인 용도로 인식하며 누드라는 것은 비록 두터운 옷을 벗은 채로 그려지고 찍혔지만 은밀하게 상상과 추리를 부여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성적인 욕망과 표현에 대해 적대적인 기독교 문화에선 오히려 알몸에 가까운 회화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고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채 쫓겨 나는 장면부터 장로와 신부,수녀들의 성행위들이 묘사되고 있는데 어찌보면 좋아하는 사람끼리 또는 끌리는 사람에게 구애를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현상이 아닐까 한다.태초에 인간은 벌거벗은 채로 생활을 영위하다 문명의 이기와 지혜를 깨우치면서부터 차츰 몸을 가리고 남.녀 성기를 치부(恥部)로 여기고 중시하게 되었던 것이리라.

 

재미있는 것은 동양권의 성문화이다.중국은 명청대에 남자가 궁중하인을 유혹하여 넓은 대청마루라는 공간에서 아슬아슬한 긴장감 없이 마냥 성교를 즐기는 장면이 등장하고,일본의 경우에는 좁고 어둠이 있는 이마(居間,한국의 거실)에서 부자연스러운 성교를 하는 경우가 많다.그에 비하면 조선시대의 춘화는 남녀간에 외설적으로 성행위를 묘사하는 경우는 드물고 <雲雨圖畵帖>에서 보여지듯 개의 교접(交接) 장면 등을 묘사하면서 매우 한정된 유형이 반복되었다고 보여진다.

 

성적 매력을 이용하여 남자를 조종하고 파멸에 이르게 하는 여성인 '팜 파탈'은 과연 누구일까? 중국의 양귀비,미국의 마릴린 먼로,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 정도가 아닐까 한다.자연스럽고 아름다우며 완벽한 몸매를 갖은 여성은 뭇남자들에게 직간접적으로 선망과 유혹의 대상으로 만들게 한다.이와 견주어 알몸과 누드를 놓고 보면 몸과 마음이 흥분이 고조되고 상사병이라도 생기게 한다면 이는 개인과 사회의 정신건강 차원에서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인간이 갖고 있는 본성을 몸과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비이성적으로 행한다면 결코 바람직한 행위가 아닐 수가 없으며 심할 경우엔 잘못된 판단과 행위로 파탄과 망신으로 이어질 수가 있으리라.

 

현대는 성에 대해서도 다양한 이해와 관점을 갖고 있다.이성애,동성애,양성애가 공존하고 있으며 이를 적극적으로 개방하고 수용하는 나라도 있는가 하면 터부(Taboo)시 하는 나라도 있다.말초신경을 자극하고 상대방이 수용하지 않는 변태적인 성행위 및 알몸 노출과 그림은 눈요기는 될지언정 은근히 피어나는 고귀한 사랑과는 견줄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누드와 사랑의 행각이 고귀하고 영원한 예술로 승화되려면 개인과 대중의 시선에서 물의를 빚지 않고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예술 행위여야만 그 존재와 가치가 빛이 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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