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시봉 이야기
김종철 지음, 강모림 그림, 고서점 호산방 자료제공 / 21세기북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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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시봉이라는 단어를 들으면서 한때 유행어로 떠돌았던 따봉이 생각이 난다.불어의 세시봉(C'est Si Bon)은 아주 좋아!라는 뜻으로 1950년대 한국 전쟁 이후 서울의 무료한 밤을 기타와 화음으로 젊은이들의 음악 살롱 내지 음악 감상실의 무대였다는 점에서 특별하게 다가 온다.음악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서양의 클래식 및 대중 음악은 그다지 흥미를 끌지 못한거 같다.다만 세시봉 멤버들로 불리워지는 박상규,조영남,송창식,윤형주,김세환,서유석,김도향등의 이름과 그들이 TV 및 라디오에 출연하여 그들 나름의 개성과 가창력,끼를 보여 주었던게 오래 기억에 남고 1970년대 너무도 익숙한 노래들과 그들의 퍼포먼스가 시간이 흘러후배들에게 자리를 내주는가 싶더니 요근래 '세시봉'이라는 이름으로 30년전의 팬들을 사로 잡게 되고 일약 그들의 활동이 주목을 받게 되고 있는거 같다.

 이 글을 쓴 작가는 1960년대 신문 기자로 활약하면서 세시봉 멤버들과 교유를 하면서 또는 간접적인 자료 수집과 지인들의 인터뷰를 통하여 그들의 면면을 팬들에게 보여 주게 되고 요즘 말도 안되는 영어 짜맞추기식의 가사와 국적 불명의 춤이 섞인 가요 군단과는 다르게 청장년층들의 향수와 추억을 되살려 보자는데 의미가 있는거 같고 세시봉들이 활약했던 시대는 박정희 군사정권과 맞물려 자유롭게(통금) 행동을 할 수가 없었고 곡 또한 심의를 받아야 하기에 당시 정권의 입맛에 맞지 않으면 삭제되고 폐기되기 십상이었던 것을 알게 된다.다만 세시봉 멤버들이 갖고 있었던 통기타와 청바지 차림의 젊음의 상징이 사회적으로 암울했던 분위기를 일신해 주지 않았나 싶다.

 멤버들은 구라파 팝 스타들의 영향이 컸던거 같다.엘비스 프레슬리,비틀즈,밥 딜런,존 바에즈등의 쟁쟁한 스타들의 삶과 노래,몸동작등을 통해 해방후 트로트라는 전형적인 한국 가요의 틀에서 조금씩 껍질을 벗겨 내면서 새로운 가요의 시대를 맞이했던 것으로 보여진다.자유분방한 조영남,영혼과 육체의 화음의 대명사 송창식,청아하고 경쾌한 윤형주,영원한 젊음의 상징 김세환등과 그 뒤를 잇는 한대수,김민기,양희은,정태춘등이 가요의 맥을 1980년대초까지 이어가고 있다.

 세시봉의 정규 프로였던 '대학생의 밤'이 1966년 홍대에서 매주 금요일 6시에 열리게 되었고 당시 무대 사회자는 이상벽씨였다고 하며 그 해 가을엔 자연스레 1기 모임이 이루어지고 이후 다양한 모임과 공연이 이어지면서 관계 또한 돈독해져 갔던거 같다.1960년대 세시봉 모임이 결성이 되고 1970년대 그들은 TV와 라디오에서 맹활약을 보여 주면서 고정적인 팬들을 확보해 갔다.멤버들 각자가 스타일이 다르고 창법도 제각각이지만 그들은 한국 고유의 애환이 서린 트로트의 장르를 벗어나 자유분방함과 낭만을 통해 규제된 일상으로부터 탈출하려는 느낌이 강하게 작용했고 답답하고 암울했던 사회상을 노래로써 팬들에게 다가서려 했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이제 그들은 중장년층으로 접어 들었지만 아직도 목소리와 재기발랄함은 여전한거 같다.노래가 좋아서 노래를 스스로 선택했고 진솔하고도 열정적인 무대 매너는 오래도록 당시의 팬들의 뇌리에 살아 있으며 2011년초 설특집에 그들이 출연함으로써 잊여져만 가던 멤버들의 기억이 추억으로 다가왔던 것이다.노래는 감성을 자극하는 촉매 역할을 한다.그들의 노랫말 속에서 젊은이들을 낭만과 억눌림을 대신하고 해소해 주었기에 팬들은 그들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있는거 같다.또한 그들이 다시 매체에 등장하면서 기존의 팬 뿐만이 아닌 전세대에 걸쳐 그들에게 뜨거운 호응과 격려,감흥이 불꽃처럼 피어남을 실감하게 되었으며 잊고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는 각성제 역할을 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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