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찾아서] “자유언론선언 지지” 좌절된 사설
세상을 바꾼 사람들 8-2
 
 
한겨레  
 








 

» 1974년 10월24일 <동아일보> 편집국에서 기자, 프로듀서, 아나운서 등이 자유언론실천선언을 열고 있다. 이는 75년 3월 사상 초유의 언론인 대량해고 사태로 이어진다.
 

서울 중학동의 한국일보사 사옥으로 처음 출근하던 날 아침 버스 안에서 만감이 교차했다. 곧 장기영을 만날 판이니 ‘이게 무슨 팔잔가’ 하는 탄식이 절로 나왔다. ‘사주께서 부총리로 계실 때 제가 철없이 날뛰었으니 너그럽게 용서해주사이다’라 해야 순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뇌리를 스쳤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건 안 돼! 그렇게 나가면 장기영이 나를 우습게 볼 것이고 결국은 내가 평생 후회하게 될 거야’라며 마음을 다잡았다.

한국일보사 본건물 뒤 부속건물 4층의 사주실에서 만난 장기영이 반기는 표정은 물론 아니었다. 사무적인 어조로 “임재경씨는 경제사설도 잘 쓰고 신문 경영도 할 수 있는 사람이란 걸 내가 알아요” 했다. 지금은 어딜 가도 들어보지 못하는 서울 토박이 중인 말씨와 억양인데, 그 특유의 ‘넌센스’ 화법이다. 남대문 밖 이태원에서 태어난 그는 ‘선린상업’을 졸업하고 일제 때 조선은행(한국은행 전신)에 들어가 광복 뒤 한국은행 부총재까지 지낸 입지전적 인물이다. 그에게서 빼놓을 수 없는 이력은 한국은행을 그만둔 1950년대 초 경영난에 허덕이던 <조선일보>가 그를 전문경영인(CEO)으로 초빙해서 잠시 사장으로 일했던 시기다. 그런데 헤어질 때 양자의 관계가 퍽 좋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조선일보에 있을 때 들었다.

내가 한국일보사에 갔을 때 홍유선(작고)이 주필, 주효민이 부주필이었다. 이 둘은 까다로운 장기영의 사설 취향을 맞추며 정권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는 데 이골이 나 있었다. 현역 언론인 가운데 최고령이라는 70대의 유광열(작고)이 거기에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 ‘나잇값을 못한다’는 말이 무색하리만큼 역겨웠다. 50대의 박동운, 이열모, 조경희(예총회장 역임), 김정태, 윤종현(논설주간 역임), 40대의 김용구(코리아 타임스 편집국장 역임, 80년 해직), 예용해(작고), 정광모(소비자연맹 회장), 이형(80년 해직) 등으로 다양한 성향이 뒤섞였던 점이 다른 신문과 조금 달랐다. 개중 나이가 젊었고(37), 다른 고장에서 뛰어든 몸이라 나는 말조심으로 일관했다. 그러다가 일이 터졌는데 74년 10월24일 <동아일보> 기자들이 “신문-방송-잡지에 대한 어떠한 외부간섭도 우리의 일치된 단결로 강력하게 배제한다”는 자유언론 실천선언을 들고 나왔을 때다.

김용구·이형 두 논설위원이 오전 논설회의에서 10·24 자유언론 실천선언을 ‘절제된 형태’로나마 지지한다는 사설을 써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이열모·예용해와 내가 거기에 동조하자 회의 분위기는 급변해 10·24 지지론이 굳어져 마침내 사설 제목으로 채택됐다. 부대조건으로 사주나 외부 압력으로 논설회의 결정이 번복될 때는 본지(한국일보)와 자매지(서울경제신문)의 사설 및 칼럼(‘지평선’과 ‘메아리’)의 집필도 거부한다는 결의를 달았다. 그러나 이런 논설회의의 결정이 통할 리 만무했다. “그러면 좋다. 우리는 오늘 할일이 없으니 퇴근한다”며 김용구가 앞장서 사무실을 비우기 시작했다. 그날은 내가 서울경제신문에 사설을 쓸 차례였는데 아랑곳하지 않고 점심시간에 퇴근했다. 그러나 주필과 부주필, 그리고 유광열은 회사에 남아 사설 두 토막과 칼럼 두 편을 생산하는 열


 

» 임재경/언론인
 
성을 다해 ‘사설 없는 신문’이라는 자유언론의 영광스러운 흔적을 남기지 못하고 말았다. 여기서 한 가지 터득한 것은 반면교사로서 유광열의 존재다. 나이가 들어 원로로 행세하려면 유광열처럼 구차스런 처신은 안 된다는 교훈이다.

조금 되돌아가 73년 늦은 가을 한국일보로 가기 전인가 보다. 관철동 ‘한국기원’에서 바둑을 두는 나를 백낙청과 ‘호협’ 박윤배가 만나러 왔다. “지금 바둑 둘 땐가. 술타령하며 입으로만 ‘언론 자유’ 하면 무얼 해? 신문이 아닌 다른 곳에 글 좀 써라” 하고 격한 목소리로 박윤배가 나를 몰아세웠다. 이어 백낙청이 “네 지식과 언변이면 <창작과 비평>에 훌륭한 글을 얼마든지 쓸 수 있어”라고 거들었다. 이때 두 친구의 말은 가감없이 우정 어린 질책이었다. 그래서 쓴 것이 <창작과 비평>‘1974년 봄호’에 나온 200자 원고지 150장 분량의 ‘아랍과 이스라엘’이다. 훗날 민청학련 사건으로 교도소에 있던 유인태(전 청와대 정무수석, 재선의원)가 이 글을 읽고 감명을 받았다고 말했을 때 두 친구의 질책을 재삼 고맙게 느꼈다.

임재경/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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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찾아서] 거짓 담합 “실종 김대중 서울 귀환”
세상을 바꾼 사람들 8-1
 
 
한겨레  
 








 

» 1973년 8월14일 도쿄에서 납치됐다가 살아돌아온 김대중씨가 동교동 자택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그러나 신문들은 이 사건을 축소보도했다. <보도사진연감>에서
 
1973년 5월 <대한일보>의 폐간으로 나는 실업자가 됐다. 그해 여름과 초가을 몇 달은 밥벌이를 못 한다는 불안감보다 지긋지긋한 ‘허위의 공간’에서 벗어난 기분으로 날아갈 듯했다. ‘허위의 공작실’이라 썼다가 너무 지나치다 싶어 ‘허위의 공간’이라 고쳤는데 여하튼 신문사 편집국을 가리키는 것이다. 신문이 크고 중요한 사실을 외면하면 자질구레한 사안들을 보도하게 되고, 아무리 정확을 기한다 해도 사회는 진실로부터 멀어져 마침내 허위가 판을 치게 된다는 뜻이다. 정부의 발표문을 신문에 옮기는 데 국민을 의도적으로 기만할 의도로 펜대를 굴리는 기자는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정부의 발표 내용에 의문을 갖고 분석·탐사·해설·논평을 하지 않을 때 신문은 국민을 속이는 집권자와 공동 정범이나 아무 다를 게 없다. 이를테면 73년 8월 김대중을 도쿄에서 납치-결박하여 배에 싣고 왔을 때 신문들이 단순히 ‘동경 실종 김대중, 서울 자택 귀환’으로 표제를 달고는 만족한 것이 그 좋은 보기다. 남을 속이는 일을 장기간 반복적으로 하면 자신이 만들거나 가담한 허위를 믿게 되는 이상한 정신 상태에 빠지는 법이다. 그러나 이성을 가진 인간은 자기기만에 무한정 안주하지는 못한다.

김연준이 잘 있는 사람을 실업자를 만들어 몹시 미안하다며 50만원을 김경환을 통해 전별금조로 보냈다. 두 달 일하고 받은 퇴직금으로는 큰돈이다. 더구나 <조선일보>의 퇴직금은 까먹지 않았던 터라 당장 생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나는 신나게 놀러 다녔다. 앞서 말한 ‘파격’ 채현국과 ‘호협’ 박윤배 이외에 흥국탄광에 관계했던 여러 친구 김이준·김진웅·이선휘가 실업자를 위로한답시고 만날 때마다 술을 샀다.

1년 만에 위치가 뒤바뀌어 이번에는 남재희가 나를 <서울신문>의 경제부장으로 오라는 거였다. 내가 조선일보를 버리고 나온 터라 그의 제의를 좋은 말로 거절한 뒤 <서울경제신문>의 경제부장 정태성(<서울경제> 편집국장, <매일경제> 주필 역임, 작고)을 천거했다. 또 한번은 조선일보 수습기자 시설 정치부 차장이었던 김인호(<중앙일보> 편집국장, 전주제지 사장 역임, 작고)가 대한상공회의소의 무슨 부장 자리가 비었다며 거기 갈 의향이 없느냐고 했다. 고맙다는 생각보다는 ‘얼마나 처량하게 보였기에’ 하는 자격지심이 들어 짧게 그럴 생각이 없노라고 물리쳤다. 영어로 하자면 ‘노 생큐’ 해야 될 일을 ‘노’라 했으니 어느덧 내가 사람관계에서 우를 범하는 길에 들어서 있었던 것이다.

한양대학교 교수가 된 리영희는 이따금 나를 불러 술을 샀는데 1차로 끝나지 않고 2차, 3차로 이어져 간혹 밤을 새우며 마셨다. 통행금지(자정에서 새벽 5시)가 있던 시절이라 철야로 값싸게 마실 만한 장소는 허름한 데가 아니면 안 되었는데, 그러다 한번은 일제 단속에 걸려 동대문서 유치장에 갇혔다. 통금 위반자는 다음날 즉심에 회부되어 약식 판결을 받아야 하므로 대학교수 리영희는


 

» 임재경/언론인
 
자칫하면 입방아에 오를 것 같아 나는 꾀를 냈다. 유치장 담당 경관에게 다가가 현금을 주머니에 찔러주며 “저분은 교수인데 오늘 아침 학교에서 시험감독을 해야 하니 즉결에 보내지 말고 풀어 달라”고 사정했다. 경관은 통금이 해제된 다음 그를 풀어주었지만 나는 끝내 즉심에 회부되어 벌금을 물고 오후에야 집에 왔다. 35년 전의 조그마한 일이 잊혀지지 않는 것은 집에 와 그날치 신문을 보니 ‘김대중 동경 실종 서울 귀환’이란 기사가 실렸기 때문이다.

그해 초겨울 대한일보에 같이 갔던 안의섭의 네 칸 만화 ‘두꺼비’가 <한국일보>에 선을 보였다. 인기 있는 네 칸 만화를 보는 독자의 수는 사설 독자의 열 배라는 말이 있었는데, 그 말이 맞았던 모양이다. 당시 <동아일보>의 ‘고바우’와 쌍벽을 이루던 두꺼비를 ‘한국’이 탐내는 것은 정한 이치다. 치밀한 계산의 소유자 김경환은 두꺼비를 ‘한국’에 보내며 그 사주 장기영과 일종의 단체교섭을 벌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지 않았으면 7∼8년 전 자기에게 물불 가리지 않고 대들던 임재경을 받아들였을 리 만무하다. 74년 1월1일자로 한국일보사 논설위원 발령이 났다. 김경환과 조영서도 같이 갔다.

임재경/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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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찾아서] ‘박통’의 미움산 대한일보 문닫다
세상을 바꾼 사람들 7-5
 
 
한겨레  
 








 

» <대한일보> 폐간 이틀 전인 1973년 5월13일 어수선한 편집국에서 기자들이 서성거리고 있다. 사진 <신문은 죽어서도 말한다>(다락원)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이란 이상한 직함의 사람들을 큰 체육관 같은 데 몰아넣고 단일 후보 박정희를 대통령으로 뽑게 하였으니 ‘주권재민’의 대한민국 헌법 조항은 사실상 사문화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런 대통령 선출 방식은 보통선거의 4대 원리, 즉 비밀·직접·평등·자유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므로 정치제도가 근대 이전으로 돌아간 것이다. 박정희는 단순한 독재자가 아니라 전제군주였다.

1973년 초 태평로 지금의 ‘코리아나’호텔 자리에 있던 옛 조선일보사 건물 3층 편집국에서 보통선거의 원리를 입에 담는 기자를 나는 본 적이 없다. 10·17 쿠데타와 이른바 ‘유신헌법’이 민주주의를 명백하게 파괴한 것이므로 보통선거 원리 운운하는 것 자체가 바보처럼 비칠까봐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때 2년간의 일본 연수를 마치고 돌아와 편집국의 구석진 데서 심의실장이란 찬밥 신세였던 김경환(60년대 중반 <조선일보> 편집국장)이 나를 보자고 했다. 그는 “정치부에서는 왜 선거제도의 국제비교나 역사적 변천에 관한 해설을 쓰지 않는가”고 묻는 거였다. 내 입에서는 거의 자동적으로 “뻔한 것 아닙니까. 중정에서 못 쓰게 하니까 그렇지요”라는 대답이 나왔다. 내가 프랑스에서 돌아왔을 때 성남 광주단지 소요에 관해 누구에겐가 묻자 ‘뻔한 것’이란 말을 듣고 울화가 치밀었는데 이제 내가 전임 편집국장에게 같은 표현을 쓰게 되니 실소를 금하기 힘들었다. 일류 신문은 허울뿐이고 기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세상 되어 가는 대로 따라가고 있다며 그는 혀를 찼다. 나는 “뻔한 건데 그걸 지금에야 알았나요?” 했다. ‘뻔한 것’이란 말이 나오면 대화는 진전되지 못하는 법이다. 며칠 뒤 김경환은 다시 나를 보자고 했다. 그가 나를 격동시킨 데는 숨은 의도가 있었다.

한양대학 이사장이며 <대한일보> 사주인 김연준(한양대학 설립자, 작고)이 김경환에게 신문제작에 대한 전권을 줄 터이니 대한일보를 일류 신문으로 만들어 달라고 간곡히 당부하더란 것. 조선일보의 인기 연재물인 네 칸 만화 ‘두꺼비’의 안의섭 화백(작고), 편집부장인 조영서(시인), 그리고 나 이렇게 셋과 함께 오면 월급은 언론계에서 대우가 기중 좋은 <중앙일보> 수준보다 높게 해준다는 내용이다. 거기다 차장급인 나를 정치·경제·외신 담당 부국장직에 발령하되 한 달 뒤에 정치부장을 겸임케 한다는 사탕발림이 있었다. 나는 즉석에서 “김연준이 대한일보를 시작한 지 10년이 넘었는데 왜 일류 신문을 못 만들었지요? 낮은 월급에 어떻게 우수한 기자가 모입니까. 김연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나요?”라고 쏘아붙였다. 침착하기로 소문난 김경환은 물러서지 않고 “신문은 사람이 만드는 겁니다. 시간을 두고 우수한 기자를 모으면 돼요. 임형이 스카우트하면 그 기자는 열 명이고 스무 명이고 다 ‘중앙’ 수준의 봉급을 약속합니다”라고 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속담대로 나는 그를 따라 대한일보로 갔다. 1965~66년 리영희와 남재희를 좌우에 거느리고 한때 조선일보를 빛냈던 김경환을 신뢰했던 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다.



 

» 임재경/언론인
 
내가 간 지 두 달 반 만에 대한일보는 문을 닫았다. 사장 김연준이 72년 홍수 때 독자들로부터 거둔 수재의연금을 횡령·착복한 혐의로 검찰에 끌려가 심문을 받고 신문등록을 자진 철회하는 형식을 취했다. 한국 최대의 사학(私學) 부호인 김연준이 무엇이 모자라 하찮은 규모의 수재의연금을 잘라먹었을까. ‘대한’ 쪽 관계자들의 설명을 종합하면 각 신문사가 모집 캠페인을 벌이는 수재의연금은 일정한 금액에 이르기까지 은행에 예치해 놓았다가 한꺼번에 재해대책본부에 전달하는 것이 관례라는 것. 예치기간에 잠시 인출했다가 재예치한 것을 횡령죄로 뒤집어씌운 것은 박정희의 미움을 샀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폐간과 관련하여 흥미 있는 사연이 들렸다.

육사 8기로서 베트남 파병 맹호사단장을 거쳐 수도경비사령관이 된 윤필용은 청와대 비서실장, 경호실장, 중앙정보부장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박정희의 측근 실세로 꼽혔다. 이런 그가 박정희를 빗대 “노망 운운”한 사석의 말이 도청·보고됐다. 73년 4월 군법회의는 육군 소장 윤필용을 일등병으로 강등시키고 징역 15년이라는 중형에 처했다. 그런데 김연준이 윤필용과 친히 지내며 자신이 소유한 시청 앞의 ‘프레지던트’ 슈트룸 하나를 공짜로 빌려주었다는 것이다.

임재경/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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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찾아서] ‘셋방’ 친구에게 집 사주는 의리
세상을 바꾼 사람들 7-4
 
 
한겨레  
 








 

» 계엄사령관에 임명된 노재현 육군참모총장이 1972년 10월17일 정치활동목적의 옥내외 집회금지, 언론·출판·방송 등의 사전검열, 대학 당분간 휴교 등을 내용으로 하는 ‘포고1호’를 발표하고 있다. <보도사진연감>
 
언론의 자유가 압살당한 상태에서 기자가 할 일은 무엇인가. 검은 것을 검다고 쓰지 못하면 신문은 존재할 가치를 잃어버린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버젓이 신문사에서 밥을 먹고 있었으니 기자 초년 시절 경멸했던 고참들과 결국 마찬가지 신세가 되고 말았다. 신문사를 그만두면 생계도 막막했으려니와 그보다는 세상이 ‘알아주는’ 기자직을 버린다는 것이 부끄러운 말이지만 너무나 아쉬웠다. 글쟁이인 기자가 제구실을 못할 바에는 이참에 아예 문청 시절의 꿈이었던 소설을 써볼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으나 ‘늦었다’는 느낌이 나를 지배했다. 10·17 쿠데타 이후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이런저런 고민을 하던 끝에 신문사 밥을 먹는 있는 동안만이라도 언론자유를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해보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언론자유는 신문사의 주인이 지켜주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고 정치인이 목숨을 내놓고 확보해주는 것도 아니다. 직업인으로서의 기자에게는 검은 것을 검다고 쓰는 용기와 함께 언론자유를 지키고 적극적으로는 자유로운 언론 활동이 가능한 정치·사회적 환경을 조성할 책임이 있다는 뜻이다. 에밀 졸라로부터 사르트르에 이르기까지 프랑스 지식인들이 즐겨 입에 담던 그 멋있는 말 ‘앙가쥬망’(현실참여)이 피할 수 없는 외길이 돼서 내 앞에 버티고 있다. 지식인의 현실참여는 개개인의 총체적 결단을 통해 나오는 것이지만 의미 있는 결실을 맺으려면 다수의 현실참여가 불가결의 요소다. 그러므로 신문사 밖의 친구들을 더 자주 만났다.

1972년 여름 백낙청이 3년 간의 미국 체류를 마치고 귀국했다. 그의 부재 중 염무웅(문학평론가·영남대 명예교수)이 계간 <창작과 비평>의 편집을 맡아 수고했다. 예전 종로 수송초동학교 건너편에 위치한 신구문화사 한구석의 창비 사무실에 간혹 들르면 염무웅 또래의 문인들과 마주쳤다. 소주를 나눈 문인으로 기억나는 얼굴은 작고한 시인 조태일과 소설가 이문구다.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대학 시절부터 지금까지 반세기 이상 가깝게 지내는 채현국(효암학원 이사장). 백낙청이 미국에 가 있을 때 <창작과 비평>의 제작비는 발행을 맡았던 신동문(시인·전 신구문화사 상무·작고)이 꾸렸으나 편집책 염무웅은 원고료를 조변할 방법이 막막하여 자주 채현국을 찾아가 급한 불을 껐다. 채현국은 김상기와 서울대학 철학과 동기이며 한때 문학과 연극에 뜻을 두어 공채 1기로 KBS에 입사할 만큼 예능 열정이 대단했다. 그러나 부친(채기업·흥국탄광 창설자)을 돕기 위해 사업에서 발을 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가정 연료의 주종이 연탄이었던 60년대에 채기업-채현국 부자의 탄광은 개인 소득세 납부액이 전국에서 열 손가락에 들 정도로 커졌다. 그는 맘에 맞는 친구들에게 밥과 술을 사주며 헤어질 때 차비를 쥐어주는 데 그치지 않고 셋방살이를 하는 친구들에게는 조


 

» 임재경/언론인
 
그마한 집을 한 채씩 사주는 파격의 인간이다. 모두 어려운 시절의 미담이므로 나는 주저하지 않고 채현국의 도움으로 내 집을 처음 마련한 언론 종사자 넷의 이름을 들겠다. 황명걸(<동아> 해직기자·시인), 이계익(<동아> 해직기자·전 교통부장관), 한남철(소설가·전 <월간중앙> 기자·작고), 이종구(<조선> 해직)가 곧 그들이다. 여기서 이름을 밝히지는 않겠으나 흥국탄광에서 일했던 친구들 중 집 장만 하는데 채현국의 신세를 진 사람은 숫자가 훨씬 여럿이다. 남 집 사주는 이야기를 하다 빠뜨릴 뻔했는데 집은 아니더라도 부지기수로 채현국의 신세를 진 사람이 바로 나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박윤배(1988년 작고). 6·25 전쟁 중 대구 ‘피난 연합중학교’ 동급생인 김상기-채현국의 소개로 알게 됐는데 그는 타계하는 날까지 내가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실의하지 않도록 격려하고 도움을 준 친구다. 그의 고등학교 1년 후배인 인권변호사 홍성우(<한겨레> 초대 이사·민변회장 역임)는 언젠가 ‘호협인간’ 박윤배의 일면을 “경기고에서 알아주는 주먹”으로 표현했다. 하지만 박윤배는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의협과는 전혀 다른 타입으로 홍명희의 <임꺽정>과 <삼국지> <수호전>의 주요 장면들을 적절하게 구사하는 것은 그의 장기 가운데서는 아주 약과다. 주변에 내로라는 독서가가 적지 않으나 클라우제비츠(Karl Clausewitz, 1780~1831)의 <전쟁론>을 읽은 사람은 박윤배 하나뿐이었다.

임재경/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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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찾아서] ‘중정’ 돈으로 연 48% 사채놀이
세상을 바꾼 사람들 7-3
 
 
한겨레  
 








 

» 박정희 정부는 1972년 8월3일 0시를 기해 기업사채를 월 1. 35%로 낮춰 3년 거치 4년 분할상환하는 것을 뼈대로 하는 ’경제안정과 성장에 관한 긴급명령 15호’를 발표했다. 당시 태완선(가운데)경제기획원 장관이 발표문을 읽고 있다. <보도사진연감>
 

관변 먹물(집권세력에 줄이 닿았거나 대려는 대학교수 및 언론인)들은 7·4 남북 공동선언을 내걸고 10·17 유신쿠데타를 정당화하려고 무던히 애썼다. 7·4 공동선언과 10·17 쿠데타는 논리상 모순될 뿐 아니라 사실 관계에서 서로 어긋나는 것인데 그들은 막무가내였다. 하긴 흰 것을 검다 우기며 그 짓으로 밥을 먹고 사는 족속이 자고로 농투성이 아닌 먹물이란 것은 너무 잘 알려진 일이다. 관변 먹물 이르되 “박정희의 첫 번째 쿠데타(5·16)는 경제 개발을 위한 것이고 두 번째 쿠데타(10·17)는 통일을 위한 것”이라 했다. 이런 궤변에 발 벗고 나서는 대학교수, 언론인들 상당수가 박정희에게 어여삐 보여 한자리씩 차고 나간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유신체제’하에서는 국회의원 정원의 3분의 1을 대통령이 지명하도록 헌법에 규정했으니까. 그뿐인가. 청와대와 내각에 소위 일류신문 출신이 줄줄이 등용될 때마다 경사로 여기는 풍조가 생겼다. ‘동아일보’의 유혁인(동아 정치부장, 청와대 정무수석. 문공부장관)과 ‘조선일보’의 윤주영(조선 편집국장, 청와대 공보수석, 문공부장관)이 그 선례에 속한다.

중앙정보부 직원이 신문사에 상주하며 박정희 친위부대가 대학교를 군홧발로 짓밟는 사건(1971 10월의 수경사 고대 난입)이 벌어진 마당에 박정권 타도에 더 이상 머뭇거려서는 안 된다고 마음속으로 굳게 믿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을 분단 이후 처음 통일정책의 원칙으로 내건 7·4 남북 공동선언을 흰 눈으로 본다는 것은 민족적 양심으로 허용되겠는가 하는 회의에 빠졌던 것도 사실이다. 박정희는 공동선언 한 달 뒤에 <8·3 기업 사채 동결령>(통칭 8·3 조치)을 내렸다. 불로 소득인 고리의 사채를 금지한다는 것은 사회정의 차원에서는 획기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닌가. 정말 헷갈리게 했다. 그해 유독 장마가 심했던 8월 한 달 남북 직통 전화 20회선을 가설한다던가, 서울과 평양에서 번갈아 가며 네 차례 남북 적십자 회담을 열었으니 이러다가 통일이 머지않아 이루어질 것 같은 환상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이 모든 것은 박정희의 영구 집권용 10·17 쿠데타를 준비하며 그에 반대하는 국민의 저항을 약화시키려는 노림수였다. 데모하다 제적당한 대학생들이 이력서에 고학력을 감추고 공장에 취직할 때 붙이던 ‘위장 취업’의 ‘위장’이란 말은 7·4에서 10·17에 이르는 100일간의 정책을 빗대 꼭 들어맞는다.

구좌파(舊左派, 편의상 7·4공동 선언이 나오기 전의 혁신세력을 그 이후의 민주개혁 세력과 구분하기 위한 내 자의적 표현)의 일부가 7·4 이후 박정희 지지로 돌아서면서 8·3 사채 동결령을 높이 평가했다. 입법부가 엄두를 내지 못한 고리 사채를 금지한 것은 자유민주주의자들에게서 기대할 수 없는 박정희의 용단이란 이야기다. 하지만 60년대 중반 이후의 만연한 부패가 통제받지 않는 정치권력에서 연원한 것이므로 사채 동결령의 경제적 효과는 실상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큰 덩어리의 고리 사채는 권력층의


 

» 임재경/언론인
 
것일 개연성 높다는 뜻이다. 그 방증 하나. 소설 <지리산>으로 이름을 날린 작가 이병주(작고)가 그의 종형 뻘 되는 중정차장 이병두(변호사, 작고)와 나눈 대화를 나에게 들려주었는데 재구성하면 이렇다.

“미남자(김형욱을 당시 권력 주변은 ‘미욱한 남자’로 불렀는데 ‘미남자’는 그 약어)가 영수증도 안 써 놓고 돈을 몇 억씩 자꾸 가지고 가 골치 아프다.”

“중정부장은 돈 쓸 데가 많을 긴데…. 형님도 중정 차장이니 몇 억 갖다 쓰면 될 거 아이오.”

“와 아이라, 나도 차용증서 써주고 2억원 한 1년 썼다.”

“형님, 그 돈 가지고 무얼 했는 기요. 나 술 한잔 안 사주고.”

“중정자금도 나랏 돈인데 우에 술을 사 묵노. 기업체에 맡겼더니 월 4부(%)씩 쳐 주두구마.”




“미남자가 무기징역이면 나랏 돈으로 사채놀이 한 형님은 사형감이요.”

2억원을 연 48%의 높은 이자로 1년간 굴렸다면 이자 총액은 1억원에 가깝다. 조선일보 정치부 차장의 월급은 8·3조치 당시 7만~8만원이었다.


임재경/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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