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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일보> 폐간 이틀 전인 1973년 5월13일 어수선한 편집국에서 기자들이 서성거리고 있다. 사진 <신문은 죽어서도 말한다>(다락원)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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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이란 이상한 직함의 사람들을 큰 체육관 같은 데 몰아넣고 단일 후보 박정희를 대통령으로 뽑게 하였으니 ‘주권재민’의 대한민국 헌법 조항은 사실상 사문화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런 대통령 선출 방식은 보통선거의 4대 원리, 즉 비밀·직접·평등·자유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므로 정치제도가 근대 이전으로 돌아간 것이다. 박정희는 단순한 독재자가 아니라 전제군주였다.
1973년 초 태평로 지금의 ‘코리아나’호텔 자리에 있던 옛 조선일보사 건물 3층 편집국에서 보통선거의 원리를 입에 담는 기자를 나는 본 적이 없다. 10·17 쿠데타와 이른바 ‘유신헌법’이 민주주의를 명백하게 파괴한 것이므로 보통선거 원리 운운하는 것 자체가 바보처럼 비칠까봐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때 2년간의 일본 연수를 마치고 돌아와 편집국의 구석진 데서 심의실장이란 찬밥 신세였던 김경환(60년대 중반 <조선일보> 편집국장)이 나를 보자고 했다. 그는 “정치부에서는 왜 선거제도의 국제비교나 역사적 변천에 관한 해설을 쓰지 않는가”고 묻는 거였다. 내 입에서는 거의 자동적으로 “뻔한 것 아닙니까. 중정에서 못 쓰게 하니까 그렇지요”라는 대답이 나왔다. 내가 프랑스에서 돌아왔을 때 성남 광주단지 소요에 관해 누구에겐가 묻자 ‘뻔한 것’이란 말을 듣고 울화가 치밀었는데 이제 내가 전임 편집국장에게 같은 표현을 쓰게 되니 실소를 금하기 힘들었다. 일류 신문은 허울뿐이고 기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세상 되어 가는 대로 따라가고 있다며 그는 혀를 찼다. 나는 “뻔한 건데 그걸 지금에야 알았나요?” 했다. ‘뻔한 것’이란 말이 나오면 대화는 진전되지 못하는 법이다. 며칠 뒤 김경환은 다시 나를 보자고 했다. 그가 나를 격동시킨 데는 숨은 의도가 있었다.
한양대학 이사장이며 <대한일보> 사주인 김연준(한양대학 설립자, 작고)이 김경환에게 신문제작에 대한 전권을 줄 터이니 대한일보를 일류 신문으로 만들어 달라고 간곡히 당부하더란 것. 조선일보의 인기 연재물인 네 칸 만화 ‘두꺼비’의 안의섭 화백(작고), 편집부장인 조영서(시인), 그리고 나 이렇게 셋과 함께 오면 월급은 언론계에서 대우가 기중 좋은 <중앙일보> 수준보다 높게 해준다는 내용이다. 거기다 차장급인 나를 정치·경제·외신 담당 부국장직에 발령하되 한 달 뒤에 정치부장을 겸임케 한다는 사탕발림이 있었다. 나는 즉석에서 “김연준이 대한일보를 시작한 지 10년이 넘었는데 왜 일류 신문을 못 만들었지요? 낮은 월급에 어떻게 우수한 기자가 모입니까. 김연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나요?”라고 쏘아붙였다. 침착하기로 소문난 김경환은 물러서지 않고 “신문은 사람이 만드는 겁니다. 시간을 두고 우수한 기자를 모으면 돼요. 임형이 스카우트하면 그 기자는 열 명이고 스무 명이고 다 ‘중앙’ 수준의 봉급을 약속합니다”라고 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속담대로 나는 그를 따라 대한일보로 갔다. 1965~66년 리영희와 남재희를 좌우에 거느리고 한때 조선일보를 빛냈던 김경환을 신뢰했던 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다.
내가 간 지 두 달 반 만에 대한일보는 문을 닫았다. 사장 김연준이 72년 홍수 때 독자들로부터 거둔 수재의연금을 횡령·착복한 혐의로 검찰에 끌려가 심문을 받고 신문등록을 자진 철회하는 형식을 취했다. 한국 최대의 사학(私學) 부호인 김연준이 무엇이 모자라 하찮은 규모의 수재의연금을 잘라먹었을까. ‘대한’ 쪽 관계자들의 설명을 종합하면 각 신문사가 모집 캠페인을 벌이는 수재의연금은 일정한 금액에 이르기까지 은행에 예치해 놓았다가 한꺼번에 재해대책본부에 전달하는 것이 관례라는 것. 예치기간에 잠시 인출했다가 재예치한 것을 횡령죄로 뒤집어씌운 것은 박정희의 미움을 샀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폐간과 관련하여 흥미 있는 사연이 들렸다.
육사 8기로서 베트남 파병 맹호사단장을 거쳐 수도경비사령관이 된 윤필용은 청와대 비서실장, 경호실장, 중앙정보부장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박정희의 측근 실세로 꼽혔다. 이런 그가 박정희를 빗대 “노망 운운”한 사석의 말이 도청·보고됐다. 73년 4월 군법회의는 육군 소장 윤필용을 일등병으로 강등시키고 징역 15년이라는 중형에 처했다. 그런데 김연준이 윤필용과 친히 지내며 자신이 소유한 시청 앞의 ‘프레지던트’ 슈트룸 하나를 공짜로 빌려주었다는 것이다.
임재경/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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