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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4년 10월24일 <동아일보> 편집국에서 기자, 프로듀서, 아나운서 등이 자유언론실천선언을 열고 있다. 이는 75년 3월 사상 초유의 언론인 대량해고 사태로 이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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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학동의 한국일보사 사옥으로 처음 출근하던 날 아침 버스 안에서 만감이 교차했다. 곧 장기영을 만날 판이니 ‘이게 무슨 팔잔가’ 하는 탄식이 절로 나왔다. ‘사주께서 부총리로 계실 때 제가 철없이 날뛰었으니 너그럽게 용서해주사이다’라 해야 순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뇌리를 스쳤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건 안 돼! 그렇게 나가면 장기영이 나를 우습게 볼 것이고 결국은 내가 평생 후회하게 될 거야’라며 마음을 다잡았다.
한국일보사 본건물 뒤 부속건물 4층의 사주실에서 만난 장기영이 반기는 표정은 물론 아니었다. 사무적인 어조로 “임재경씨는 경제사설도 잘 쓰고 신문 경영도 할 수 있는 사람이란 걸 내가 알아요” 했다. 지금은 어딜 가도 들어보지 못하는 서울 토박이 중인 말씨와 억양인데, 그 특유의 ‘넌센스’ 화법이다. 남대문 밖 이태원에서 태어난 그는 ‘선린상업’을 졸업하고 일제 때 조선은행(한국은행 전신)에 들어가 광복 뒤 한국은행 부총재까지 지낸 입지전적 인물이다. 그에게서 빼놓을 수 없는 이력은 한국은행을 그만둔 1950년대 초 경영난에 허덕이던 <조선일보>가 그를 전문경영인(CEO)으로 초빙해서 잠시 사장으로 일했던 시기다. 그런데 헤어질 때 양자의 관계가 퍽 좋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조선일보에 있을 때 들었다.
내가 한국일보사에 갔을 때 홍유선(작고)이 주필, 주효민이 부주필이었다. 이 둘은 까다로운 장기영의 사설 취향을 맞추며 정권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는 데 이골이 나 있었다. 현역 언론인 가운데 최고령이라는 70대의 유광열(작고)이 거기에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 ‘나잇값을 못한다’는 말이 무색하리만큼 역겨웠다. 50대의 박동운, 이열모, 조경희(예총회장 역임), 김정태, 윤종현(논설주간 역임), 40대의 김용구(코리아 타임스 편집국장 역임, 80년 해직), 예용해(작고), 정광모(소비자연맹 회장), 이형(80년 해직) 등으로 다양한 성향이 뒤섞였던 점이 다른 신문과 조금 달랐다. 개중 나이가 젊었고(37), 다른 고장에서 뛰어든 몸이라 나는 말조심으로 일관했다. 그러다가 일이 터졌는데 74년 10월24일 <동아일보> 기자들이 “신문-방송-잡지에 대한 어떠한 외부간섭도 우리의 일치된 단결로 강력하게 배제한다”는 자유언론 실천선언을 들고 나왔을 때다.
김용구·이형 두 논설위원이 오전 논설회의에서 10·24 자유언론 실천선언을 ‘절제된 형태’로나마 지지한다는 사설을 써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이열모·예용해와 내가 거기에 동조하자 회의 분위기는 급변해 10·24 지지론이 굳어져 마침내 사설 제목으로 채택됐다. 부대조건으로 사주나 외부 압력으로 논설회의 결정이 번복될 때는 본지(한국일보)와 자매지(서울경제신문)의 사설 및 칼럼(‘지평선’과 ‘메아리’)의 집필도 거부한다는 결의를 달았다. 그러나 이런 논설회의의 결정이 통할 리 만무했다. “그러면 좋다. 우리는 오늘 할일이 없으니 퇴근한다”며 김용구가 앞장서 사무실을 비우기 시작했다. 그날은 내가 서울경제신문에 사설을 쓸 차례였는데 아랑곳하지 않고 점심시간에 퇴근했다. 그러나 주필과 부주필, 그리고 유광열은 회사에 남아 사설 두 토막과 칼럼 두 편을 생산하는 열
성을 다해 ‘사설 없는 신문’이라는 자유언론의 영광스러운 흔적을 남기지 못하고 말았다. 여기서 한 가지 터득한 것은 반면교사로서 유광열의 존재다. 나이가 들어 원로로 행세하려면 유광열처럼 구차스런 처신은 안 된다는 교훈이다.
조금 되돌아가 73년 늦은 가을 한국일보로 가기 전인가 보다. 관철동 ‘한국기원’에서 바둑을 두는 나를 백낙청과 ‘호협’ 박윤배가 만나러 왔다. “지금 바둑 둘 땐가. 술타령하며 입으로만 ‘언론 자유’ 하면 무얼 해? 신문이 아닌 다른 곳에 글 좀 써라” 하고 격한 목소리로 박윤배가 나를 몰아세웠다. 이어 백낙청이 “네 지식과 언변이면 <창작과 비평>에 훌륭한 글을 얼마든지 쓸 수 있어”라고 거들었다. 이때 두 친구의 말은 가감없이 우정 어린 질책이었다. 그래서 쓴 것이 <창작과 비평>‘1974년 봄호’에 나온 200자 원고지 150장 분량의 ‘아랍과 이스라엘’이다. 훗날 민청학련 사건으로 교도소에 있던 유인태(전 청와대 정무수석, 재선의원)가 이 글을 읽고 감명을 받았다고 말했을 때 두 친구의 질책을 재삼 고맙게 느꼈다.
임재경/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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