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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3년 8월14일 도쿄에서 납치됐다가 살아돌아온 김대중씨가 동교동 자택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그러나 신문들은 이 사건을 축소보도했다. <보도사진연감>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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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5월 <대한일보>의 폐간으로 나는 실업자가 됐다. 그해 여름과 초가을 몇 달은 밥벌이를 못 한다는 불안감보다 지긋지긋한 ‘허위의 공간’에서 벗어난 기분으로 날아갈 듯했다. ‘허위의 공작실’이라 썼다가 너무 지나치다 싶어 ‘허위의 공간’이라 고쳤는데 여하튼 신문사 편집국을 가리키는 것이다. 신문이 크고 중요한 사실을 외면하면 자질구레한 사안들을 보도하게 되고, 아무리 정확을 기한다 해도 사회는 진실로부터 멀어져 마침내 허위가 판을 치게 된다는 뜻이다. 정부의 발표문을 신문에 옮기는 데 국민을 의도적으로 기만할 의도로 펜대를 굴리는 기자는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정부의 발표 내용에 의문을 갖고 분석·탐사·해설·논평을 하지 않을 때 신문은 국민을 속이는 집권자와 공동 정범이나 아무 다를 게 없다. 이를테면 73년 8월 김대중을 도쿄에서 납치-결박하여 배에 싣고 왔을 때 신문들이 단순히 ‘동경 실종 김대중, 서울 자택 귀환’으로 표제를 달고는 만족한 것이 그 좋은 보기다. 남을 속이는 일을 장기간 반복적으로 하면 자신이 만들거나 가담한 허위를 믿게 되는 이상한 정신 상태에 빠지는 법이다. 그러나 이성을 가진 인간은 자기기만에 무한정 안주하지는 못한다.
김연준이 잘 있는 사람을 실업자를 만들어 몹시 미안하다며 50만원을 김경환을 통해 전별금조로 보냈다. 두 달 일하고 받은 퇴직금으로는 큰돈이다. 더구나 <조선일보>의 퇴직금은 까먹지 않았던 터라 당장 생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나는 신나게 놀러 다녔다. 앞서 말한 ‘파격’ 채현국과 ‘호협’ 박윤배 이외에 흥국탄광에 관계했던 여러 친구 김이준·김진웅·이선휘가 실업자를 위로한답시고 만날 때마다 술을 샀다.
1년 만에 위치가 뒤바뀌어 이번에는 남재희가 나를 <서울신문>의 경제부장으로 오라는 거였다. 내가 조선일보를 버리고 나온 터라 그의 제의를 좋은 말로 거절한 뒤 <서울경제신문>의 경제부장 정태성(<서울경제> 편집국장, <매일경제> 주필 역임, 작고)을 천거했다. 또 한번은 조선일보 수습기자 시설 정치부 차장이었던 김인호(<중앙일보> 편집국장, 전주제지 사장 역임, 작고)가 대한상공회의소의 무슨 부장 자리가 비었다며 거기 갈 의향이 없느냐고 했다. 고맙다는 생각보다는 ‘얼마나 처량하게 보였기에’ 하는 자격지심이 들어 짧게 그럴 생각이 없노라고 물리쳤다. 영어로 하자면 ‘노 생큐’ 해야 될 일을 ‘노’라 했으니 어느덧 내가 사람관계에서 우를 범하는 길에 들어서 있었던 것이다.
한양대학교 교수가 된 리영희는 이따금 나를 불러 술을 샀는데 1차로 끝나지 않고 2차, 3차로 이어져 간혹 밤을 새우며 마셨다. 통행금지(자정에서 새벽 5시)가 있던 시절이라 철야로 값싸게 마실 만한 장소는 허름한 데가 아니면 안 되었는데, 그러다 한번은 일제 단속에 걸려 동대문서 유치장에 갇혔다. 통금 위반자는 다음날 즉심에 회부되어 약식 판결을 받아야 하므로 대학교수 리영희는
자칫하면 입방아에 오를 것 같아 나는 꾀를 냈다. 유치장 담당 경관에게 다가가 현금을 주머니에 찔러주며 “저분은 교수인데 오늘 아침 학교에서 시험감독을 해야 하니 즉결에 보내지 말고 풀어 달라”고 사정했다. 경관은 통금이 해제된 다음 그를 풀어주었지만 나는 끝내 즉심에 회부되어 벌금을 물고 오후에야 집에 왔다. 35년 전의 조그마한 일이 잊혀지지 않는 것은 집에 와 그날치 신문을 보니 ‘김대중 동경 실종 서울 귀환’이란 기사가 실렸기 때문이다.
그해 초겨울 대한일보에 같이 갔던 안의섭의 네 칸 만화 ‘두꺼비’가 <한국일보>에 선을 보였다. 인기 있는 네 칸 만화를 보는 독자의 수는 사설 독자의 열 배라는 말이 있었는데, 그 말이 맞았던 모양이다. 당시 <동아일보>의 ‘고바우’와 쌍벽을 이루던 두꺼비를 ‘한국’이 탐내는 것은 정한 이치다. 치밀한 계산의 소유자 김경환은 두꺼비를 ‘한국’에 보내며 그 사주 장기영과 일종의 단체교섭을 벌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지 않았으면 7∼8년 전 자기에게 물불 가리지 않고 대들던 임재경을 받아들였을 리 만무하다. 74년 1월1일자로 한국일보사 논설위원 발령이 났다. 김경환과 조영서도 같이 갔다.
임재경/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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