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퇴행, 안전하고 쉬운 돈벌이의 유혹
중독성 짙은 후렴구 반복 ‘30초짜리 음악’
이혼·파혼·악녀…‘클리셰’ 남발 드라마
찍어내는 그림 ‘지클리’…‘뮤비컬’ 되풀이
 
 
한겨레 길윤형 기자 하어영 기자
 








 
‘불황 때는 미니스커트가 유행’하게 마련이다. 사람들은 지친 마음을 풀기 위해 말초적 자극을 선호하고, 그에 기댄 문화 자본은 쉬운 돈벌이를 찾는다. 혁신적 사고는 멈추고, 비슷한 관습이 되풀이되며, 문화적 활력은 질식된다. 이른바 문화의 ‘퇴행’이다. 2009년 한국 문화계에 이 퇴행의 바람이 몰아칠 기세다.




 

» 원더걸스(사진)
 
■ “미쳤어, 미쳤어~!”…중독된 사람들

퇴행의 징후는 ‘30초 음악’들이 석권한 대중 음악계에서 분명하게 감지된다. ‘30초 음악’은 ‘싸비’나 ‘훅’이라고 불리는 중독성 짙은 후렴구로 무장한 가벼운 댄스곡이다.

30초 음악은 2007년 ‘원더걸스(사진) 신드롬’을 몰고 온 <텔미>에서 시작됐다. 박진영이 작곡한 이 노래는 기승전결로 이어지는 기존 노래 형식을 과감히 포기하고, 인상적인 후렴구를 반복하는 방식으로 소비자들을 중독시켰다. 이후 ‘싸비’의 반복으로 곡을 단순화한 작곡가 ‘용감한 형제’가 곡을 쏟아내면서 30초 음악은 보편화됐다. 지난 한 해 동안 그의 손을 거쳐 손담비의 <미쳤어>, 빅뱅의 <마지막 인사>, 브라운 아이드 걸스의 <어쩌다> 등이 성공을 거뒀다.

이런 현상의 배경에는 시장 구조의 변화가 있다. 음반 시장의 불황에도 불구하고, 2007년 음악 시장 전체 매출은 4350억원(추정치)을 기록해, ‘황금기’인 1997년의 4104억원을 넘어섰다. 그러나 음반(시디) 매출은 전체의 15%(650억원)에 불과하다. 나머지 3700억원은 벨소리·컬러링·홈페이지 배경음악 다운로드 등 디지털 시장에서 나왔다.

디지털 음악 소비자들은 ‘벅스뮤직’ 등 음악 사이트에서 무료 ‘30초 듣기’를 통해 구매 여부를 결정한다. 음악평론가 김작가는 “이런 흐름이 이어지면 10곡 정도 일관된 흐름을 가진 앨범의 중요성은 줄어들고, 3~4분 짜리 싱글, 그 안에서도 30초 정도의 후렴구로 음악의 가치가 판단되는 매우 부정적인 상황이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그 때문에 실력 있는 뮤지션들은 정규 음반을 포기하고, 3~4곡을 묶는 미니 음반이나 싱글 음반으로 전환하는 추세다. 한때 200만장 넘는 판매고를 기록한 신승훈은 지난 9월 ‘모던 록’을 가미한 새로운 음악적 시도로 평단의 주목을 받았지만, 최악의 음반 판매를 기록했다.



 

» 너는 내 운명
 
■ ‘조폭에서 막장으로’…파국의 초입?




‘퇴행’의 또 다른 무대는 브라운관이다. 최근 한국 드라마를 설명하는 열쇳말은 ‘막장’이다. 9일 종영하는 한국방송 일일드라마 <너는 내 운명>(사진), 에스비에스 <아내의 유혹>, <유리의성>, 문화방송 <내 인생의 황금기> 등은 극단적 고부관계, 이혼·파혼, 악녀·나쁜 남자 등 80~90년대 한국 드라마의 ‘클리쉐’들을 남발하며 막장으로 치닫는 중이다. 문화방송 <에덴의 동쪽>은 또 다른 막장 드라마 <흔들리지마>의 작가를 영입하기도 했다.

이는 영화계의 ‘조폭 코미디’ 제작 붐과 비교된다. 영화계는 <쉬리> 이후 한국 영화에 대한 관심이 폭발하자 큰 제작비를 들이지 않고도 관객들을 모을 수 있는 <조폭마누라>류의 ‘조폭물’을 되풀이해 제작했다. 당장 관객몰이에는 성공했지만, 장기적으로는 ‘독배’를 든 꼴이었다. 그 결과가 최근 영화 산업의 위기다.

드라마의 ‘막장화’도 산업적 근거는 있다. 드라마 산업은 배우와 제작자 사이에 출연료 분쟁이 시작될 정도로 위축됐다. 막장 드라마는 싼 제작비로 기본적인 시청률이 보장된다. ‘나쁜 남자-가련한 여자’(또는 반대의 설정), ‘출생의 비밀’, ‘복수를 위한 성공’ 등은 80년대 임채무·김희애 주연의 <내일 늦으리>, 90년대 이종원·심은하 주연의 <청춘의 덫> 등 수많은 인기드라마 속에서 되풀이돼 왔다. 이런 점에서 막장화는 복고화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대중문화평론가 강명석씨는 “2000년대 이후 드라마들이 새로운 시도로 한국 드라마의 부흥을 몰고 왔지만, 최근은 80~90년대로 돌아가는 복고의 흐름”이라며 “이는 분명한 퇴행”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드라마 산업 전반의 장기 위축에 대한 우려가 나오고 있다. 한국방송영상산업진흥원은 2001년 이후 해마다 40~70%씩 고성장을 한 드라마 등 방송물의 수출 증가세가 2008년에는 5% 안팎으로 꺾였을 것으로 추정했다.

■ ‘판화처럼 찍어내는 그림’…새로운 시도는 없다 미술과 뮤지컬도 예외는 아니다. 미술계에서는 최근 ‘지클리’라고 불리는 새로운 작품 제작·판매 방식이 등장했다. 지클리는 원작을 슬라이드로 찍어 특수 캔버스에 인쇄한 뒤 작가가 그 위에 물감을 덧칠한 그림이다. 지클리를 두고 그림을 싼 값에 사고 팔 수 있는 새로운 기법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예술가의 새로운 창작 욕구를 가로막는 독약이라는 혹평이 제기되고 있다.

지난해 뮤지컬계의 흥행 화두는 ‘뮤비컬’이었다. 영화나 드라마로 검증된 각본을 토대로 만든 뮤지컬이다. 그 흐름은 2006년 <싱글즈>에서 <안녕 프란체스카>, <파이란>, <내 마음의 풍금>, <대장금>을 거쳐 최근 흥행작인 <미녀는 괴로워>까지 이어진다. 대작이 사라지고 2~3명의 스타를 내세운 로맨틱 코미디로 뮤지컬이 소품화하는 현상도 문제로 지적된다.


길윤형 하어영 기자, 김학선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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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자는 빈 컵… 뭐가 담길지 기다릴뿐”









“무섭게 생겼다고요? 중학교 이후로 싸움 해본 일 없어요.” 지난해 국내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휩쓴 배우 김윤석은 “배우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며 “어떤 배우가 자신이 정점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엄청난 착각일 것”이라고 말했다. 손택균 기자
지난해 ‘추격자’로 6개 국내 영화제 남우주연상 독식 김윤석

《실핏줄 터져 붉어진 흰자위. 다듬지 않은 거친 수염. 지난해 6개 국내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독식한 ‘추격자’의 여광()은 없었다. 하반기 개봉할 영화 ‘전우치’ 촬영에 새해 벽두부터 전력투구하고 있는 배우 김윤석(42)을 3일 오후 서울 강남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연말 술자리 때문에 얼굴이 안 좋으냐고요?(웃음) 전국을 누비는 ‘전우치’ 촬영에 기분 낼 짬이 없었습니다. ‘범죄의 재구성’ ‘타짜’의 최동훈 감독이랑 세 번째 같이 하는 영화인데, 액션 장면이 많아 재미있는 만큼 힘이 좀 드네요.”

범죄의 재구성에서 배경 인물로 나왔던 그가 연기파 주연배우로 발돋움하는 데 걸린 시간은 4년. 하지만 김윤석의 연기 데뷔는 198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향 부산의 극단 ‘현장’이 올린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가 첫 무대였다. 3분 정도 나오는 신문팔이 소년 역할이었지만 긴장해서 잘 걷지도 못했다.

1995년 장사를 하겠다며 무대를 떠났다가 2000년 돌아왔을 때, 극단 연우무대에서 함께 활동했던 송강호는 최고 배우로 자리를 굳히고 있었다. 동갑내기 친구가 연말 영화제를 휩쓰는 모습을 그는 오랫동안 TV를 통해 지켜봤다.

“질투요?(웃음) 강호 씨가 잘되는 모습은 언제 봐도 신나요. 가장 좋아하는 배우고 항상 생각하는 친구인데요. ‘연기 다시 같이 하자’고 채근하던 강호 씨가 시상식 무대에서 건네 준 상패를 손에 쥐었을 때 ‘이렇게 벅찬 순간이 살면서 몇 번이나 있겠나’ 싶었습니다.”

불혹() 뒤에 거머쥔 성공에 대해 김윤석은 “실감이 안 나고 부담도 없다”고 말했다.

“좋은 영화를 만난 덕분에 최고의 한 해를 보냈죠. 배우 혼자만의 능력으로 거둘 수 있는 성취는 없어요. 좋은 작품, 감독, 배우가 모여야 하죠. 모든 작품이 그렇게 베스트일 수 있나요. 느낌대로 편안하게 가면서 주어진 일에 집중할 뿐입니다. 그러다 보면 또 최고의 순간이 오겠죠.”

그는 인터뷰 뒤 사진 촬영에서 좀처럼 웃지 않았다. 셔터를 누를 때마다 어떻게든 웃겨 보려는 기자에게 미안한 듯 말했다.

“가식적으로 밝은 표정 짓는 걸 싫어해요. 억지웃음을 짓기보다는 무표정하게 사람들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는 게 좋아요.”

멜로드라마 주연을 맡겨도 무뚝뚝한 표정을 고집할까.

“험악해 보인다고요? 선입견 참 무섭네요. ‘타짜’ 전에 알던 사람들은 ‘당신처럼 순하게 생긴 사람이 무슨 악역을 하느냐’고 했다니까요. 김윤석이라는 배우의 독특한 ‘결’은 있죠. 하지만 그 결 위에는 어떤 캐릭터든 다 담아낼 수 있습니다.”

무대에서나 일상생활에서 한복을 거의 입어 본 적이 없는 그에게 ‘전우치’의 화담 서경덕 역할은 색다른 도전이다. ‘천하장사 마돈나’ 때 딱 한 번 경험한 와이어 액션을 거의 매회 해야 하고, 신비한 도인 화담의 캐릭터를 현대적 감각에 맞게 만들어 내야 한다.

“사료에 기록된 선비 화담과 야사 소설에 등장하는 도사 화담의 이미지가 많이 달라요. 500년의 시공을 넘나들면서 자기 정체성을 고민하는 인물로 새롭게 그려보려 하고 있습니다.”

김윤석의 2009년 첫 작품은 상반기 개봉할 코믹 스릴러 ‘거북이 달린다’. 그는 평화로운 시골 마을에 나타난 탈주범을 쫓는 어수룩한 형사로 나온다. 전우치의 화담도 주인공을 잡으러 다니는 인물. ‘추격’하는 캐릭터로 관객에게 각인될 염려는 없을까.

“멜로도 결국 남자와 여자가 서로 쫓고 쫓기는 얘기잖아요.(웃음) 쫓아야지 관계가 생기고 드라마가 이뤄지죠. 저는 배우가 빈 컵이라고 생각해요. 추격자 같은 강한 블랙커피를 비운 뒤 우유가 담길지 물이 담길지 컵은 알 수 없죠. 그저 잘 비우고 닦으며 기다리는 거예요. 촬영현장 사람들과 함께 느끼는 저릿한 ‘정점’을 기대하면서 말이에요.”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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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기획] 작가가 뽑은 작가의 책 ① [중앙일보]


숨기고 싶은 속마음을 끝내 발가벗기는 집요함
신경숙 → 박완서의『친절한 복희씨』



 
  신경숙(46)씨의 글은 사람을 울린다. 실컷 울고 난 뒤 툭툭 털고 일어나게 한다. 출간 한 달 만에 15만 명이 읽은 장편소설 『엄마를 부탁해』(창비)가 그랬다. 한국 문단의 든든한 기둥으로 자리잡은 그녀는 “(독자도, 작가도) 행복하라고 (글을) 쓴다”고 했다. ‘작가가 뽑은 작가의 책’ 원고를 쓰면서도 그랬단다. [창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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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박완서 선생의 새 책을 갖게 되면 일단 읽기 전에 그 책을 품에 꼭 안아본다. 뺨에 대고 부벼도 본다. 무조건 감사해서다.

그 연세에 그것도 수많은 독자들을 감동시키는 작품을 계속 쓰고 계시다는 것은, 매번 글을 쓸 때마다 무슨 커다란 장벽 앞에 선 듯해 아득해지는 나 같은 후배에게는 무조건 우러러보이는 일이다.

『친절한 복희씨』(문학과지성사)를 읽었을 때 선생에 대한 탄성은 최고조였다. “아휴, 선생님도 참!” 연발, “아휴, 선생님도!”하면서 이미 계간지에 발표될 때마다 챙겨 읽었는데도 단행본으로 묶여져 있는 9편의 단편들을 매편 아껴가며 그러나 아주 빨리 읽었다. 좀 천천히 읽고 싶어도 박완서 선생의 소설은 그럴 수가 없다. 이유는 독자들이 더 잘 알 것이다. 징그러울 정도로 사람의 속마음을 꿰뚫어보는 시선을 벗어날 길이 없다.

그것도 내가 숨길 수 있으면 숨겨서 남은 모르게 하고 싶었던 것들이 속속들이 발가벗겨지는데, 참 기묘한 것은 그것이 통쾌할 뿐 아니라 마음이 치유되는 느낌까지 든다는 것이다.

『친절한 복희씨』에 실린 작품들은 선생 세대를 위해 바친 글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 세대들이 겪은 노고와,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은 꿈(가끔 그 꿈은 사랑이나 복수로 실현되기도 한다)들이 때로 격렬하게 때로 여일하게 흘러가는 강물처럼 살아서 꿈틀거린다. 인생을 거의 다 살아낸 이들이 화자로 등장하기 때문인지 ‘실버 문학’의 탄생이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지만 나는 지하철 안에서 오히려 젊은 친구들이 『친절한 복희씨』에 푹 빠져 있는 모습을 종종 보았다.


 
 
내 대학생 조카의 책상 위에도 『친절한 복희씨』가 놓여 있었다. 내가 무심코 조카에게 “재밌냐? “ 물으니 바로 “네, 재밌어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어느 세대에도 갇히지 않는 소통의 힘이 『친절한 복희씨』 안에 살아 숨쉬고 있다는 증거다. 나는 그 힘을 인생에 대한 깊은 연륜을 바탕으로 한 박완서 선생의 통찰이 이룬 쾌거라고 본다.

이처럼 선생의 소설은 재미있게 단숨에 읽히지만 오래 두고두고 되씹게 만든다. 거기엔 인생의 단맛과 쓴맛, 인간의 아름다움과 추악함을 두루 꿰뚫어본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풍부한 울림이 담겨 있다. 선생의 글은 신랄하면서도 사람에 대한 애정의 끈을 놓지 않으며, 웃음을 자아내면서도 쉽사리 현실에 안주하게 만들지 않는다. 선생 특유의 긴장, 유머, 까탈스러움이 새해에도 계속되어 어서 다음 책을 품에 안아볼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고대한다.

◆『친절한 복희씨』=박완서(78)씨가 2007년 발표한 소설집이다. 표제작 ‘친절한 복희씨’는 영화 ‘친절한 금자씨’(2005)의 제목을 패러디했다. 열 아홉 꽃다운 나이에 애 딸린 홀아비와 결혼해 오남매에다 손자 손녀까지 길러냈지만 말년에 중풍 걸린 남편을 돌봐야 하는 처지에 놓인 화자 복희씨의 이야기다. 2001년 제 1회 황순원문학상을 받은 ‘그리움을 위하여’도 담겨있다. 총 9편의 단편은 대개 황혼에 접어든 노인들의 신산한 삶을 따뜻하게 보듬는 작품이다.





◆신경숙=1963년 전라북도 정읍 출생. 85년 ‘문예중앙’으로 등단했다. 대표작으로 『풍금이 있던 자리』 『오래 전 집을 떠날 때』 『외딴방』 『기차는 7시에 떠나네』 『리진』 『엄마를 부탁해』가 있다. 한국일보문학상·현대문학상·만해문학상·동인문학상·이상문학상·오영수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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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집 2009-01-10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친절한 복희씨>는 두 번이나 반복해서 읽었더랍니다.
두 분 다 제가 좋아하는 작가네요.
 

[BOOK | 한기호의 독서노트] 새해 10대 키워드 ‘BIG CASH COW’


기사입력 2009-01-07 09:44


[주간동아]




김난도·권혜진·김희정 지음/ 미래의창 펴냄/ 256쪽/ 1만3000원



나는 2006년 말 그해의 대표 키워드로 ‘나만의 행복 추구’를 뽑았다. 여기서 말하는 행복은 성공의 대체물이다. 2000년대 초반에 대중은 변화의 중요성을 깨닫고 남보다 빨리 변해 어떻게든 성공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대중은 자신의 삶을 옥죄는 것이 국가 차원을 넘어선 어떤 강력한 외부의 힘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2008년은? 글로벌 금융위기가 전 세계를 덮치는 바람에 이제 개인은 누구나 자신의 마음이라도 잘 다스리면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자기치유(self-healing)의 거센 물결이 인 것이다. 이런 흐름을 잘 탄 소설이 신경숙의 신작 장편소설인 ‘엄마를 부탁해’(창비)다. 누구나 칼날 위를 걷는 것처럼 힘겨울 때는 엄마를 떠올리고 과거를 추억하게 된다. ‘개밥바라기별’(황석영), ‘완득이’(김려령), ‘리버보이’(팀 보울러) 등 2008년에 잘 팔린 소설이 모두 성장소설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시대의 산물로 봐야 한다.
‘엄마를 부탁해’는 두 요소가 겹쳐 있다. ‘자기치유’라는 시대 흐름에 부합하면서 엄마라는 존재를 결정적으로 그려낸 소설이다. 불과 한 달 만에 20만부를 발행했는데 이런 추세라면 곧 밀리언셀러 고지에도 오를 전망이다. ‘메가트렌드’부터 ‘마이크로트렌드’까지 외국산만 넘쳐날 뿐 우리 현실을 적절하게 다룬 책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앞으로 그런 일을 자임하겠다고 나선 한 그룹이 책을 내놨다.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가 펴낸 ‘트렌드 코리아 2009’다. 소비트렌드분석센터는 2007년부터 연초에 그해의 트렌드 예측을 발표하기 시작했는데 그 내용을 책으로 펴낸 것은 처음이다.
이 책에서 발표한 2009년 10대 키워드의 첫 글자를 모으면 ‘BIG CASH COW’다. 캐시 카우란 지속적으로 현금 흐름을 창출하는 사업부문을 뜻하는 용어인데, 전반적인 불경기가 지속될 것으로 보이는 2009년에 우리나라가 넉넉한 수익을 지속적으로 창출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작명했다고 한다.
그러면 일단 10대 키워드를 순서대로 알아보자. Better Me(스펙을 높여라). 날로 경쟁이 치열해지는 21세기 지식사회에서는 스펙(자격 조건)을 높여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I’m So Hot(난 너무 멋져). 제멋으로 살면서 자신의 감정과 일상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전파하는 데 놀라울 만큼 적극적인 사람들의 전성시대가 도래했다. Gotta be Cocooned(다시 집으로). 안전한 환경에서 안정을 취하고 육체적, 정신적으로 재충전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집에 머무르는 사람이 늘어난다. 그들은 혼자만의 세계에 유폐적으로 몰입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 사회와의 연결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집에서도 즐겁게 놀거나 자기 능력을 계발하기 위해 노력한다.
Cross-Internetization(생각대로 인터넷). 휴대전화, 유선전화, TV, 내비게이션 같은 다양한 생활밀착형 기기를 통해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남녀노소가 일상적으로 인터넷을 활용하게 된다. Alpha-mam, Beta-Dad(아빠 같은 엄마, 엄마 같은 아빠). 최대한의 효율성을 추구하며 적극적으로 재테크에 나서는 통제형·리더형 엄마와 부드럽고 자상하게 자녀를 돌보고 언제라도 가사를 맡을 수 있는 따뜻한 아빠가 늘어난다. Simply, Humbly, Happily(소박한 행복 찾기). 거창한 출세나 사회적 성취보다 일상의 행복을 추구하는 경향이 짙어진다. Hobby-Holic(취미 대한민국). 취미생활에서도 전문가 수준의 지식과 실력을 갖춰 무엇이든 수준급으로 즐기는 인구가 크게 늘어난다.
Casual Classics(고급문화, 일상 속으로). 오페라, 순수미술, 고전음악, 발레, 와인 등 다양한 고급문화 아이템이 대중의 삶과 더 가깝게 일상화된다. Off-Air Attitude(무심한 듯 시크하게). 언뜻 무심하게 보일 정도로 노력한 티가 드러나지 않지만 실제로는 굉장히 세심하게 자기연출을 한다. Wanna-Be-Star, Wanna-Be-Mass(스타와 대중, 자리 바꾸기). 스타는 일반화하고 일반 대중은 스타화하는 일이 늘어나 스타와 대중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앞에서 언급했던 ‘엄마를 부탁해’는 이 중에서 소박한 행복 찾기를 비롯한 몇 가지 트렌드와 맞물린다. ‘트렌드 코리아 2009’는 이처럼 소비 트렌드에 대한 총체적 분석과 소비가치에 대한 심층적 분석을 통해 미래를 예측한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어떤 것들이 소비 트렌드와 접목될 수 있는지를 꼼꼼하게 살펴볼 수 있다. 무엇보다 개별 트렌드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예시되는 수많은 사례가 당신의 상상력을 무수히 자극할 것이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khhan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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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이홉 - 문인수 

누가 일어섰을까. 방파제 끝에 

빈 소주병 하나, 

번데기 담긴 종이컵 하나 놓고 돌아갔다. 

나는 해풍 정면에, 익명 위에 

엉덩이를 내려놓는다. 정확하게 

자네 앉았던 자릴 거다. 이 친구, 

병째 꺾었군. 이맛살 주름 잡으며 펴며 

부우- 부우- 

빠져나가는 바다, 

바다 이홉. 내가 받아 부는 병나발에도 

뱃고동 소리가 풀린다. 

나도 울면 우는 소리가 난다. 

 

- <배꼽> 창비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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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푸른고개 2009-01-03 2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4개월만에 시 한편을 읽어본다. 여의도 국회의사당에 신분을 숨긴 경찰이 들어간 날이다. 삶이 팍팍할수록 시를 읽는 마음을 놓지 말아야 할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