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사람들이 지은 감자농사, 풍년입니다
아이들 위한 '행복한 울력'에 동참했습니다
텍스트만보기   임윤수(zzzohmy) 기자   
▲ 감자 캐는 사람들의 표정, 풍년과 행복 그 자체입니다.
ⓒ 임윤수
칠순을 훨씬 넘기신 노스님과 할머니는 물론 감자를 캐던 모든 사람들이 뽀얗고 커다란 감자를 양손 가득 들어 올린 채 "젊은 양반이 이 맛 알겠시유"하며 환한 웃음으로 수확의 기쁨을 나타내십니다.

감자농사가 잘 됐기 때문에 일을 하시면서도 기분들이 좋으신가 봅니다. 끄무레한 날씨 탓에 쨍쨍한 햇살이 내려 쬐는 건 아니지만 장마철이라 그런지 후텁지근한 그런 오후입니다.

두둑을 거반 깔고 앉은 채 감자를 캐셔야 할 만큼 나이가 드신 할머니셨지만 일하시는 손길은 가볍게만 보입니다. 새댁시절부터 농사일을 하셨던 할머니기에 일머리를 알고 계셔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지금 캐내는 감자가 당신의 손자나 증손자가 다닐 유치원을 건립하는데 주춧돌이 되고 종자돈이 될 거라고 생각하니 마음조차 기꺼우신 모양입니다.

▲ 제일 먼저 어른 허리만큼 자란 감자싹을 뽑았습니다.
ⓒ 임윤수
▲ 이어서 밭둑을 감싸고 있던 비닐을 걷어냅니다.
ⓒ 임윤수
진천 보탑사에서는 석 달 전인 지난 3월 22일, 씨감자 쭉쭉 삐져 유치원을 짓기 위한 주춧돌을 마련하겠다며 감자를 심었습니다. 그때 심은 감자를 지난 금요일(23일) 수확한다고 하기에 감자밭엘 다녀왔습니다. 비탈진 산밭, 겨울을 지나 불모지처럼 아무것도 없던 땅을 갈아엎어 둑을 만들고, 그 둑에 비닐을 씌우고 촘촘하게 구멍을 뚫어 씨감자를 넣었습니다.

아직은 찬기가 남아있어 따뜻한 양지를 찾게 하는 3월, 나이 젊은 새댁부터 나이 지긋한 할머니까지 함께 어울려 울력으로 감자 씨를 쪼개고 씨감자를 넣더니 어느새 수확할 때가 된 것입니다.

감자를 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나 감자 싹이 점차 무성해 지더니 어느덧 하얀 꽃들을 피웠습니다. 튼실한 감자를 얻기 위해 꽃대를 잘라내던 게 며칠 전 같은데 어느새 수확을 할 때가 된 것입니다. 감자를 심으며 워낙 흙살이 좋아 농사가 잘될 거라고 하더니 정말 땅속에는 주먹만한 감자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습니다.

여름이 시작된다는 하지(夏至)였던 지난 수요일(21일) 감자를 캐려 했으나 장마철로 접어든 때라 그런지 날씨가 궂은 바람에 기약 없이 감자 캐기를 미뤄야 했습니다. 그러다 날씨가 괜찮을 것 같아 23일 갑작스레 감자 캐기를 하게 된 것입니다.

▲ 한 사람씩 밭둑에 올라 앉아 감자를 캐냅니다.
ⓒ 임윤수
▲ 감자 캐기 울력에 스님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 임윤수
진즉부터 생업이나 시간에 제한을 받지 않는 분들에게 감자 캐기 울력에 동참해 줄 것을 부탁했던 터라 몇몇 분들에게 전화를 하여 감자를 캘 거라고 홍보를 하였습니다. 정말 갑작스런 결정임에도 내 일처럼 모여 준 감자캐기 일꾼은 무려 22명이나 되었습니다.

감자를 심을 때도 그랬지만 감자를 캘 때도 감자농사를 짓는 목적이 '심성 바른 아이들을 키워내기 위해 유치원을 짓기 위한 종자돈 마련'임을 충분하게 설명해 그런지 여건이 되는 분들이 보시를 실천하고 봉사하는 마음으로 감자 캐기 울력에 동참한 것입니다.

어른 허리만큼이나 웃자라 있는 무성한 감자 싹들을 걷어내고 비닐을 걷어냅니다. 비닐에 가렸던 도톰한 두둑이 황토 빛으로 드러납니다. 포슬포슬한 황토흙이 부드럽기만 합니다. 두둑에 엉덩이를 붙인 채 오리걸음을 하듯 앞으로 이동하며 두둑 가장자리를 조심스레 호미로 긁어냅니다.

황토 속에 숨어 있던 뽀얀 감자들이 하얗게 드러냅니다. 감자에 생채기가 나지 않도록 양쪽으로 호미질을 하고 흙장난을 하듯 손가락을 펴 밭두둑을 허물어 나가니 보석 같은 감자들이 석류씨앗처럼 끊이지 않고 쏟아집니다.

오금이 아파오고 다리가 저려오겠지만 감자농사가 풍년인 탓에 모두들 기쁘기만 한 모양입니다. 날씨가 개 햇살이 강해지고 밭일을 해 본 경험이 없는 몇몇 사람들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릅니다. 무리라도 하다 일사병이라도 일으킬까 그늘로 들어가 쉬라고 하여도 흙 속에서 감자를 캐내는 그 기쁨을 놓칠 수 없다는 듯 밭고랑을 떠나지 않습니다.

▲ 여러 사람들이 함께하는 울력이라 그런지 감자 캐기는 두 시간여 만에 끝났습니다.
ⓒ 임윤수
▲ 흙살이 좋아서 그런지 분이 팍팍 나는 뽀얀 감자가 풍년입니다.
ⓒ 임윤수
사람들이 지나간 뒤에는 뽀얗고 토실토실한 감자가 밭고랑 가득 메워집니다. 누에가 비단실을 뽑아내 듯 사람들이 지나간 엉덩이 뒤로는 하얀 감자 줄이 생깁니다. 마치 꾸러미에 들어 있는 달걀처럼 고랑에 놓여있는 감자들은 가지런합니다.

나이야 지긋하지만 도회지에서 자라 감자 캐기를 처음 체험한다는 분들도 힘이야 들지만 신이 난다고 합니다. 뭔가를 농사지어 거두어들이는 기쁨이 이 맛인가 보다 하며 수확의 뿌듯함을 표현합니다. 워낙 일꾼이 많다 보니 두 시간 정도 지나자 감자 캐기가 끝났습니다. 모자 밑으로 흐르는 땀을 쓱쓱 씻어내며 감자밭을 돌아보는 표정들이 모두들 부자입니다.

풀밭처럼 무성하기만 하던 감자밭이 하얀 감자가 조약돌처럼 즐비한 황톳빛 들녘으로 변모되어 있습니다. 감자는 뽀얗기만 한 게 아니라 맛나 보이는 윤기가 좌르르 흐릅니다. 감자 캐기를 마친 사람들이 그늘로 모여들어 새참으로 준비된 과일들을 깎아먹으며 휴식을 만끽합니다. 어느 곳에나 있는 그늘이고, 어디에서나 불어주는 바람이지만 노동으로 흥건하게 흐른 땀을 식혀 주는 바람이 한층 더 시원하게만 느껴집니다.

하얀 감자가 햇살을 오래 받으면 파랗게 변한다는 걸 알기에 마냥 쉬고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미리 준비 된 종이박스를 펼쳐 밭고랑에 있는 감자들을 주워 담습니다. 뜨거운 햇살아래서 허리를 구부린 채 주워 담으면서도 여기저기서 '하하'거리는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습니다.

▲ 감자를 캐는 사람들이 지나간 뒤에는 마술이라도 부리듯 누에 실같은 감자줄이 생겼습니다.
ⓒ 임윤수
흙 속에서 토실토실하게 영근 알알의 감자를 캐내는 것도 좋았지만 이렇듯 캐낸 감자를 종이상자에 주워 담는 것도 즐겁기만 한 모양입니다. 감자가 가득 채워진 종이상자는 장정이 들기에도 묵직할 만큼 무겁습니다. 일을 하면서도 사람들을 행복하게 했고, 손자나 증손자들에게 예쁜 심성을 심어주는데 씨앗이 될 감자 상자들이 차곡차곡 화물트럭으로 옮겨집니다.

감자농사가 풍념임을 확인하는 순간부터 환한 웃음으로 마냥 기뻐하시던 스님들의 웃음이 그치질 않습니다. 주렁주렁 달려 나오는 감자에 행복해 하고, 수북할 만큼 고랑에 늘어나는 감자에 뿌듯해 하시더니, 차곡차곡 감자상자가 쌓여가니 그 기쁨을 참지 못해 박장대소를 하십니다. 생각에 머물지 않고 솔선하며 미래를 꾸려 가시는 스님들께 마음으로나마 경배의 예를 갖추게 합니다.

▲ 유치원을 세울 거라는 원력을 세운 스님들이 풍년농사에 기뻐하고 사람들 동참에 행복해 합니다.
ⓒ 임윤수
울력에 동참한 사람들이 거둬들인 상자 속 감자들은 정말 유치원을 짓기 위한 주춧돌이나 종자돈이 되기 위해 사람들에게 팔려나갈 것입니다. 그렇게 팔려간 감자는 그 누군가에게 맛난 행복을 줄 것입니다.

언젠가 당신들의 자손에게 고운 심성을 심어줄 씨앗이 될 거라는 기대감에 뜨거운 햇살 속에서 해야 하는 농사일에 기꺼이 동참하는 할머니나 불자들의 마음이야 말로 보살도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아름다운 마음으로 농사짓고 거둬들인 감자. 뽀얀 때깔만큼이나 분도 팍팍 나고 맛도 좋으니 이 감자야 말로 행복표 '주춧돌 감자'가 될듯합니다.

▲ 자손들을 위한 일이라면 뜨거운 햇볕아래서 하는 농사일도 마다않는 마음이야말로 보살도입니다.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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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케팅 상상력 >   김민주 지음, 리더스북 펴냄

 

왜 지금 우리에게 마케팅 상상력이 필요한가!


기업 경영에 있어서 마케팅은 갈수록 그 비중이 커지고 있다. 지금은 CEO에서 말단 직원까지 모두 마케터가 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을 정도가 돼버렸다. 모두가 눈에 불을 켜고 자사의 제품을 광고하고 판매하기 위해 마케팅에 열을 올리지 않으면 그 제품은 피워보지도 못하고 소멸하게 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러한 마케팅의 대상은 제품뿐만 아니라 서비스, 아이디어 등 교환가치가 있는 것이면 모두 그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업뿐만 아니라 학교, 비영리기관까지도 마케팅을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한다. 소위 마케팅 전쟁 시대인 것이다.


지금 한창 우리나라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월드컵마케팅 열기만 봐도 그렇다. 2006 FIFA 독일 월드컵을 앞두고 온 나라가 월드컵마케팅 홍수에 빠져 있다. 기업뿐만 아니라 문화산업, 건설업계 등 월드컵마케팅을 펼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다. 문제는 이 전쟁에서 살아남지 못하고 사라져버리는 상품과 이벤트들이 예상 외로 많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어떤 상품과 브랜드는 히트를 치고, 어떤 것은 그렇지 못할까? 성공하는 마케팅과 실패하는 마케팅의 차이는 무엇일까?


이 책은 바로 이 차이점이 ‘상상력’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즉 작은 구멍가게에서 세계적 대기업까지 100가지 사례를 통해 찾아낸 성공의 공통분모는 바로 ‘상상력’이라는 것이다. 상상력은 하나의 꿈이고 하나의 아이디어다. 곧 새로운 도전에 대한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상상력은 생각을 실제로 구현해내는 창의력과 기존의 것을 크게 바꾸는 혁신과는 다르다. 그렇다면 마케팅 상상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아직은 존재하지 않는 미래의 고객을 미리 만나보는 것이고, 이미 존재하는 고객을 새로운 방식으로 만족시키는 것이며, 고객이 앞으로 원하게 될 무언가를 세상에 내놓고 평가받는 것이다. 결국 고객을 창조하고 지키기 위해서 상상력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작은 카페에서 세계적 대기업까지, 성공한 마케팅 아이디어 따라잡기!


기발한 상상력으로 성공적인 마케팅을 펼친, 이 책에 소개된 몇 가지 사례를 들여다보자.


󰋯친환경 기업으로의 이미지 쇄신은 물론 매출과 수익의 신장까지 가져온 GE의 에코매지네이션(Ecology + Imagination = Ecomagination) 전략

󰋯중동의 이슬람 국가에 진출하면서 그들이 하루 다섯 번 메카를 향해 예배를 드리는 것에 착안해 출시한 나침반폰과 끼블라폰으로 남다른 고객만족이 무엇인지 보여준 LG전자

󰋯인사동 찻집에서 좌석 회전율을 의식한 주인에게 쫓겨나면서 손님들이 편하게 쉴 수 있는 제3의 공간을 떠올려 현재 20여 개 지점을 오픈하며 승승장구하고 있는 민들레영토

󰋯감자칩 위에 유머나 간단한 상식을 직접 새겨 넣는 것을 시작으로 소비자들이 원하는 문구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해 펀 마케팅의 진수를 보여준 프링글스 프린트

󰋯제2차 세계대전 당시 60여 개나 되는 이동형 공장을 만들어 군대와 함께 이동하며 유럽 전파까지 성공적으로 이루어낸 코카콜라의 전쟁 마케팅

󰋯전세계를 경쟁자로 보고 대중적인 미술관을 지향해 위기를 극복한 구겐하임미술관


이들은 모두 작은 아이디어에서 출발해 혁신을 이끌어내고 성공을 일궈냈다. 즉 이들은 그냥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작은 생각들을 간과하지 않고 생각의 생각을 발전시켜 구체적인 아이디어를 만들었고, 이를 바탕으로 과감하게 새로운 시도를 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은이는 이런 것이 바로 마케팅 상상력의 힘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책에서 제시하고 있는 100가지 사례들은 이미 잘 알려진 유명한 사례들보다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사례들이 대부분이라 무척 신선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단지 이러한 100가지 사례들을 나열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그 안에서 상상력이 어떻게 내 회사와 제품들을 돋보이게 해주는지, 어떻게 위기를 돌파하고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내는지, 또 작게 주어진 기회를 어떻게 큰 성공으로 키워나가는지에 대해서도 매우 유익한 단초들을 얻을 수 있다는 데 있다. 또한 각 시례마다 ‘KEYWORD’를 제공하고 있어 평소 관심 있는 특정 분야를 쉽게 찾을 수 있고, 다양한 마케팅 전략을 접할 수 있다.  


개인과 조직이 상상력을 개발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다!


지은이는 말한다. 상상력과 창의력의 출발은 역시 개인에게서 시작한 개인의 경쟁력이 조직의 경쟁력으로 연결되고, 조직의 경쟁력이 기업의 경쟁력, 그리고 국가 경쟁력으로 귀결된다고 말이다. 물론 개인의 상상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시스템이 이를 뒷받침해주지 못하면 개인의 상상력은 제대로 구현되지 못하고, 이러한 일이 반복적으로 되풀이되면 개인들은 상상력을 발휘하려는 의지가 꺾이게 마련이다. 그렇게 되면 더 나아가 기업, 국가는 상상력이 메말라 천편일률적인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제자리걸음만 하게 된다고 충고한다.


그럼 어떻게 하면 개인과 조직의 상상력을 개발하고 발전시켜 나갈 수 있을까? 이 책의 마지막 장에 그 방법이 구체적으로 소개되어 있다. 


우선 개인의 상상력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생각나는 대로 시간순으로 적어라’, ‘실패 사례를 많이 봐라’, ‘다른 업종의 사람들과 많이 교류하라’, ‘아이디어를 위한 제3의 공간을 만들어라’ 등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것에 대한 탐구를 즐길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다음으로 조직의 상상력을 개발하는 방법에는 ‘조직 구성원의 실패에 대해 관용을 베풀어라’, ‘가장 성공적인 실패에 상을 주어라’, ‘회사 내 창의성 센터를 만들어라’, ‘회사 내 바람잡이를 만들어라’ 등 직원들이 보다 더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마음껏 상상력을 펼칠 수 있는 열린 조직문화 구축의 중요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상상력을 발휘하기 위해 우리 모두가 꼭 천재가 될 필요는 없다. 하지만 평범해서도 안 된다. 파울 에르도슈, 살바도르 달리, 에디슨 등이 처음부터 천재로 태어난 것은 아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생각하고 그 생각을 발전시키며 새로운 시도를 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 그 이름이 유명해진 것이다. 이는 조직도 마찬가지다. 대박 터트리는 상품, 브랜드가 부러운가? 그렇다면 마케팅을 상상하라! 마케팅이 커질수록 당신의 회사와 마케팅은 더욱 돋보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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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색 봉투만 봐도 끔찍하다”

인구 5만의 소도시 태백에 이마트 개장, 사지에 내몰린 중소상인들 … 돈의 씨를 말리는 대형마트의 공격에 지역 주민들 승리한 사례 없어

▣ 태백=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강원도 태백시의 5·31 지방선거는 ‘이마트 대리전’으로 치러졌다. 태백시장을 두고 이마트 입점을 찬성하는 후보와 반대하는 후보가 맞붙어 치열한 다툼을 벌였다. 선거가 끝난 직후, 전화로 들리는 태백경실련의 조호성 정책위원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반말 무마하려 대리인 내세워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있었는데, 이젠 이마저 사라졌어요. 700표 차이로 졌거든요.”

당선자는 박종기 한나라당 후보였다. 조 위원은 그를 “인구 5만 명밖에 없는 태백에 이마트 건축 허가를 내준 현 부시장”이라고 했다.


△ 태백시 중심가인 황지자유시장 골목, 지붕을 얹는 재래시장 현대화 사업이 진행되고 있지만, 상인들은 철시를 서두르고 있다.

2004년 태백에 대형마트가 들어올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자, 중소상인들은 그해 10월 비상대책위원회를 발족한 뒤 쉼 없이 반대투쟁을 벌였다. 태백에서 총궐기 대회를 열기도 하고, 관광버스를 타고 서울에 올라와 신세계 본사 앞에서 집회도 열었다. 하지만 이마트는 터를 닦고 공사를 시작했다. 태백 중소상인과 시민단체가 모인 안티이마트운동본부는 마지막 희망을 지방선거에 걸었다. 아이스크림 도매업을 하는 최종연(43)씨가 시의원 후보로 나섰고, 태백시장 후보들에게는 이마트 입점에 관한 입장을 물었다. 2위를 차지한 김동욱 열린우리당 후보와 김강산 무소속 후보만 “중소상공인이 준비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시간이라도 필요하다”는 입장을 냈다.

6월7일 오후 5시께 도착한 태백 시내는 한산하다 못해 정적으로 가득 차 있었다. 태백역 주변은 죄다 철문으로 몸뚱이를 감싸고 있는 상가들뿐이었다. 마지막 남은 ‘시내’는 황지연못 근처의 중심가 두 블록이 유일했다. 1990년대 석탄산업 합리화 조처의 여파 때문이었다. 1990년대 중반 12만 명에 달하던 태백시 인구는 한 해에 1만 명 이상씩 떨어져 지금은 5만 명을 갓 넘었다. 안호진 안티이마트운동본부 간사는 “그나마 이곳이 마지막 남은 상권”이라고 말했다.

시내에 있는 황지자유시장 골목에는 ‘점포 세 줍니다’라고 쓰인 벽보가 세 집 건너 하나씩 붙어 있었다. 골목 사이에 건축 자재들이 쌓여 있었다. 재래시장을 쾌적한 쇼핑 공간으로 탈바꿈시켜 대형마트와 대적시킨다는 재래시장 현대화 사업. 시장에 지붕을 얹는 아케이드 공사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안 간사는 “아케이드와 통행로 정비에 20억원을 쓴다”고 말했다. 그러나 공포의 철시 대열이 끝날 거라고 생각하는 상인들은 없어 보였다.

이마트 태백점은 10월 말 개장될 예정이다. 인구 5만 명 수준의 소도시에 대형 할인점이 진입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서 업계에서는 태백을 주시하고 있다. 그동안은 10만 명 안팎의 도시가 마지노선이었다. 중소상인의 반대를 뚫고 개장한 뒤, 다른 지역에서처럼 많은 이득을 얻을 수 있다면, 다른 소도시나 군 단위에서도 못할 게 없다.

태백시 화전동에 있는 이마트 부지에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단층짜리 1800평짜리 매장. 기타 부지로 6천 평을 매입했다. 그런데 공사 현장에는 이곳이 ‘이마트 예정지’임을 알리는 어떤 표식도 없었다. 이마트 예정지임을 추측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는 ‘신세계 건설’이라는 이름이 달린 산업재해 예방 구호뿐이었다.

안호진 간사는 “이 땅의 소유주는 신세계가 아니라 서울 사람인 이아무개씨”라고 말했다. 그는 “이마트 직원들이 사전에 내려와 시장조사를 했고 대리인을 내세웠다”며 “처음엔 신세계 쪽에서 이마트 건설 계획이 없다고 잡아뗐다”고 말했다.

전주, 실패한 ‘지역법인화 운동’

신세계가 이마트 개장 계획을 실토한 것은, 태백 중소상인들이 반대운동을 시작한 지 반년이 넘은 2005년 4월께였다. 이미 태백시가 이마트 매장 한가운데를 지나는 국공유지인 도로를 대리인인 이씨한테 팔고 난 뒤였다.

대리인을 내세운 인·허가 작업은 대형 할인점이 고안해낸 일종의 편법이다. 업계의 치열한 경쟁으로 입점 부지가 모자라는데다 지역 여론의 반대를 피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해당 지자체로선 ‘관련법상 하자가 없다’며 허가를 내줄 수밖에 없고, 할인점은 대리인에게 관련 땅과 매장을 인수받은 뒤 영업에 들어간다. 태백뿐만 아니라 논산, 김제 등에서도 똑같은 방식이 동원됐다. 한 대형 할인점 관계자는 이를 굳이 숨기지 않았다. “물론 그렇게 하면 안 되는데, 상권 반발이 워낙 거세니까 어쩔 수 없어요.”

전국에 일어난 대형 할인점 건설 붐은 사회적 문제가 되어가고 있다. 할인점 입점 소문, 중소상인들의 반발, 지자체의 특혜 시비, 찬반 주민들의 대립, 상경 투쟁 등 거의 모든 지역에서 일정한 소란의 터널을 거친다. 안티이마트운동본부가 집계한 바에 따르면, 인구 5만~15만 명의 소도시에 대형마트가 추진 중인 지역이 10곳이나 된다. 홈플러스는 이미 전국 50곳에 부지를 확보해뒀고, 이마트도 현재 88개인 점포를 130~140개로 늘린다는 방침이다.

중소상인들이 대형마트 입점을 결사반대하는 이유는 뭘까. 대형 할인점은 종소상인들에게는 생존권 문제와 직결돼 있기 때문이다. 대형 할인점이 장사를 시작하면, 직접적인 경쟁관계를 맺는 재래시장 상인부터 무너진다. 재래시장은 할인점의 진출로 2002년 매출 15조원에서 2003년에는 13조5천억원으로 줄었다. 1년 만에 1조5천억원이 줄어든 것이다. 소매상의 감소 추세도 뚜렷하다. 1996년에서 2004년까지 할인점이 247개 늘어날 때 영세소매상 8만 개가 감소했다는 보고도 있다. 그래서 상인들 사이에서는 “대형마트 1개 생기면 동네 슈퍼 300개가 망한다”는 말이 떠돈다.

이렇게 되면 지역에 돌아다니는 돈의 씨가 마르기 시작한다. 서울에 본사를 둔 대형마트들이 지역 소비자가 내는 돈을 싹쓸이해가기 때문이다. 기존에는 소비자가 중소상인에게 소비를 하고 그 중소상인이 다른 중소상인에게서 소비하는 지역 내 통화 순환이 이뤄졌다면, 대형할인점은 이러한 순환 체제를 무너뜨린다. 더군다나 할인점이 지방정부에 내는 세금도 미미하기 그지없다. 주요 세원인 법인세가 국세이기 때문이다.

인구 62만 명의 중소도시 전주는 이러한 상황을 잘 보여준다. 2002년 한 해 동안 전주 시민들은 이마트에서 1297억원을 썼다. 그러나 이마트 전주점이 낸 지방세는 종합토지세, 재산세 등 5억4천만원뿐. 전주에서 거둬들인 돈(매출액)의 0.4%만 세금으로 낸 셈이다.

“지역 시민사회단체가 모여 전주 이마트를 지역법인화하자는 운동을 벌였어요. 몇 차례 이마트 간부들과 간담회를 가졌지만 역부족이었어요.” 전주 YMCA의 조미영 부장은 2003년 거셌던 지역법인화 운동이 실패로 돌아갔음을 부정하지 않았다. 이마트의 자비에 호소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운동은 성공하긴 힘들었다.

“주민 스스로 할인점 통제해야”

현재 국내에서 대형 할인점을 막아낸 지역은 한 곳도 없다. 미국의 월마트 반대운동가 알 노먼은 “미국에선 지금까지 300여 곳의 지역 사회가 대형마트의 신규 진입을 막아냈다”며 “특히 지역 주민 스스로 대형 할인점을 통제해야 한다”고 말한다. 주민투표제 등을 통해 행정에 개입함으로써, 대형 할인점이 진입하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용도변경, 교통영향평가 등 건축허가에 개입할 수 있다.


△ 태백시 화전동의 이마트 건설 현장. 지역 주민들 몰래 추진되는 대형마트 건설현장에는 공사에 대한 어떤 설명도 없다.

이는 대형마트가 지역 경제에 주는 득실, 즉 소비자로서의 즉자적인 이익뿐만 아니라 생산자와 노동자로서 일하는 자신에게 끼칠 중·장기적인 영향에 대해서 논의하는 사회적 학습 과정이 될 수 있다. 대형 할인점처럼 소비자만 앞세우면 사회적 연대의 거미줄은 끊어진다.

“노란색 이마트 봉투만 봐도 끔찍하다”는 태백 진주마트의 황호창(56)씨는 20년 슈퍼 일을 접고 태백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이미 동해·삼척에 나가 나름대로 시장조사를 했다고 씁쓸하게 웃었다. 그는 “다른 지역에 가든지 편의점을 차리든지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안티이마트운동본부는 10월 이마트 태백점이 문을 열면, 이마트가 지역 경제에 끼치는 폐해만큼 책임을 요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상인들은 “우리 역시 졌구나”라고 말하면서도, “불매운동이라도 해야 하지 않느냐”며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법은 언제까지 구경만 하나

외국은 대형 할인점 무차별적 진입에 강력한 국가적 규제장치 마련

“있는 걸 부술 순 없잖아요. 현재로선 출점 러시에 브레이크를 거는 방법이 우선입니다.”

이선근 민주노동당 경제민주화운동본부장은 국가적 규제를 마련해놓은 외국에 비해 한국은 대형 할인점의 무차별적 진입에 무방비 상태라고 말한다. 프랑스는 가장 강력하게 대형 할인점 신설을 규제하는 나라다. 1973년 제정된 로와이에법은 점포 면적 3천㎡, 매장 면적 1500㎡ 이상을 증설하는 경우 정부의 허가를 받도록 했다. 일본에서는 1천㎡ 이상 점포를 설립할 때는 신설 계획에 대한 공표와 설명과 공청회를 실시해야 한다. 영국은 ‘대형마트 설립 가이드라인’을 두고 총매장 2만㎡ 이상의 대형마트는 ‘중소소매업에 대한 영향 조사 보고서’를 지방정부에 보고하도록 하고 있다.

반면 한국에선 유통산업발전법 등 관련 법령에 따라 3천㎡ 이상의 점포 개설은 해당 구청에 등록만 하면 되고, 3천㎡ 이하는 사업자 등록으로 끝난다.

대구시 남구는 2005년 2월 대형 할인점의 신규 진입을 제한하는 ‘영세상인 보호를 위한 업무 지침’을 만들었다. 이 지침은 15만 명당 3천㎡의 대형마트 1개만 허용토록 해 현재 영업 중인 홈플러스 외의 추가 입점을 막도록 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지침일 뿐이다. 남구 관계자는 “할인점이 소송을 제기하면 꼼짝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인구 146만 명에 이미 12개의 할인점이 영업 중인 대전시도 뒤늦게 도시계획조례를 개정해 2007년까지 준주거지역에 3천㎡의 대형 매장을 제한하도록 했다. 이에 대해 안호진 간사는 “지자체의 임시방편일 뿐”이라며 “국가적인 법적 통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심상정 의원(민주노동당) 등 10명은 이와 관련해 ‘지역유통산업 균형발전특별법’를 발의했다. 이 법안은 대형 할인점 건설 전에 주민 공청회와 유통산업균형발전위의 심의를 거치도록 하고, 인구당 점포 수와 면적을 규정하도록 했다. 이상민 의원(열린우리당)이 발의한 ‘대규모 점포 사업활동 조정 특별법’도 발의돼 있는데, 이 법안은 24시간 영업제한과 허가제를 주내용으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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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이마트에서 길을 잃다

이마트 해고노동자이면서도 카트를 끌고 매장을 찾을 수밖에 없는 최옥화씨… 인구 15만명당 1개의 대형 할인점 시대, 지역 커뮤니티와 사회적 연대를 파괴

▣ 글·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최옥화(42)씨는 노동자다. 그는 또 소비자다. 노동자이자 소비자인 최씨는 이마트에서 노동하고, 이마트에서 소비한다. 노동자 최씨는 매일 이마트 용인시 수지점 계산대 앞에 하루 7시간씩 서서 일하고, 소비자 최씨는 주말마다 중학교 2학년짜리 막내아들의 손을 잡고 이마트 진열대를 돌아다닌다.

노조 결성하게 만든 ‘하얀 장갑 사건’

2004년 12월21일 오전 이마트 수지점에서는 신세계 이마트 노조 창립식이 열렸다. 40대 주부 노동자들은 노조 깃발을 들었다. 그 중심에는 분회장인 최씨가 있었다. 그는 동료 캐셔(계산원) 노동자 23명을 이끌고 민주노총 경기일반노조 수지 이마트 분회를 조직했다.


평범한 주부 최옥화씨가 이마트 노동자가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4남매 학원비만 각각 한 달에 35만원씩이에요. 학원비라도 벌려고 나갔지요.”

그가 보여준 2003년 8월 첫 월급 명세서에 찍힌 금액은 80만원(시간당 3850원)이 좀 넘었다. 하루 7시간 일하는 계약직 파트타임 노동자로 일한 대가다. 최씨는 재빨리 캐셔 일에 적응해갔다. ‘어서 오세요’ ‘봉투 필요하십니까’ ‘상품 다 올리셨습니까’ ‘얼마입니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로 이어지는 6대 용어를 어떤 상황에서도 웃으며 말할 수 있는 안면 근육도 키웠다. 한 달에 한 번꼴로 있는 스피드 채점도 좋은 성적으로 통과했다.

“근무시간 중에 슈퍼바이저(SV)가 갑자기 빈 카운터로 불러요. 그 다음 초시계를 들고 속도 측정을 하지요. 20개의 물건을 갖다놓고 얼마나 빨리 바코드 센싱을 하는지 시험을 보는 겁니다.”

손이 빨라야 한다. 성적은 A·B·C등급으로 나눠 매겨지고, 각각 3만·2만·1만원의 ‘포상금’을 지급한다. 20대의 젊은 슈퍼바이저가 갑자기 불러 치르는 시험은 40대 아주머니에게 기분 좋을 리 없다. 그래도 “007 작전처럼 손님으로 위장해 계산대에 들어와 검사하는 것”보다 낫다.

그의 계산은 정확한 편이다.


그의 손에 하루 1500만원이 오가지만, 과부족되는 날보다 ‘빵내는’ 날이 훨씬 많다. 계산기에 찍힌 금액과 입금액이 다른 과부족 금액이 5천원 이상이면 사유서를 써야 한다. 1만원 이상이면 점장 결재를 받아야 한다. 캐셔들의 과부족 통계는 게시판에 붙여 공개된다.

최씨가 노동조합을 결성하게 된 계기는 ‘하얀 장갑 사건’이었다. 캐셔 노동자는 장갑을 껴서는 안 되고 맨손으로만 일해야 한다. 장갑을 끼면 소비자가 보기에 좋지 않고 때가 타 더러워진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최씨의 손은 상품에 붙어 있는 플라스틱 태그를 떼느라 갈라지고, 잔돈을 내주느라 돈독이 올랐다. 회사 쪽은 장갑을 끼고 근무하는 최씨를 나무랐다. 이 문제를 가지고 최씨가 민주노총을 찾아갔고, 결국 노조를 만들기로 결심한 것이다.

“거의 한 달 동안 일하지 못하고 점장과 서울에서 내려온 본사 간부들과 면담만 했어요. 간혹 일할 때는 가장 힘든 소량 계산대에만 보냈고요.”

2004년 12월21일 노조 창립 뒤, 무노조 경영을 굳건히 지켜온 ‘범삼성가’의 대응은 집요하고 공격적이었다. 노조원 23명 가운데 19명이 떨어져나갔고, 1명은 해고됐고, 3명이 남았다. 노조원과 갈등을 빚던 이마트 수지점장은 ‘대기발령’을 받았다. 인사위원회는 최씨 등 3명에게 세 달 정직을 통보했다. 이후 회사 복귀 명령과 근무, 다시 해고와 복직 투쟁이 이어졌다. 이마트 수지점은 지난해 7월5일 이들을 복직시켰다. 그리고 놀랍게도 복직 닷새 만에 계약 해지를 통보했다.

장을 보러 가도 보안요원들이 따라다녀

이마트 최초의 노조 설립 사건은 2000년 미국 월마트 노조 사건과 닮아 있다. 그때 월마트는 잭슨빌 점포 정육부 노동자 10명이 노조를 설립하자, 아예 부서를 해체하고 노조원들을 타 근무지로 전보 발령했다. 이마트와 월마트는 노동자의 희생을 대가로 한 소비자 지상주의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닮은꼴이다. 좀더 싼 가격과 티끌조차 없는 제왕적 편의를 위해서 비정규직은 ‘무결점 서비스’ 노동을 한다. 고객이 부당한 요구를 해도 화내면 안 된다. 고객이 불만을 제기하면 불려가 이유를 막론하고 잔소리를 듣거나 사유서를 써야 한다.


△ 최옥화씨는 이마트의 노동자이자 소비자이다. 그는 “이마트에서 번 돈보다 쓴 돈이 많았다”고 말한다.

6월7일 해고노동자 최씨는 기자와 함께 롯데마트 수지점에 쇼핑을 하러 갔다. 그는 “지난해 롯데마트가 생겨서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그전까지는 정직을 당했던 직장인 이마트에 가서 장을 봤다. 그때마다 장을 보는 최씨 뒤로 무전기를 든 보안요원들이 따라다녔다. “이마트에서 번 돈보다 쓴 돈이 더 많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이마트를 다녔다.

최씨는 신도시에 사는 전형적인 ‘마트형 인간’이다. 그는 일주일에 한 번씩 대형 할인점에 가서 15만원어치 장을 봐온다. 여느 신도시의 주부처럼 식품에서부터 옷, 생활용품까지 모두 할인점에서 해결한다. 할인점에 갈 때는 자가용을 이용한다. 롯데마트는 집에서 2.5km 떨어져 있다.


한 번 갈 때마다 0.5ℓ의 휘발유를 소비한다. 그가 사는 아파트 앞 2층짜리 상가는 부동산 가게로 가득 차 있다. 근처엔 재래시장은 물론 변변한 슈퍼조차 없다. 할인점이 지구환경에도 안 좋고 과잉 소비를 유도하는 걸 알지만, 일상의 쳇바퀴를 바지런히 굴려야 하는 그로선 할인점 외의 대안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롯데마트에 들어서자 ‘매일매일 최저가’라는 광고가 여기저기 걸려 있었다. 대형 할인점의 최저가 신기원은 노동비용을 통제한 데 힘입었다. 롯데쇼핑(롯데마트·백화점)에 고용돼 일하는 노동자는 1만6246명. 신세계는 1만1782명(이마트·백화점)이고, 홈플러스는 1만800명이다. 매장에 입점한 업체가 고용하는 노동자까지 포함하면 수는 더욱 많아진다. 대형 할인점에서 일하는 노동자 가운데 70~80%가 비정규직이다. 구인·구직 포털 알바몬이 3~5월 대형 할인점 일자리 공고를 분석한 결과를 보면, 각 업체에서 제시한 한 달 임금은 대부분 60만~100만원 수준으로 근로자의 월 평균임금 240만원의 절반에도 미치지 않았다.

최씨는 롯데마트 2층에 전시된 분홍색 꽃무늬 넥타이를 만지작거렸다. “4만5천원”이라는 말에 넥타이를 놓고 몇 번 뒤돌아보더니 1층으로 내려갔다. 최씨는 “보이지 않으면 안 사도 되는 건데…” 하면서 물건을 쉴 새 없이 집어들었다. 진라면 5입, 삼양라면 5입, CJ 물만두, 핫도그, 흙대파… 15분 만에 23개 품목으로 쇼핑카트가 메워졌다. 롯데카드로 10만1294원을 결제하니 505포인트가 적립됐다. 집에 오자마자 중학교 2학년인 막내아들은 비닐봉투 속에 묻혀 있는 요구르트를 꺼내 먹었다.

그는 지난 5·31 지방선거 때 민주노동당 용인시의원 후보로 나갔다. ‘이마트 아줌마’가 큼지막하게 박힌 선거 홍보물에는 “아파트 건설로 재미를 본 업자들이 난개발로 만들어놓은 수지를 바꾸겠다”는 공약이 쓰여 있다. 최씨는 “시의원에 당선됐다면, 대형 할인점 규제 조례를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마트 아줌마를 지지해준 표는 1882표. 6.2%의 지지율이었다. 여태 민주노동당 지역위원회가 없는 곳에서 혼자 선거운동을 벌인 것치곤 의미 있는 성과였다.

이제 사회적 책임을 요구할 때

“묶음 단위로 구매해 남은 양은 쓰레기로 발생합니다. 일시 다량 구매로 그만큼 경제적 지출이 많습니다. 할인점으로 가는 길은 교통 혼잡, 대기오염, 에너지 낭비를 발생시킵니다.”


△ 경기 시회물류센터에서 상품 적재를 기다리는 차량들. 전국에서 구입된 상품은 물류센터에 모였다가 다시 전국으로 흩어진다.

친환경소비자단체인 녹색소비자연대가 1990년대 후반에 펴낸 캠페인 구호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 단체는 할인점 출입을 줄이자는 운동을 폈다. 그러나 운동은 지속되지 못했다. 김진희 녹색소비자연대 실장은 “갈수록 편리함을 추구하며 할인점으로 향하는 소비자들을 설득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젠 한국을 점령한 대형 할인점에 사회적 책임을 요구해야 할 단계”라고 주장했다.

대형 할인점이 이 땅에 처음 들어온 지 13년, 경북 경산에는 6월15일 317번째 마트가 문을 열었다. 어느새 한국은 이마트의 나라가 됐다. 이마트 체제가 확산시킨 소비자 지상주의의 화살은 언젠가 소비자 자신을 겨냥할지도 모른다. 윤리적 소비는 과연 달성 불가능한 습관일까. 대형마트 해고노동자이자 대형마트 소비자인 최옥화씨는 그 물음을 가슴에 품고 마트를 다닌다.


“신세계가 2억1천만원 준다고 했다”

금품 제공 폭로한 이마트 노조간부, 삼성가의 전통인가

대형 할인점에 노조는 적이다. 노조가 결성되면 최저 판매가를 지탱해주는 저임금을 잡아둘 수 없고, 노동쟁의로 매장 이미지가 타격받는다고 생각한다. 할인점 운영의 전형을 보여준 월마트가 1962년 설립 뒤 40년 이상 노조 설립을 막아온 것도 이 때문이다.

최옥화 경기일반노조 신세계 이마트 분회장은 6월7일 인터뷰에서 “신세계 쪽이 지난해 1월 노조를 탈퇴하고 사표를 쓰는 대가로 2억1천만원을 주겠다고 말했다”고 주장했다. 이는 지난해 1월11일 삼성전자 직원 홍두하(43)씨가 폭로한 이래 두 번째 나온 범삼성가의 ‘금품 제공’ 주장이다.

당시 단병호 민주노동당 의원은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삼성전자 수원공장 세탁기 개발실에서 근무하던 홍씨에게 노조 탈퇴와 사직을 조건으로 2억5천만원을 건넨 지급 확인서와 홍씨의 통장 사본을 공개했다. 홍씨는 이 자리에서 “2004년 9월 삼성전자의 한 차장이 노조를 탈퇴하면 최대한 지원하겠다고 말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최옥화씨 등 3명이 금품 제안을 받은 것도 이즈음이다. 그는 “밤 9시쯤 수지점 남자 탈의실에서 신세계 본사의 한 과장이 내려와 ‘월급이라 생각하고 1~10월까지 1천만원씩 1억원을 주고, 이와 함께 2억원도 주겠다’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이 자리에서 신세계 과장은 “일단 부산비치호텔로 가자” “좋은 일자리를 알아봐줄 수도 있다”는 말도 했다고 최씨는 증언했다. 이 제안을 듣고 최씨는 황당해하며 “그럼 50억원을 주라. 어려운 사람이라도 도와주게”라고 맞받아쳤다고 한다. 그러나 나중에 열린 인사위원회에서 최씨가 되레 금품을 요구했다는 말이 나와 항의했다고 최씨는 말했다.

얼마 뒤 삼성전자 홍두하씨 폭로사건이 언론에 터졌다. 신세계 쪽에서는 더 이상 이런 제안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실직 기간이 길어지면서 마음이 흔들린 최씨는 추석 즈음 신세계 과장과 서울 삼성동에서 만났다고 털어놨다. “돈을 받고 나가겠다고 했어요. 다른 할인점에서도 취직이 안 될 테고…. 내가 사람들을 끌고 여기까지 왔으니 총대를 메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다행히 그는 다음날 바로 전화를 걸어 이 말을 취소했다. 민주노총에서 희생자구제기금이 나온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때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기 때문이다.

<한겨레21> 취재진은 신세계 과장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그는 “홍보실을 통해 이야기하라”며 인터뷰를 한사코 거부했다. 신세계 홍보실 관계자는 “최씨의 주장은 거짓말”이라며 “일개 과장이 그런 제안을 할 수 없다”고 답했다.

현재 최씨 등 3명은 신세계를 상대로 복직투쟁을 벌이고 있다. 경기지방노동위원회는 지난해 12월 “최씨 등에 대한 계약 해지는 부당 해고에 해당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에 대해 신세계 관계자는 “이미 정직 3달을 받아 취업 규칙상 해직 사유가 있다”고 반박했다. 이 사건은 현재 중앙노동위원회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



그린필드 캠페인을 아는가

25년 동안 경제적·환경적 이유로 대형마트와 싸워온 시민들

미국의 경제전문지 <포브스>는 그를 “월마트 제1의 적”이라고 일컬었다. 알 노먼은 미국 매사추세츠주 그린필드에서 월마트를 막아낸 전설적 인물로 통한다. 대형 할인점에 대항하는 지역사회 운동에 컨설팅을 해주고 있는 그와 이메일 인터뷰를 했다.


어떻게 월마트 반대운동에 뛰어들게 됐나.

=올해 14년째다. 내 고향인 매사추세츠주의 그린필드에 월마트가 지점을 내려 했던 1993년이다. 월마트는 공장용지를 상업용지로 바꿔 건설 공사를 시작하려고 했다. 하지만 월마트가 창출한 일자리만큼 고용이 사라지기 때문에 결국 지역 경제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주민 투표가 이뤄졌다. 주민들은 용도 변경에 반대하는 쪽을 선택했고, 월마트는 물러났다. 그린필드 캠페인은 세계적인 이야기가 됐다. 나는 그 캠페인을 주도한 사람이다.

미국에서 월마트 반대운동의 역사는 얼마나 됐나.

=지난 25년 동안 시민들은 대형마트에 싸워왔다. 경제적·환경적 이유가 있었다. 대형 할인점은 소도시와 마을의 고유한 지역색을 사라지게 했다. 더욱이 경제적인 혁신도 가져다주지 않았다. 단지 수십만 에이커의 땅을 비생산적인 땅으로 바꿔놨을 뿐이다. 월마트에 대항하는 노동자들의 움직임도 있다. 월마트 노동자들은 대부분 학생이거나 노인들이어서 조직화가 쉽지 않다. 하지만 물밑에서 월마트 노동자들을 ‘월마트노동자협회’로 조직화하는 움직임이 있다. 월마트는 노조 조직을 위한 어떤 활동도 금지하고, 적발되면 바로 해고한다. 캐나다에서는 노조 조직화를 허락하느니 점포를 폐쇄하기까지 한다.

월마트 반대운동의 성공 가능성은.

=그동안 300곳에서 할인점을 저지시켰다. 월마트는 최근 한국과 인도네시아에서 철수했다. 독일에서 점포를 줄이고 있다. 이것은 월마트가 모든 곳에서 성공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월마트와치(http://walmartwatch.com)에 가면 월마트와 싸우고 있는 ‘배틀 마트’들이 소개돼 있다. ‘월마트 배틀 플랜(투쟁 계획)’을 보면 월마트와 싸우는 우리의 전략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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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아래 가장 먼저 만나는 산사, 봉정암
[길 위에서 쓰는 편지 5] 설악산 봉정암을 거쳐 대청봉을 넘다
텍스트만보기   이명주(sindart) 기자   
6월의 시작과 함께 우리 국토 순례를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지고 싶듯, 내 나라 내 땅의 숨결을 가까이서 느껴보고 싶었습니다. 소란한 사람 마을을 잠시 벗어나 자연에게 사는 법도 배우고요. 이 글은 사람살이에 적응 못하고 또 홀로 떠나는 여식을 묵묵히 응원해주시는 어머니를 위해 길 위에서 쓰는 편지입니다. 이 여행이 끝나면 사람 도리, 자식 도리 하며 사는 평범한 딸이 되고 싶습니다. - <기자 주>

3일째 계속 되는 비를 뚫고 아침 일찍 길을 나섰습니다. 휴식은 충분히 취했고 마냥 비가 그치길 기다리는 건 장대비 속을 걷는 일보다 더욱 곤욕처럼 느껴졌습니다. "비 오는데 산에 가겠냐"고 하시는 숙소 관리아저씨의 걱정을 뒤로 한 채 시외버스터미널로 가서 한계령행 버스에 올랐습니다. 굽이굽이 휘어진 도로를 따라 한계령 휴게소에 이르니 다행히 궂은 날씨는 한풀 꺾여 가랑비가 내렸지만 6월이란 계절이 무색할 만큼 서늘했습니다. 훅 끼쳐오는 소름에 화장실로 가서 가지고 온 옷들을 모두 겹쳐 입은 다음 설악산 대청봉을 향한 등정을 시작했습니다.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사는데 안내원이 "어느 쪽으로 하산할 거냐"고 물었습니다. 오를 생각만 하고 미처 내려올 생각은 안 했던 제가 어느 쪽이 좋으냐 물었더니 안내원은 "오색길로 내려와야 오늘 안에 내려올 수 있습니다"라며 걱정스런 눈길을 보냈습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 했지요, 설악산 정상까지는 초행길인데다 동행할 이도 없는 상황에서 앞으로 펼쳐질 험난한 여정은 상상도 못한 채 대수롭지 않은 듯 발길을 옮겼습니다.

결정한 건 단 한 가지, 정상도 정상이지만 언젠가 한국의 절을 주제로 한 TV 프로그램에서 '하늘 아래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는 산사'라고 소개되었던 봉정암에 가보는 것이었습니다.

'한 폭의 그림' 같은 설악의 전경들

▲ 한폭의 그림 같은 설악의 풍경
ⓒ 이명주
수많은 등산객들이 오래도록 밟고 밟아 난 길 외에는 사람에게 길들여진 적 없는 설악의 자연에 연신 사진기를 누르고, 탄성을 자아내면서 한참을 올랐습니다. 그 푸르름은 말할 것도 없고, 길이 높아질수록 말 그대로 '한 폭의 그림' 같은 절경들이 발 아래로 펼쳐졌습니다. 높은 산을 올라본 사람은 알 것입니다. 하늘도 보이지 않는 깊고 고요한 산길을 오르고 올라, 나무들이 하늘을 열어줄 때쯤 만나는 광활한 자연 앞에서의 숨 막힘!

이때만큼은 고장 난 사진기가 안타깝기 그지없었습니다. 아무리 애써도 사각 플레임 안에 만족스런 그림이 나타나질 않아 설악의 풍경을 가슴에 새기려는 듯, 가는 중간 중간 오래도록 서서 그것을 음미했습니다.

몇 시간이 흘렀을까요? 가랑비마저도 오래 전에 그쳤고 환한 햇살에 새들의 지저귐은 간드러지기만 한데 길은 끝이 없었습니다. 의기양양하던 기세는 온데 간데 없고 무거워진 다리는 종종 꺾이기까지 하고 목은 계속 타왔습니다. 어디쯤 보일 거라 생각한 약수터나 간이매점도 없고, 설상가상 전날 얼려둔 물통을 숙소에 두고 온 것을 알았습니다. 하는 수 없이 흐르는 샘물을 음료수 삼아 하조대에서 출발하기 전 슈퍼에서 산 김밥 한 줄을 나무둥치에 앉아 점심으로 먹었습니다.

해발 천 미터 이상의 '자연샘물'은 달디 달았고, 자르지 않은 김밥인지라 우엉이 잘리지 않고 쑤욱 뽑혀져 나오는데도 마냥 꿀맛이라 우걱우걱 씹어 단숨에 먹었습니다. 배를 채우고 단 바람에 흥얼거리고 있으려니 다람쥐들이 재미난 구경거리가 생긴 것처럼 곁에 모여들어 기웃거렸습니다. 지난번 울산바위 오를 때도 느꼈지만 설악산 다람쥐들은 마치, 어릴 적 동네에 찾아오던 엿장수처럼 사람을 만만히 여기는 듯합니다.

하늘 아래 가장 높은 '봉정암'

드디어 대청봉 지점이 멀지 않음을 알리는 이정표가 나왔습니다. 허허,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너무 지친 탓이었을까요, 반가운 탓이었을까요? 이정표를 두 눈으로 똑바로 보고도 두 갈래 길 중 대청봉과 정반대 방향에 있는 귀때기청봉(해발 1.578m, 서북능선 최고봉)으로 들어서고 만 것입니다. 한낮 땡볕은 뜨겁기만 한데 귀때기청봉으로 가는 길은 험준한 바위산이라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였습니다.

한참만에야 뒤에서 한 무리의 사람 기척이 들려 반가워하고 있는데 성큼성큼 바위산을 건너온 아저씨 한 분이 어딜 가는 길이냐 물어 "대청봉에 간다"고 했더니 "이럴 줄 알았다, 여긴 귀때기청봉 가는 길이니 어서 돌아서 가라"고 했습니다. 뜻하지 않게 들어선 귀때기청봉의 정상이 탐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자칫하다간 목적한 대청봉을 가기도 전에 해가 질 위험이 있어 온 길을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머니, 참으로 무모하고 걱정스런 일을 저지른 것이지요? 그런데 그 와중에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삶에서도 열성을 다해 갔지만 길을 잘못 택해 뒤돌아서야할 때가 있잖습니까? 그간 들인 노력이 아깝고도 허무해 틀린 길인지 알면서도 밀어붙이려는 마음이 생기기 십상이나 결국 깨달은 순간 돌아서는 것이 최선책이지요. 그런 마음으로 귀때기청봉을 내려와 대청봉으로 다시 향했습니다.

드디어 대청봉 바로 아래 캠프에 도달했습니다. 눈앞에 해발 1707m 설악의 정상이 보이는데 왠지 마음은 그 아래 봉정암으로 한걸음 더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매번 뭔가에 정성을 들이다가 성과를 바로 앞에 두고도 쉬이 손을 놓아버리는 제 습성이 발동한 것일까요? 오기가 날 만도 한데 한 치 미련도 없이 길을 돌려 봉정암으로 내려갔습니다. 오래전 돌 하나, 흙 한 점 모조리 한 사람 짊어질 수 있을 만큼 수백, 수천 번을 지고 날라 만들었을, 하늘 아래 가장 높은 봉정암의 모습이 궁금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봉정암에서 평온함과 영검한 기운을 느끼다

대청봉을 뒤로 하고 봉정암을 향해 길을 돌리자 우측으로 보이는 설악의 능선들이 어찌나 아름답던지요. 사람이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부르게 된 건 아마도 벅찬 자연에의 감탄에서 비롯된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이 잘나 이름을 떨치고 돈도 버는 것 같지만 묵묵히 존재하는 자연에서 거저 얻는 것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올라오는 길에 인심 좋은 부부 등산객이 건네준 물 한 통을 오래 전에 다 비우고 출발하고부터 처음으로 매점 한 곳을 발견했습니다. 봉정암 가는 길 몇 십 미터 지점에 있는 그곳은 매점과 산장을 겸하여 긴 머리 하나로 질끈 묶은 청년과 그의 어머니인 듯한 여인이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음료수 가격이 산 아래보다 거의 3~4배나 비쌌지만 초코파이와 비타민 음료 하나를 냉큼 사서 먹었습니다. 군복무 시절, 군인들이 왜 그리 초코파이를 동경하는지 그 심정이 이해되는 듯했습니다. 물도 물이지만 초콜릿이 발라져 있는 말랑한 그 빵이 어찌나 맛있던지요!

잠시 휴식을 취하고 다시 산을 내려가니, 마침내 거인의 손으로 아슬아슬하게 쌓아 올린 듯한 기암괴석과 우거진 숲에 둘러싸인 봉정암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자료에 따르면 이 곳은 신라 시대인 643년에 자장율사가 중국 당나라에서 가져온 부처의 진신사리와 금란가사를 봉안하여 창건하였는데 그 후 원효, 보조, 지눌 등 유명한 고승들이 머물며 수도 정진한 곳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6·25 전쟁 이전까지 7차례에 걸쳐 중건되었고 한국 전쟁 당시에는 화재로 소실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봉정암은 아직도 산 밑에서 운반해온 발전기로 한정된 전력을 사용해 생활해야 하는, 세인의 관점에선 열악하기 짝이 없는 환경이었지만, 이 곳에 하루 동안 머물면서 느낀 건 산 아래 어디서도 느낄 수 없는 평온함과 영검한 기운이었습니다. 언젠가 다시 연이 닿으면 시간을 정하지 않고 산사에서 머물고 싶어졌습니다.

봉정암의 맑은 기운에 잠을 이루지 못하다

▲ 가을의 봉정암 모습
ⓒ 이명주
대충 경내를 둘러보고 나니 저녁 공양 시간이 되었습니다. 불도, 음식도 귀한 곳에 봉정암 찾은 모든 이들에게 미역국과 오이무침 곁들인 밥이 나왔습니다. 그릇도 귀한지라 미역국에 밥을 말고 오이무침까지 섞어 숟가락 하나로 후루룩 떠먹는 형상이었지만 국 한 모금 남기지 않고 다 먹었습니다.

식사를 마친 후엔 자신이 사용한 그릇과 수저를 네 단계로 나누어진 세척대에서 깔끔하게 씻어 다시 다음 사람을 위해 제자리에 갖다놓았습니다. 절에서 공양을 할 때마다 느끼지만 종교와 상관없이 모든 이에게 밥 먹고 물 쓰는 법을 절에서 하듯 교육하면 참으로 이로울 듯합니다. 하루를 묵고 갈 터라 카메라 배터리를 충전할 수 있을까 하고 한 스님에게 부탁드렸더니 전기가 너무 귀해서 사정을 봐줄 수 없다는 답을 들었습니다. 말을 해놓고도 생각이 부족했다 싶어 영 겸연쩍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나니 큰스님의 강연시간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오는 날이 장날이라고, 마침 보름이라 저번 낙산사에서처럼 봉정암에도 각지의 불자들이 단체로 찾아와 스님의 법문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 번 오기도 힘든 곳이니, 스님 말씀 한 자라도 더 듣기 위해 절 마당도 개의치 않고 오밀조밀 모여 앉은 신도들 사이에 조용히 섞여 앉았습니다. 구수하고 재미있게 풀어가는 큰 스님의 법문에 사람들은 연신 큰 소리로 웃어대고 '관세음보살'을 외쳤습니다.

밤이 되자 철야기도 하는 사람은 법당에 모이고, 만만치 않았던 여정에 녹초가 된 사람들은 배정된 방에서 잠을 청했습니다. 저는 봉정암 맑은 기운 탓인지, 산 아래서 지고 온 복잡한 심경 때문인지 몸은 피곤한데 정신만은 말짱해 밤새 숙소와 법당을 오고갔습니다.

밤 10시에 일제히 소등했다가 새벽 다섯 시, 아침을 깨우는 스님의 목탁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사찰 전체에 불이 밝혀졌습니다. 아침 공양 메뉴 역시 어제와 같은 미역국과 오이무침이었습니다. 입이 까칠하여 전날과는 달리, 영 밥이 넘어가질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릇을 깨끗이 비웠습니다.

이틀간의 설악산 등정을 마치다

아침 공양이 끝나자 점심으로 주먹밥을 나눠받고 단체로 온 방문객들은 하산할 준비를 하는 사이, 저는 대청봉을 향했습니다. 언제든 다시 못 오랴만, 또 한번 온 길을 다시 기약하기 힘든 것이 사람 일이니 한 번은 보고가야 할 듯해서였습니다. 내려올 때는 금세 내려왔다 싶었던 길을 다시 올라가려니 만만치 않았습니다. 내려온 길을 다시 오르려니 간사스레 '어제 둘러보고 올 걸' 싶기도 하고, '그냥 내려갈까' 하는 생각도 났지만 그 사이 대청봉 정상을 찍었습니다.

풍경이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그래도 뿌듯함이 한점 더해졌습니다. 본래는 대청봉에 올랐다가 다시 봉정암으로 내려가 하루 정도 더 머물 마음이었으나 당최 같은 길을 또 걸으려니 싫증도 나고, 꾀도 나서 오색길을 택해 하산했습니다.

내려가는 게 더 수월하다는 생각에 가볍게 시작한 하산길이지만 오색길은 올라오는 것은 엄두도 안 날만큼 험했습니다. 자연스레 만들어진 길보다 인위적으로 만들어놓은 돌계단, 나무계단이 사람을 더욱 지치게 했습니다. 오전 9시에 시작한 하산길이 오후 5시가 넘어서야 끝이 났습니다.

이틀간의 설악산 등정을 끝내고 저는 지금 주문진 해수욕장 근처에 와 있습니다. 바다가 눈 앞에 펼쳐져 있지만 몸도 머리 속도 젖은 소금 주머니 같고 어떤 것도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않습니다. 당장 내일 계획도 떠오르지 않을 만큼 지쳐 있습니다. 이만 말을 멈춰야겠습니다. 기력이 회복되면 다시 편지하겠습니다. 그래도 참으로 뿌듯한 산행이었습니다! 또 씩씩한 마음으로 길을 걸을 수 있도록 휴식에 전념하겠습니다. 다음 편지에서 뵙겠습니다.
다시 오라는 뜻이었을까요? 고장난 사진기로나마 고이 간직하고 싶어 가득 담아온 사진들이 한순간 날아가버렸습니다. 어떤 완벽한 그림도, 사진도, 글도 그 아름다움을 그대로 따올 순 없을 듯하니 꼭 한번 제가 걸은 그 길을 걷길 바랍니다.
2006-06-23 21:01
ⓒ 2006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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