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드리야르는 맥루언의 명제를 거꾸로 뒤집는다. 그에 따르면 외려 '인간이 미디어의 확장'이다. 그의 말대로 인간은 이미 미디어에 대한 통제력을 잃고 점점 더 미디어의 에이전트가 되고 있다. 한마디로 인간의 신체가 외려 미디어의 가능성을 실현시켜주는 도구로 전락하는 것이다.-30쪽
덕분에 삼성이라는 기업의 횡포에 흘려야 했던 노동자들의 피눈물.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오직 히틀러만이 실현할 수 있었던 '무노조 경영'에 명예철학박사 학위가 수여되는 것을 지켜보는 인문학 교수들의 참담한 자괴감. 대통령보다 더 막강한 것으로 드러난 거대자본 앞에서 느끼는 서민들의 공포감. 안암골 주민들은 이를 너그럽게 잊어버리기로 했다. 그들이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은 우발적으로 일어난 학생들의 몸싸움.-44쪽
사실 논문 조작은 어느 나라에나 있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우리가 겪은 이 이상한 현상(황우석 논문에 대한 반응)은 나타나지 않았다. 왜 그럴까? 그것은 한국인의 사회적 신체가 다른 나라 사람들의 신체와 다르게 조직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정권을 탓하거나 정치권을 탓하거나 언론을 탓하기에 앞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 자신이 기괴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평균적인 한국인은 박정희가 만들어낸 프랑켄슈타인이다.-54쪽
빨리빨리 문화는 한편으로 이 사회가 외연적 속도에서 내포적 속도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다른 한편으로는 이 사회가 인간을 배려하고 삶의 질을 고려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드러낸다. 실제로 '빨리빨리'라는 말과 결부된 속도의 예로 제시되는 것들을 보라. 대부분 신체를 가속화하는 외연적 속도에 해당하는 것들이다. 이런 식으로 다이나믹한 사회를 바깥에서 보는 것은 분명 재미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 안에서 사는 것은 매우 피곤한 일이다.-69쪽
귀족계급에서 시민계급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문명화는 근대적 형태로 변형된다. 그것이 후에 계몽주의와 의무교육을 통해 사회의 하층까지 확산된 결과, 서구인들은 '젠틀'한 면모를 갖게 된 것이다. 문명화를 완성한 서구는 이제 그것을 다른 지역에까지 강요하기 시작한다. 식민주의 시대에 서구식 '문명화'는 서구인들에게는 우월감의 근거, 동양인들에게는 열등감의 원천이 되었다. 그리고 그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중략) 근대화가 군대화의 형태로 진행된 나라에서 백성들이 '전사 기질'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만, 그게 '21세기를 리드하는 한국의 경쟁력'이 될 것 같지도 않고, 그런 전사 기질로 충만한 '불량 한국이 모범생 일본을 추월'할 것 같지도 않다. 모범생의 스테레오 타입을 벗어나는 데에는 두 개의 길이 있다. '불량한' 깡패의 길과 '불온한' 예술가의 길. 그런데 내가 보기에 미래는 '전사'의 시대가 아니라 '예술가'의 시대가 될 것 같다.-88~92쪽
그(한국화가 조용진 교수)의 관찰에 따르면 한국인은 일반적으로 왼쪽 이마가 튀어나왔고, 중국인은 좌우 이마가 균형 잡혔고, 일본인은 오른쪽 이마가 튀어나온 이가 많다고 한다.(중략) 한국인이 태어날 때부터 왼쪽 이마가 나온 것은 아니란다. 태어날 때는 좌우 균형 잡힌 이마를 갖고 세상에 나오는데, 유치원 다닐 때면 벌써 왼쪽이 튀어나오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그 나이에 이미 '조기교육' 운운하며 집중적으로 영어, 산수를 가르치는데 왜 거꾸로 감정축이 발달하는 현상이 나타나느냐고 묻자, "그것은 가정 환경에서 오는 것이라 아무리 교육을 시켜도 소용이 없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그의 골상학이 얼마나 과학적 근거를 가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내가 경험하고 관찰한 바와 정확하게 일치한다.-94~95쪽
한가지 내가 동의하지 못하는 것은 외신 기자들까지 울며 '감동 먹었다'고 했다는 대목. 아주 유감스럽지만 애국적 난자 기증 운동에 감동 먹고 눈물을 흘리는 이상한 감성은, 내가 아는 한, 매우 한국적인 현상이다. <연합뉴스>의 기사를 인용해보자. "독일 언론은 이 과정 속에서 나타난 한국 국민들의 과잉 반응과 황 박사에 대한 맹목적 지지 현상을 납득하기 어려울 만큼 '기괴하다'고 표현하고 있다." 황 박사 파동을 바라보는 외국의 시각은 이런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가 '대한민국의 힘'이라 자화자찬하는 뜨거운 정서의 에너지를 서구인들은 '기괴하다'고 느낀다. 그들의 정서 구조는 역사적으로 전혀 다르게 발달해왔기 때문이다. (중략) 같은 달력을 사용한다고 같은 시대에 사는 것은 아니다. 특히 한국처럼 근대화가 압축적으로 진행된 사회에는 종종 전근대와 근대의 시간 축이 공시적으로 존재하게 마련이다. 이른바 '황빠'와 '황까'의 대결은 두 가지 시간의 대립이요, 두 가지 인성의 대립이다. 이것은 그 어떤 갈등보다도 더 근본적인 갈등이다. 한국 사회는 이념보다 더 깊은 차원에서 균열되어 있다. 두 개의 지각 판이 부딪혀 일으킨 황우석 지진은 깊은 곳에 존재하던 이 균열을 표면으로 드러내주었다.-97~110쪽
오늘날에도 이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졸부 근성을 지닌 상류층은 정신적, 문화적 격조가 아니라 아무나 살 수 없는 값비싼 '명품' 등으로 신분적 차이를 드러내려 하고, 대중은 경제적으로 무리를 해서라도 똑같은 명품을 구입하여 그 차이를 지우려 한다. 대한민국의 명품 문화는 취향의 표현이라기보다는 그 성격이 조선 후기 체면 문화를 상업화한 것에 가깝다. 한국식 자본주의의 천민성은 여기서 비롯된다.-118쪽
한국은 강렬하다. 전통문화의 급속한 파괴로 한국인의 신체는 취미의 섬세함을 갖출 여유가 없었다. 군대식 근대화로 이룬 한국의 자본주의는 유난히 공격적이고 극성스러워 오감을 쉬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고도로 발달한 미디어 문화는 자극적인 소리와 영상으로 신체의 촉각성을 강화하게 마련이다. 한국 문화의 강렬함은 여기서 비롯된다. 자극에 노출된 신체는 감흥을 받기 위해 더 큰 자극을 요하는 법. 강렬한 자극은 취미를 파괴한다.-150쪽
한국의 방식은 정감적이다. "네가 형이니까 양보해라." 당연히 형은 양보를 안 하려 할 테고, 억지로 자리를 빼앗아 동생을 앉혔다가는 이번엔 큰 애가 떼를 쓰기 시작한다. 결국 싸움은 누가 더 시끄럽게 떼를 써서 부모를 괴롭히느냐에 따라 결판이 나게 된다. 아이들은 이런 경험을 통해 제가 원하는 것을 얻는 방법을 터득한다. '자극의 양을 남들이 견딜 수 없을 정도까지 극대화하라.' 성인들이 사회적 갈등을 푸는 방식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중략) 부모들은 제 아이가 사회에 나가 공공선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나 홀로 규칙을 초월하여 '떵떵거리기'를 바란다. 규칙을 따르는 것은 외려 '융통성이 없는 것'(혹은 '무능한 것')으로 여겨진다. (중략) 한국의 많은 엄마들은 아이를 어른으로 키울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렇게 자란 아이들은 성인이 돼서도 판단의 '주체'가 아니라 여전히 통제의 '대상'으로 머문다. (중략) 한국에서 어른들은 아이만큼 유치하고, 아이들은 어른들만큼 노회하다.-152~157쪽
저발전의 사회는 당면한 문제에 대해 주술적으로 접근하고, 고발전의 사회는 기술적으로 접근한다. 주술적 사유는 부정을 타게 한 '범인'을 잡으려 하고, 기술적 사유는 사태의 '원인'을 찾아내려 한다. 한국 정치에 나타나는 강한 주술성은 다른 모든 미시 영역의 활동에서 드러나는 주술성의 요약에 불과하다. 한국 사회가 발전하려면 성원들이 주술성에서 벗어나 사회적 문제를 과학적으로 인식하여 합리적으로 해결하는 기술성에 도달해야 한다.-162쪽
한국의 문화는 남의 시선에 민감하다... 수치심의 문화는 이렇게 타인의 시선을 윤리적 형성의 원리로 삼는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은 개인과 개인의 관계만이 아니라 나라와 나라의 거시적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특히 한국 사람은 외국인이 자신들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매우 궁금해한다. 그들이 자국 문화에 대해 내뱉는 한 마디 한 마디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처음으로 자국을 방문하는 외국인에게는 반드시 한국에 대한 인상을 묻고, 그의 입에서 결국 텅 빈 칭찬이라도 얻어내고야 만다. (중략) 우리가 자라면서 부모로부터 늘 들었던 말이 바로 '남 보기 부끄럽지 않게 살라'는 소리. 학교에서도 '누가 뭐라 하더라도 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하며 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이렇게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사회에서는 삶의 목표마저 남의 눈에 맞춰지고, 사람들은 남의 욕망을 욕망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누가 뭐라 하든 올바로 사는 것, 혹은 누가 뭐라 하든 내 멋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이른바 '남 부럽지 않게' 사는 것, 혹은 '여봐란 듯이' 사는 것이 된다. 이런 문화에서 윤리를 형성하는 감정은 죄책감이 아니라 수치심이다.-173~174쪽
이런 정글과 같은 세상에 애를 내보내야 하는 부모의 마음이 편할 리 없다. 극성스런 사교육 열풍의 바탕에 깔린 것도 실은 생존의 공포감이다. 아이를 일등 만들려는 상류층의 공격적 사교육과 달리, 서민층의 사교육은 아이를 생존경쟁에서 낙오하지 않게 하려는 방어적 성격을 띤다. "왜 아이에게 사교육을 시키느냐?"고 물으면, 대부분의 부모가 "남들 다 하는데 우리 아이만 안 시킬 수 없어서."라고 대답한다. 사교육은 공수부대 용사들이 반드시 익혀야 할 생존법 비슷한 것이다.-180~181쪽
<뉴욕타임스> 기사대로 '한국에서 SF는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과거에 문자는 소통매체로서 특권적 지위를 누렸다. 하지만 오늘날 문자는 소리와 영상으로 변해가고 있다. 문자문화에 밀려 사라졌던 영상문화와 구술문화가, IT(정보기술)에 힘입어 문자문화의 이후에 다시 주요한 소통매체로 되돌아오고 있다. 아직 문자문화가 충분히 무르익지 못한 후진성이 외려 문자문화 '이후'를 만들어가는 원동력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잔혹하지 짝이 없었던 역사가 한국에 보여주는 약간의 공정함이랄까?-187쪽
(개똥녀 사건/지하철 결혼식/왕따 동영상 등) 이 사건들에서 전근대성과 탈근대성은 하나가 된다. 남이 하는 일에 과도하게 관심을 갖고, 부도덕한 자를 찍어 집단으로 조리돌림을 하고, 냉정하게 사실을 확인하기 전에 뜨겁게 '감동'부터 받고 싶어하는 이야기 문화는 전근대적인 심성에 속한다. 이 전근대적 감성이 첨단 IT와 결합하면서 서구의 그 어느 나라보다 더 포스트모던한 상황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한국에서 보는 것 중에 많은 것이 앞으로 세계의 다른 곳에서도 그대로 반복될 것이다.-189쪽
구술문화가 강한 곳에서는 인터넷의 사용도 남다르다. 문자문화에서 인터넷 사용이 '정보적'이라면, 구술문화가 강한 곳에서의 인터넷 사용은 '친교적'이다. 문자문화의 인간들은 정보가 필요할 때에만 인터넷에 접속해 정보를 찾은 후에는 곧바로 나온다. 반면 구술문화가 강한 한국의 네티즌들은 찾을 정보가 없어도 인터넷에 접속하여, 여기저기 남의 블로그나 홈페이지로 마실을 다닌다. 문자문화에서 인터넷은 정보의 교류를 위한 망이나, 구술문화에서 인터넷은 관계 맺음의 망으로 기능한다.-192쪽
빌렘 플루서는 미래의 인간 사회가 '프로그래밍을 하는 자'와 '프로그래밍을 당하는 자'로 나뉠 것이라고 보았다. 게임에 열중하는 젊은 세대는 어느 쪽일까? 아무래도 프로그래밍을 하는 상태가 아니라 프로그래밍을 당하는 상태에 가깝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한국형 게임은 스토리를 이용자들이 스스로 만들어낸다고 하나, 그것은 '창조'라기보다 이미 프로그래밍된 가능성 중의 몇 개를 선택해 조합하는 것에 불과하다. 흔히 한국을 'IT 강국'이라 부르나, 사실 몇몇 분야를 제외하면 한국은 '소비'의 강국이지 아직 '생산'의 강국은 아니다.-203쪽
긴 문장은 점점 짧아지고, 짧은 문장은 낱말로 축약되고, 낱말은 이모티콘으로 대치된다. '궤변'은 '괘변'이 되고, '문외한'은 '무뇌한'이 된다. 활자문화에서는 교정을 통해 표기가 고정이 되나, 구술문화에는 이런 안정성이 없어 쓰는 이마다 표기가 달라진다. 이 표기의 유동성이 맞춤법을 무력화한다. 이로써 언어 능력은 발달의 순서를 거슬러 유아기로 퇴행한다. 이를 우리는 '디지털 실어증'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난데없는 글쓰기 열풍은 아마도 이 결핍을 반영한 현상일 것이다. (중략) 인간의 사유와 의식 자체가 언어로 구조화한 이상, 영상문화가 아무리 발달해도 그 바탕에서 문자 코드는 여전히 작동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바로 그 기저에서 문제가 생겼다. 신세대의 의식이 문자문화의 역사적 성취 이전으로 퇴행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이 바로 대학의 시장화. 생태계의 파괴가 장기적으로는 경제 자체에 부담을 주듯이, 글쓰기의 위기도 언젠가는 경제 자체에 피드백 되게 마련이다. 드디어 토대인 기업에서 대학이라는 상부구조에 '글쓰기 기초 교육을 강화'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는 징후적이면서 고무적이다.-212쪽
위기의 극복은 '유저 인터페이스'를 구축한다는 공학적 관점에서 시작해야 한다. 학생들에게 낡은 교양을 주입할 생각을 하기 전에 인문학부터 먼저 과거의 문자문화 모델에서 벗어나야 한다. 구술문화에는 '구체성', 영상문화에는 '직관성'의 장점이 있다. 인문학이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으려면 낯선 이 두 요소를 흡수해야 한다. 글쓰기를 가르친다고 '문장 강화'의 낡은 모범을 제시하는 것은 윈도우 사용자에게 도스를 가르치는 꼴이다.-214쪽
특히 산업혁명 이후 인간의 신체는 늘 기계와 접속이 되어 있었다. 직업교육이란 결국 기계와 신체를 일치시키는 과정이다. 하지만 굳이 일을 하지 않아도 오늘날 인간의 신체는 대부분 기계와 접속이 되어 있다. 자동차를 모는 것은 현대의 일상에 속하지 않는가. 정보혁명 이후에 생산과 여가에서 인간의 신체는 IT 기기와 접속을 확대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의 인간은 이미 사이보그라 할 수 있다. -217쪽
전쟁을 좋아하는 이들은 신화를 좋아하는 법. 월드컵만 열리면 전국이 광란의 도가니가 되나, 정작 K리그 경기장은 텅텅 비어 있다. 4년에 한 번씩 주기적 발작을 일으켜 '신화'를 창조하려 할 뿐, 그 신화를 일상으로 바꿔놓는 합리적 방안에 대한 관심은 없다. 비합리적 사고는 비현실적 기대를 낳는 법. 현실의 실력과 비현실적인 기대 사이의 격차를 극복하기 위해 선수들에게는 '정신력'이라는 심리적 부담감을 요구하고, 감독에게는 '카리스마'라는 이름의 마술적 리더쉽을 기대하게 된다. (중략) 이게 축구만의 일일까? 한국인들은 일반적으로 위대한 지도자와 몇몇 엘리트 기업이 자신들을 먹여살려준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중략) 등수를 매기려면 기준의 동일성이 있어야 하고, 그 기준은 결국 기존의 수요를 누가 적은 비용으로 만족시키느냐 하는 것. 하지만 미래에는 상황이 달라져, '이미 있는' 욕구를 누가 싸게 만족시키느냐('레드 오션')가 아니라, '아직 없는' 욕구를 누가 먼저 창출하느냐('블루 오션')가 경쟁의 주요한 양상이 될 것이다.-292쪽
문자문화가 강한 곳에서는 네트워크를 통해 지식과 정보가 오가지만, 문자문화가 약한 곳에서는 그저 뜨거운 교감과 반감이 오갈 뿐이다. 한국의 인터넷은 공허하다. 윈도우 화면의 아이콘, 컴퓨터 모니터 위의 모든 영상은 명령어로 그린 그림이다. 영상의 생산자, 가상의 제작자, 새로운 현실의 창조자가 되려면 문자와 숫자를 다루는 프로그래밍의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남이 짠 프로그램을 자신의 세계로 소비하는 매트릭스의 주민으로 전락하게 된다. 문자/영상의 병용 코드, 즉 문자로 그림을 그리고, 그림에서 문자를 읽어내는 디지털 상형문자 능력이 '기획자'로서 미래의 인간이 갖추어야 할 언어 능력이 될 것이다.-294쪽
들뢰즈가 찬양하는 '노마드' 역시 유토피아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한국에서 노마드의 시대는 날로 늘어나는 비정규직의 형태로 실현되고 있다. 고용의 안정성은 사라지고, 사회는 여기저기 떠도는 새로운 유목민들의 디지털 스텝으로 변해간다. 유목은 평생 고용의 약속을 믿고 살아온 이들에게 가혹한 삶의 조건이다. 정주를 위해 형성된 신체들은 새로이 눈앞에 펼쳐지는 디지털 초원 위에서 언제라도 짐을 싸들고 떠날 수 있는 유목적 신체로 거듭나도록 강요받고 있다. (중략) 예를 들어 노동자들의 '비정규직화'와 아나운서들의 '프리랜서' 선언은 얼마나 다른가. 소수의 사람들에게 노마드는 더 놓은 가능성의 세계로 도약하는 것을 의미하나, 다수의 사람들에게 노마드는 아직 일할 나이에 직장에서 쫓겨나 노동사무소를 전전하거나, 퇴직금으로 창업을 해야 할 상황으로 내몰리는 것을 의미한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인간들은 자기 자신을 늘 새로 발명하도록, 새로 디자인하도록 요구받고 있다. 여기에는 어떤 잔인함이 있다. 한국은 세계에서도 이런 변화가 가장 신속하고 극단적으로 일어나는 곳. 이곳에서 신체가 받는 중력의 하중은 다른 곳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하지만 신체는 권력의 생체공학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나, 동시에 어느 정도는 존재미학을 통해 제 스스로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잠재성의 상태를 유지하면서 자신을 늘 새로이 디자인하는 신체는 최소한 강요된 유목에 따르는 고통을 적게 받을 것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유례가 없던 가능성의 세계로 들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295~2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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