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미 - 박완서 산문집
박완서 지음 / 열림원 / 2007년 1월
구판절판


70년은 끔찍하게 긴 세월이다. 그러나 건져올릴 수 있는 장면이 고작 반나절 동안에 대여섯 번도 더 연속상연하고도 시간이 남아도는 분량밖에 안 되다니. 눈물이 날 것 같은 허망함을 시냇물 소리가 다독거려준다. 다행히 집 앞으로 시냇물이 흐르고 있다. 요새 같은 장마철엔 제법 콸콸 소리를 내고 흐르지만 보통 때는 귀 기울여야 그 졸졸졸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 물소리는 마치 다 지나간다, 모든 건 다 지나가게 돼 있다, 라고 속삭이는 것처럼 들린다. 그 무심한 듯 명랑한 속삭임은 어떤 종교의 경전이나 성직자의 설교보다도 더 깊은 위안과 평화를 준다.-31쪽

칠십 고개를 넘고 나서는 오늘 밤 잠들었다가 내일 아침 깨어나지 않아도 여한이 없도록 그저 오늘 하루를 미련 없이 살자고 다짐해왔는데 그게 아닌가. 내년 봄의 기쁨을 꿈꾸다니... 가슴이 울렁거릴 수 있는 기능이 남아 있는 한 그래도 인생은 살 만한 것이로구나.-35쪽

무엇보다도 우리는 자식은 정직하고 정당한 노동의 대가로 키워야 하는 줄 알았고 가난보다는 부정이나 부도덕을 능멸했고, 단돈 몇 푼도 빚지고는 못 살만큼 남의 돈을 두려워했다. 우리는 이렇게 간이 작다. 그러나 간 큰 이들이 아무리 말아먹어도 이 나라가 아주 망하지 않을 것 하나만은 확실한 것은 바로 간 작은 이들이 초석이 되어 떠받치고 있기 때문이라고 좀 으스대면 안 될까.-63쪽

아동기의 끝자락에 혼자 대문을 열고 입시추위 혹독한 바깥바람에 홀로 우뚝 서본 경험은 내 자식들 마음 속에 숙연한 무엇이 되어 지금까지도 남아 있으리라 나는 믿는다.
-> 자연스레 숙연한 기억을 만들어주는 것이 내실있는 교육 아닐까...-69쪽

종로서적이 처음 개점할 때 이름은 종로서관이었다. 아마 숙명여고 2학년 때였을 것이다. 일본어 번역본을 통해 문학의 세례를 받은 문학소녀들에게 그곳은 꿈의 궁전이었다. 처음 보는 대형서점이었다. 들어갈 때마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어마어마하게 큰 매장이 우리말로 된 책으로 꽉 차 있다는 건 생각만 해도 가슴 벅찬 일이었다. 순수문예지 <문예.가 창간된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러나 수업료 외의 책 살 돈을 따로 받을 수 있는 형편은 못 되었다. 우리 집이 특별히 가난해서가 아니라 그 시절의 부모들은 수업료와 전차표 값 말고 용돈이라는 걸 따로 주는 법이 없었다.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주머니가 비었어도 그 넓은 매장의 책들이 그림의 떡만은 아니었다. 나하고 친한 우리 반 단짝의 아버지가 그 책방의 창업주였으니까. 종로서관 집 딸이 나하고 친하다는 생각만 해도 나는 어쩌면 이렇게 복이 좋을까. 가슴이 뿌듯해지곤 했다. 그는 예사 동무가 아니었다. 학교에서뿐 아니라 한 동네 동무이기도 해서 나는 그 댁 어른들과도 깍듯이 인사하고 지내는 사이였다. 그애도 나도 돈암동 종점에 살았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어서 그 집에서 교우들이 모여서 예배 볼 때 그애가 특별히 끼어준 적도 있었다. 속으로 나는 내가 그애하고 각별히 친하다는 걸 아무리 강조해도 시원치 않았다. 왜냐하면 학교가 파하고 집에 가는 길에 책방에 들러서 마냥 서서 책을 읽기 위해서였다. 나하고 제일 친한 아이네 책방이라고 생각하면 한결 눈치가 덜 보였다.-71쪽

개업 초기에 그 책방은 가족끼리 경영한 것 같다. 아버지는 물론 할아버지까지 나와 계셨는데 할아버지는 매장보다 높은 발코니같이 생긴 곳에 서서 매장을 내려다보고 계셨다. 누가 책을 훔쳐가나 망을 보시는 거였다. 할아버지는 두루마기를 입고 안경을 쓰고 계셨는데 안경알이 실내의 전등을 반사해서 어디를 보고 계신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 그런지 나는 책방에 들어서자마자 제일 먼저 할아버지 쪽에다 대고 상냥하게 웃으며 허리를 굽혔지만 한 번도 받아주신 것 같지는 않다. 나는 할아버지가 내려다보고 계신 게 불편하고도 불안했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동그란 안경알로부터 숨을 수 있는 안전한 위치는 그 책방 어디에도 없었다. 할아버지를 의식하는 게 왜 그렇게 불편했을까. 혹시 책을 훔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누가 뭐라고 그러는 것도 아닌데도 눈치가 보여 읽던 책으르 다 못 읽고 자리를 뜰 때면 아쉬운 마음과는 또다른 야릇한 흥분으로 얼굴을 붉히곤 했는데 그게 혹시나 도심(盜心)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내 생애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었다.-71(이어서)쪽

예전에 우리 할머니는 시궁창에 더운 물을 버릴 때도 큰 소리로 '뜨거운 물 나간다'고 경고하고 버리셨다. 나는 그게 미생물에까지 미치는 예전사람들의 자연사랑인 줄 알고 기렸는데 그게 아니라 공포감이 아니었을까. 미물에게도 복수심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문득문득 소름이 돋는 게 요즘의 내 피서법이다.-132쪽

된장을 뚝 떠다가 거르지 말고 그대로 뚝배기에 넣고 참기름 한 방울 떨어뜨리고 마늘 다진 것, 대파 숭덩숭덩 썬 것과 함께 고루 버무리고 나서 쌀뜨물 받아 붓고 보글보글 끓이다가 풋고추 썬 것을 거의 된장과 같은 양으로 듬뿍 넣고 또 한소끔 끓이면 되직해진다. 양념할 때 멸치를 좀 부숴 넣어도 좋고, 호박잎을 밥솥 대신 찜통에다 쪄도 상관없다.
(중략)
그까짓 맛이라는 것, 고작 혀끝에 불과한 것이 이리도 집요한 그리움을 지니고 있을 줄이야. 그 맛은 반세기도 전의 고향의 소박한 밥상뿐 아니라 뭐든지 넝쿨 달린 것들은 기를 쓰고 기어 올라가던 울타리와 텃밭과 장독대뿐만 아니라 마침내 고향에 당도했을 때의 피곤한 안도감 까지를 선연하게 떠오르게 만든다.-1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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