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신조의 책과의 밀어] 상상력을 상상할 것
가스통 바슐라르 作, <물과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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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이 중요한 화두인 세상이다. 상상력이 곧 경쟁력이라느니, 우리의 미래가 상상력에 달려있다느니,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느니, 상상력을 키워야 한다느니···.

물론 백 번 옳고 지당하신 말씀이다. 그러나 그런 인위적인 구호들처럼 상상력의 본질과 어울리지 않는 것도 없다. 상상력은 숱한 오해와 왜곡에 시달리고 있는 단어다. 상상력이란 말 앞에 ‘기발한’이나 ‘엉뚱한’이란 관습적인 수식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붙이는 당신이라면 당신은 분명 상상력이 부족한 사람이다.

상상력은 삶 그 자체다. 먹고 자고 움직이고 느끼고 생각하는 우리의 모든 활동, 육체와 정신과 영혼을 아우르는 우리의 모든 것이 상상력에 의해 결정된다. 정확히는 그 모든 것의 질(質)이 결정된다. 그러므로 상상력을 ‘특별한 아이디어’만으로 국한시켜서는 상상력으로 충만한 삶을 영위하기 어렵다.

어린 시절 누구나 경험했을 순간들을 떠올려보자. 어머니가 칼국수나 수제비를 만들기 위해 밀가루를 치댈 때면, 어린 우리는 으레 그 모습을 호기심 가득한 눈길로 지켜보다 반죽 한 귀퉁이를 떼어 달라 어머니를 졸라대곤 했다.

하여 그 희고 몰캉거리는 작은 덩어리를 조몰락거리며 이런저런 모양을 빚어보던 순간의 만족감. 계곡에서의 물놀이, 바닷가나 놀이터에서 모래 장난을 하며 시간 가는 줄 몰랐던 기억도 있을 것이다.

정전이 되어 촛불을 켤 때면 그것의 불편함보다 왠지 모를 아늑함과 은밀함에 야릇한 즐거움을 느꼈을 것이다. 비눗방울 놀이, 바람개비나 연을 날리던 추억, 둥실 떠오른 풍선이나 기구에 마음을 빼앗겼던 순간도 분명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그것의 본질을 의식하지도 못한 채 경험한 원초적인 순간들이다. 이런 체험으로부터 일찍이 가스통 바슐라르(1884-1962)가 ‘물질적 상상력’이라 명명했던 상상력이 비롯된다.

세계가 ‘물, 불, 흙, 공기’라는 4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는 주장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세계를 이루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요소에 대한 고찰은 주로 자연과학 분야에서 다루어져 왔다. 바슐라르는 그러한 개념을 문학과 예술에 적극 도입하고 심화시켜 새로운 비평의 관점을 제시한 학자로 유명하다.

바슐라르는 한 인간의 믿음, 정열, 이상, 사고의 심층적인 상상체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지배하는 물질의 한 특성을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의 물질이란 물론 4가지 기본 요소인 ‘물, 불, 흙, 공기’를 지칭하지만, 상상력의 우주 속에서 그것들은 과학적인 의미의 물질 그 자체라기보다는 그 물질이 가지고 있는 속성 즉 상징적이고 고유한 기질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바슐라르의 물질 개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물질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다. 에너지란 곧 잠재된 변화의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바슐라르는 ‘구조주의자’, ‘과학철학자’로 평가받고 있지만, 실제로 그가 많은 사람들에게 끼친 영향력의 정체는 시인이나 몽상가의 그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물질적 상상력과 이미지에 대한 많은 저작들을 남겼는데, 그의 저작들은 학술적인 이론서보다는 아름다운 에세이나 예술적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잠언록처럼 읽힌다.

<물과 꿈>은 독자로 하여금 자기 자신 속의 물을 발견하게 한다. 일상의 어느 한순간 ‘물의 이미지’가 발아(發芽)시킨 특별한 상상력은 우리 스스로는 깨닫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의 삶 깊숙이 삼투(渗透)해 있다.

“사람은 같은 강에서 두 번 목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미 그의 깊이에 있어 인간 존재는 흐르는 물의 운명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물은 참으로 변하기 쉬운 원소이다.”

강물도 인간도 쉬지 않고 흘러간다. 명확히 설명할 수 없는 감각적 끌림으로 물의 이미지가 우리를 사로잡는 것은 물이라는 존재가 우리 인간과 마찬가지로 한순간도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운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의 순환과 변모를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순환과 변모를 본다.

“물은 운명의 한 타입이며, 그것도 유동하는 이미지의 공허한 운명, 미완성된 꿈의 공허한 운명이 아닌 존재의 실체를 끊임없이 변모시키는 근원적인 운명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리라.”

물은 흐르고 넘치고 고이고 스미고 증발하고 떨어져 다시 흐른다.

우리는 그러한 물을 가만히 응시하곤 한다. 김이 오르는 찻잔을, 비 내리는 창 밖을, 잔잔함 호수를, 흘러가는 강물을, 넘실대는 바다를. 우리는 물에서 물 이상의 것을 찾는 것이다. 우리는 매일 물을 마시고, 더러워진 것을 물로 씻어내며, 물을 이용해 음식을 만들고 그릇을 빚는다. 비, 눈, 구름, 안개, 이슬, 우박, 얼음, 폭포, 분수는 모두 물이다.

우리의 몸에는 피와 땀과 눈물과 젖과 양수와 정액 같은 물이 존재한다.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물이 필요하지만 그러한 물은 우리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한다. 물은 불과 공기와 흙과 섞인다. 우리 모두가 다른 존재들과 관계를 맺듯이.

바슐라르는 <물과 꿈>에서 상상을 상상하게 만든다. 그때의 상상은 공허한 망상이 아니라 실체를 가진 꿈의 본질이다. 난폭한 물, 잠자는 물, 부드러운 물, 복합적인 물, 죽은 물, 모성적인 물···. 우리는 이미 우리 자신 속에 또 문학작품 속에 존재하는 그러한 물들에 대해서 알고 있다. 바슐라르는 물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물의 말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물은 싹을 틔우게 하고 샘을 넘치게 한다. 물은 어디서나 생겨나며, 증가하는 것을 볼 수 있는 물질이다. 샘은 억누를 수 없는 탄생, 지속적인 탄생이다. 이토록 커다란 이미지는 그것을 사랑하는 무의식적인 것을 언제나 가리키고 있다. 그것은 끊임없는 몽상을 불러일으킨다.”

나르시스의 신화와 셰익스피어가 그린 <햄릿>의 오필리어의 죽음과 에드거 앨런 포우가 시와 소설 속에서 만들어낸 수많은 물의 이미지들이 우리에게 물의 말을 들려준다. 그것을 좀 더 깊고 본질적으로 이해하려는 바슐라르의 시도는, 우리로 하여금 상상력이란 역시 삶 그 자체임을 일깨워준다.

상상력을 상상한다는 것. 삶의 전부와 관련된 일이다.



입력시간 : 2007/02/28 16:13
수정시간 : 2007/02/28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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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상자'의 마법에 울고 웃던 80년
[최규성의 대중문화 산책]
한국 라디오방송 80주년… 1927년 첫 전파, 성우·가수 등 숱한 '라디오 스타' 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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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얼로 주파수를 맞추면 치직거리는 잡음과 함께 구성진 소리가 흘러나오던 트랜지스터 라디오의 추억. 선반 위, 대청마루에 모셔놓고 들었던 라디오는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전해주는 소식통이었다.

그 시절 라디오의 꽃은 드라마였다. 인기 드라마 방송시간이면 온 가족이 라디오 앞에 모여앉아 성우들의 한 마디 한 마디에 따라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길거리 전파상에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드라마 주제가 최다 취입가수 이미자가 구성지게 불렀던 '섬마을선생님'과 '하숙생', '빨간마후라' 등은 라디오 연속극 주제가였다.

여성들은 이별의 슬픔을 나누는 드라마 속 남녀 성우의 목소리에 몰래 눈물을 찍어냈다. 아이들은 <태권동자 마루치>, <손오공>에 한없이 빠져들었다. 남성들은 성우 구민의 <전설따라 삼천리>나 오승룡의 <오발탄>, 11시55분 <김삿갓 북한방랑기>에 어김없이 다이얼을 맞췄다.

난데없이 왜 라디오이야기냐고? 지난달로 한국방송 80주년을 맞았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경성방송국(JODK)에서 첫 전파를 발사한 것이 1927년 2월 16일 오후 1시. 요즘 KBS는 특집방송이 한창이다.

눈에 띠는 것은 <방송 80년, 사람ㆍ노래ㆍ프로그램>이라는 기획으로 마련된 ‘국민가수 이미자’ 특별공연. 모처럼 TV에 등장한 이미자는 1926년에 발표된 윤심덕의 '사의 찬미'부터 장윤정의 '어머나'까지 가요 80년사의 이정표 같은 명가요 30곡을 열창했다.

또한 전국 시청자 설문조사를 통해 방송사의 큰 획을 그은 진행자, 가수, 코미디언 등 각 분야 방송인을 선정한 <방송 80년 인물 80년>과 시청자가 뽑은 최고의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방송 80년 프로그램 80년> ‘한국방송, 세계를 품다'를 시작으로 한 5부작 <연중기획 희망 릴레이>다큐멘터리와 특선영화까지 각 분야에서 지난 80년 방송역사를 되돌아보는 뜻 깊은 시간이 계속되고 있다.

방송의 시작을 알렸던 KBS 라디오도 공영방송 주간을 정해 각종 특집을 마련했다. 필자도 <최백호 김민희의 라디오 챔피언>에서 마련한 3월 4일 방송 ‘라디오 드라마에 울고 웃던 그 시절’에 성우 배한성, 성병숙과 함께 출연했다.

방송의 꽃으로 자리 잡았던 라디오 드라마에 얽힌 이야기들과 주요 인기 드라마 주제가들을 들어보는 시간이었다. 특집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절감한 것은 역시 기록의 부재다. 관련 자료가 드물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의 기억과 방송 관련 고서를 뒤적이며 얻어낸 정보는 보물단지 같았다.

1924년 시험방송 때 국내에 보급된 라디오는 5대에 불과했다. 개국 후 1,000대가 넘었지만 한국인이 보유한 라디오 숫자는 200대에도 못 미쳤다. 배우 복혜숙 선생의 회고에 따르면 “조선총독부 체신국 뒤뜰에 천막을 쳐놓고 시험방송을 할 때 마이크 앞에서 소위 연극을 했다. 그때는 무대연극의 대본 그대로를 사용했다.

그러니까 무대극을 직접 보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설명이 덧붙여진 형식이었다”고 한다. ‘소리 상자’로 불린 라디오는 당시 대중에게 대단한 충격이었다. 라디오 보급 숫자는 개국 1년 6개월 만에 1만 대를 넘어설 만큼 선풍적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드라마 형식이 시도된 것은 한국어·일어 2중방송이 시작된 후 ‘라디오 프레이미팅’이라는 단체가 연출한 34년 작 <노차부>가 최초다. 김희장이 쓴 이 드라마는 군더더기 설명 없이 대사로만 꾸며진 라디오 드라마의 원형이었다.

35년 12월에는 세모(歲暮)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PD와 아나운서들이 <신안책귀방어>라는 라디오 드라마를 제작했다. ‘빗장이 방어 작전’이란 드라마다. 1936년에는 부민관에서 라다오 드라마 경연대회가 열렸다. 요즘 말로 말하면 공개방송이다. 그동안 무대극을 중계해오던 방송이 새로운 창작 라디오 드라마를 일반에 공개했던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37년 중·일전쟁이 시작되면서 일본인들은 방송극을 신민정책을 위한 전쟁수행과 목적극으로 변질시켜 나갔다. 41년 2차대전을 일으킨 후 사라진 드라마는 해방 후에도 좋은 극장프로를 중계하는 정도에 그쳤다. 하지만 미군이 주둔하면서 방송에 파견된 미군정의 고문관들로 인해 정시 방송제와 프로그램의 드라마화가 이뤄졌다.

해방 후 최초의 방송 드라마는 홍은표윤준섭 연출의 <화랑관창>이다. 드라마에 관심이 증폭되자 숨은 작가 발굴을 위해 방송희곡 현상모집까지 했다. 1등에 김희창 작 <꿈의 공덕>, 2등에 최요안 작 <세뱃돈> 3등에 조남사 작 <큰아버지 소동>이 당선되었다.

이때까지도 성우라는 독립된 영역은 없었다. 무대배우가 방송에 나오면 성우가 되는 형편이었다. 방송극출연자는 복혜숙, 한은진, 김승호, 황정순 등 무대배우들이 압도적이었다. 이때 보강된 최초의 성우들은 고 최무룡윤일봉 그리고 구민 등이었다. 한국전쟁으로 방송은 다시 암흑기를 맞이했다가 54년 CBS가 개국하면서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라디오 드라마에 주력한 기독교방송은 전속성우 모집을 통해 양과 질적인 성장을 이뤄냈다. 이에 충격을 받은 KBS는 54년 5월 ‘환도 후 제1회 방송성우’를 공개 모집해 22명을 뽑았다. 유명 성우인 오승룡, 고은정이 이때 선발되었다. 1기생들은 3개월의 강습을 거쳐 <무도회의 수첩>이라는 첫 작품을 발표했다.

KBS와 CBS의 라디오 드라마 경쟁은 대단했다. 1956년 조남사의 KBS 일요연속극 <청실홍실>이 최초로 드라마 주제가를 도입하며 빅히트를 터트리자 CBS도 <수정탑>으로 대응하면서 연속방송극의 인기는 하늘로 치솟았다. 57년 10월 1일 첫 일일연속극 조남사 작 이보라 연출의 <산넘어 바다건너>는 새로운 방송극 시대를 전개했다.

60년대 들어 MBC, DBS, TBC등 민간방송이 앞다투어 생겨나면서 라디오 드라마는 온국민을 웃기고 울리며 라디오 앞으로 끌어 모았다. 그 결과 각 방송국의 성우모집 때가 되면 지원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뤘다. 성우는 당시 젊은이들이 가장 선망하는 직업이었다.

70년대에 접어들면서 TV보급 확대와 더불어 라디오 드라마의 인기는 자연스레 TV로 이동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차부인 재치부인>, <즐거운 우리집>, <김삿갓 북한 방랑기>등 라디오 드라마는 각 가정의 시계 구실을 톡톡히 하였다.

지금은 TV, 인터넷 등 음악이나 오락, 정보, 뉴스를 얻을 수 있는 미디어가 넘친다. 그러나 라디오는 보는 것만으로는 다 채워주지 못하는 아름다운 상상의 세계를 지녔기에 대중의 사랑을 받는 미디어로서의 생명력은 지속될 것 같다.



입력시간 : 2007/03/07 14:27
수정시간 : 2007/03/07 14:37


글.사진=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oopld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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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변산반도 내변산 산행
'서해의 진주' 속살에 들면 봄바다 손짓에 마음 '싱숭생숭'
숲·폭포·호수·바다 어우러진 '산해절승', 낙조대서 바라보는 풍광 압권

월명암에서 봉래구곡으로 내려서는 산길. 조망이 아주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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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고의 산해절승(山海絶勝)으로서 ‘서해의 진주’라고도 불리는 변산반도를 제대로 즐기려면 반드시 변산을 올라야 한다. 최고봉인 의상봉(508.6m)은 군시설물 보호를 위해 접근이 금지돼 있으나 가운데 위치한 부안호 남쪽 일원에 한해 산행이 가능하다.

이 중에서 사자동매표소~직소폭포 코스(왕복 2시간 소요)는 산행이라기보다는 일반 여행객들이 짧은 시간에 내변산을 감상하기에 적당한 탐승로.

그러나 걷는 데 자신 있는 여행객이라면 내변산의 3대 명소인 내소사, 월명암 낙조대, 직소폭포를 모두 볼 수 있는 남여치~내소사 코스(총 5시간 소요)를 추천한다. 바다와 호수, 그리고 내변산과 외변산의 절경을 모두 둘러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코스는 봄철산불방지를 위한 입산통제기간(3월 초~4월 말)에도 산길을 막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으나 원점 회귀 산행이 어려워 승용차를 이용하는 등산객의 경우 내소사 앞에서 택시를 이용해 다시 남녀치로 가야 한다는 단점이 있다.

남여치에서 산행 시작

736번 지방도가 지나는 남여치 고갯마루 입구엔 차를 몇 대 댈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여느 때 같으면 매표소에서 입장료(1,600원)를 받고 있었을 테지만, 올해부터 국립공원입장료가 없어졌기 때문에 무료입장이 가능하다.

매표소 건물을 지나자마자 숲길이 펼쳐지고, 작은 개울 하나를 건너면 오르막이 시작된다. 30분쯤 땀을 흘리면 산길이 평탄해지면서 관음약수터가 나온다. 약수터를 지나 몇 분 오르면 능선. 곧장 가는 넓은 길은 월명암으로 들어서는 길이고, 왼쪽은 쌍선암, 오른쪽은 낙조대를 가는 길이다. 아쉽게도 낙조대 가는 길은 생태 보호를 위해 출입을 금지하고 있다.

낙조대 북쪽 아래에 자리잡은 월명암(月明庵)은 변산 조망이 아주 빼어난 암자다. 692년(신라 신문왕 12) 부설거사(浮雪居士)가 창건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진묵대사(震默大師)가 중건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당우 하나만 소박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나 최근 불사를 일으키면서 대웅전과 몇 개의 전각이 들어서면서 제법 규모가 커졌다.

관음봉 바위지대를 지나는 가족 산행객 너머로 곰소만이 펼쳐져 있다. / 내변산의 상징이라 할 만큼 오래전부터 사랑을 받아온 직소폭포 / 관음봉에서 내려서대 바라본 내소사
마음까지 시원해지는 폭포수 쏟아지는 소리

월명암을 지나 평평한 길을 5분쯤 걸어가면 ‘직소폭포 2.5km'를 알리는 이정표가 서있는 삼거리. 직소폭포 가는 왼쪽 길은 널찍한데, 낙조대로 이어진 오른쪽 길은 좁은 데다가 역시 입산금지 팻말이 붙어있다.

직소폭포 방향의 완만한 산길을 얼마쯤 걸으면 시야가 툭 트이며 변산 일대의 산군이 한눈에 들어온다. 관음봉과 세봉으로 둘러싸인 능선에 산중 호수인 직소보가 눈길을 끈다. 내리막길은 바윗길이지만 아이들도 손을 붙잡고 걸으면 크게 위험하지 않을 정도다.

흔히 변산반도를 일컬어 산과 바다가 어울린 경치가 빼어나 산해절승이라 한다. 변산반도 드라이브만 하다보면 산절승(山絶勝)이란 말이 조금은 과장처럼 느껴지겠지만, 이곳에 서게 되면 정말로 그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호수 아래 삼거리에서 직소폭포로 가기 위해 오른쪽 호숫가 길을 따르다 선녀탕 구경하고 경사진 짧은 산길을 넘어서면 직소폭포 조망대에 닿는다. 30m 높이의 직소폭포는 주변 산세와 잘 어우러져 있어 외변산의 채석강과 함께 변산반도의 양대 명소로 손꼽힌다.

폭포 오른쪽 가파른 산길을 따라 직소폭포를 넘어서면 산길은 거짓말처럼 널찍하고 평탄하게 바뀐다. 누가 가파른 암벽이 빚어낸 폭포 너머에 이토록 평탄한 땅이 있으리라 생각할 수 있겠는가.

콧노래 절로 나오는 아늑한 산길을 걷다가 계곡 최상류의 물길을 건너 얼마쯤 오르면 재백이재 삼거리. 내소사 쪽으로 가려면 여기서 왼쪽의 능선길을 따라야 한다. 바위턱을 지나자 곰소만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조망이 아주 좋다.

이곳을 지나면 드디어 관음봉 삼거리. 오른쪽은 내소사로 직접 내려가는 길이다. 내소사로 내려서는 산길은 암봉으로 되어 있어 역시 전망이 아주 좋다.

특히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내소사 전경이 일품이다. 이렇게 내소사를 바라보며 쉬엄쉬엄 내려서면 문득 넓은 공터가 나타나고 그 뒤로는 유명한 내소사 전나무 숲이 펼쳐진다. 그리고 그 전나무 숲길 너머엔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변산반도를 지켜온 내소사가 자리하고 있다.

내소사 지구 문화재 관람료는 어른 1600원, 청소년 700원, 어린이 400원. 주차료는 최초 1시간 1,000원, 이후 10분당 200원씩 추가. 남여치는 입장료와 주차료 없다. 변산국립공원 전화 063-582-7808

(여행정보)

▲ 숙식

내소사 입구에 정든민박(063-582-7574), 마당바위민박(063-582-7582) 등 10여 집이 민박을 친다. 숙박료는 2만5,000원 내외. 내소사 입구에 초원식당(063-581-1077) 등 음식점이 여럿 있다.

남여치엔 숙식할 곳이 전혀 없다. 곰소항 어시장엔 횟집이 많은데, 싱싱수산(063-581-4801)이 푸짐한 편이다.

▲ 교통

△서해안고속도로 부안 나들목→ 30번 국도→ 변산면 소재지→ 736번 지방도→ 남여치<수도권 기준 3시간30분 소요> △서울→ 부안= 동서울종합터미널에서 매일 5회(07:40~17:40) 운행. 4시간 소요, 요금 1만2,900원. 강남터미널에서 매일 50~60분 간격(06:50~19:30) 운행. 3시간10분 소요.

전주공용터미널(15회), 대전서부터미널(4회)에서도 운행한다. △부안→ 남여치= 시외버스정류장에서 수시(06:25~21:30) 운행하는 격포행 직행버스 이용해 변산면 소재지(지서리) 하차. 남여치까지 도보 40분 소요, 택시비는 3,000원. 남여치~내소사 택시비는 1만7,000원. 변산개인택시 063-582-7132, 곰소 개인택시 063-582-7682.



입력시간 : 2007/03/07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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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은 시인에게도 '척박한' 땅?
서울서 뿌리내리는 '부산시인' 손택수
새 시집·창작물 출판 호평 최근 출판사 기획실장 맡아

'부산 시인'이었던 손택수(37)는 지금 서울서 산다. 벌써 3년째다. 지난 2004년 11월 서울로 떠났다. 결혼 당시 부인 정혜정(36)씨의 직장이 서울이었고 겸사겸사 그곳에서도 지내보고 싶었다고 그는 솔직히 얘기했다.

그를 만났다. 서울의 제법 번듯한 출판사에서 그는 기획실장을 맡고 있었다. 책을 기획하고 선별하고 추천하는 일이라고 했다. 어떻게 사는지 궁금했다. 서울로 간 '진짜' 이유도 묻고 싶었다. 아직 젊은 시인이었고 부산에서도 전국 지명도를 가졌던 그였다.

"아이구 반갑네요." 그는 정말 반갑게 인사했다. 커피를 직접 따라왔고 빳빳한 명함을 건넸다. '㈜자음과모음 이룸 이지북 기획실장 손택수'라고 씌어 있었다. 출판사 명칭이 길어 물었더니 "각각 다른 3개의 출판사"라고 답했다. "그렇다고 3곳에서 다 월급을 받는 것은 아니에요. 허허."

그가 이곳에 들어온 것은 최근이었다. "면접을 거쳐 입사했죠." 이전에도 실천문학사 등에서 기획위원을 맡았지만 지금처럼 '상임'은 아니었다. 양복에 넥타이 매고 회사 다니는 것은 처음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다지 어색함이 묻어나지는 않았다.

서울 생활을 물었다. "이제 겨우 정신을 차렸어요. 처음에는 정말 고생 많았습니다." 물갈이라고 했던가. 새로운 물에 적응하려다 보니 '그런 것'을 심하게 앓았다. 대학 시간강사도 하고 사설학원도 다녔지만 생계에 큰 도움을 주지는 않았다.

"지난해 여름엔 특히 더 힘들었습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사적인 아픔'도 뒤따랐다. "덕분에 술을 많이 마셨죠. 그때마다 부산의 용호동이 생각나더군요. 당장이라도 짐 챙겨 내려가고 싶었습니다." 그러다 신혼의 1년이 훌쩍 지났다고 했다.

"안되겠다 싶어서 마음을 다잡았죠." 다행히 지난해 시집 1권과 산문집 1권을 각각 출간했다. 이례적이었다. 부산서 지금까지 펴낸 시집은 고작 '호랑이 발자국' 1권 뿐이었다. 새 시집 '목련전차(창비)'는 출판 때부터 반응이 좋았다. 산문집인 '자산어보(아이세움)'도 벌써 3쇄다. "6천부 이상 팔렸습니다." 그 정도면 '대박'에 가까웠다.

서울에 살면서 책을 내니 다른 점이 꽤 많다고 그는 말했다. "출판 계약금도 다르고 찍어내는 초쇄도 달라요." 전국 서점에 대한 출판사의 관리능력과 애정도 차이가 있다고 했다. "심지어 작가의 저작권도 꼬박꼬박 챙겨줍디다." 이런 저런 시를 끌어모아 만든 시선집을 거론함이었다. 이런 종류의 책은 작가가 일일이 저작권을 주장하기가 힘들다고 했다.

"시인은 다른 줄 알았어요. 그런데 똑같아요." 서울에 살면 시인도 월급쟁이처럼 마음이 늘 바빠진다는 뜻이었다. "정기적으로 작품을 내지 않으면 금방 잊혀지죠. 한 번 잊혀지면 좀처럼 그 위상을 회복하기도 힘듭니다."

한 번은 서울 작가들의 회합자리에서 술에 잔뜩 취해 불평을 털어놨다고 했다. "그 다음날 곳곳에서 거칠게 항의하더군요." 무장해제에 대한 혹독한 대가였다. 웬만해선 취중진담 따위를 용인하지 않았다.

"얼마전에 집 주변에 나무 한 그루를 심었어요. 그런데 다른 나무에는 새가 앉는데 제가 심은 나무에는 좀처럼 날개를 쉬지 않더라구요." 그때 깨달았다. "나무를 심는다고 다 끝나는 것이 아니라 뿌리를 내려 땅과 살을 섞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의 향후 '뿌리'가 궁금해진다. 계속 서울서 살지,아니면 부산에 다시 내려올지. 하지만 부산을 등진 숱한 기업들처럼 부산이 시인조차 견디기 힘든 '척박한' 땅일까.

백현충기자 choong@busa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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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식 개방'에 맞서는 문화다양성 운동
  [창비주간논평]"애국적 구호만으론 '국익' 못 지켜"
  2007-03-07 오전 11:16:23
  오는 3월 18일로 지난 2005년 유네스코 총회에서 통과된 '문화다양성 협약'(문화콘텐츠와 예술적 표현의 다양성 보호를 위한 협약)이 발효된다. 이 협약은 1995년 세계무역기구 출범 이후 다자간투자협정(MAI)이 문화분야 같은 비무역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인식에서 나온 것이다. 이에 따라 각 당사국은 자국의 문화적 표현이 위협받거나 취약한 상황에 처할 경우 문화다양성 보호와 증진을 목표로 규정을 만들거나 재정을 지원하는 방안을 채택할 수 있다. 한국은 이 협약의 통과에 찬성했지만 현재 국회 비준이 미뤄지고 있다.
  
  '문화다양성 협약'이란 단어를 접하면 나는 상반된 두 장면이 떠오른다. 하나는 2003년 10월 크로아티아에서 열린 제2회 문화다양성을 위한 국제네트워크(INCD) 총회의 광경이다. 나 자신도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석한 이 국제회의에서 한국은 스크린쿼터라는 제도를 통해 자국의 문화적 독자성과 다양성을 지켜낸 모범사례로 부각된 바 있다. 다른 하나는 지난해 서울 거리에서 벌어졌던 영화인들의 길고 고단했던 싸움이다. 이 두 풍경을 연결하는 단어는 실상 '문화다양성'이 아닌 '스크린쿼터'라고 보는 게 정확할 것이다. 2006년 스크린쿼터 축소에 맞선 영화인들의 싸움은 한편에선 '문화주권 수호'라는 지지를 받았지만 정부와 주류언론으로부터는 '국익에 반하는 업계 이기주의'라는 비판을 받았다.
  
  문화, 지키는 싸움에서 기르는 지혜로
  
  한국에서 문화다양성 운동과 협약에 대한 논의는 미국의 스크린쿼터 축소 압력이라는 현실로부터 시작되었다. 이것은 한편으로 불가피한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불운한 것이기도 하다. 문화다양성 협약이 폭넓은 문화영역을 포괄하는 국제적 운동의 소산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경우 스크린쿼터만을 즉각적으로 떠올리게 된 상황은 불운하다. 그럼에도 한미FTA로 대표되는 자유무역체제 하에서 문화산업 및 미디어 서비스에 대한 일방주의적 개방압력은 우리들 앞에 놓인 객관적 현실이다. 바로 이 엄중한 현실이 우리에게 문화다양성이라는 낯선 단어를 불러오게 만드는 것이다.
  
  문화연구자들은 문화다양성 운동·협약의 이론적 배경으로 '다문화주의'를 꼽는다. 다문화주의는 동화주의, 즉 근대화론과 문화우열주의에 입각하여 약한 문화는 강한 문화에 흡수된다는 논리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되었다. 한 사회 내에 두 가지 이상의 문화가 공존하는 것을 인정하고 우열을 가리지 않으며, 소수문화에 대해서는 보호정책을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1970년대 이래 특히 캐나다와 호주에서 정책적으로 장려되어 왔다.
  
  다문화주의는 결코 이상주의에 기반한 것이 아니다. 다문화주의는 기본적으로는 다문화의 인정으로 인종간 정치적 통합을 통해 사회적 갈등요소를 해소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하지만 오히려 이런 점에서 인종문제나 빈부격차 같은 사회의 근본적 갈등요소들이 봉합된다고 비판하는 쪽도 있다.
  
  미국과 유럽의 영화전쟁
  
  이러한 다문화주의와 함께 주목해야 할 것은 유럽을 중심으로 촉발된 문화다양성 운동이다. 주지하다시피 미국은 문화산업 중에서도 높은 경제적 비중을 차지하는 시청각 서비스 분야에서 압도적 우위를 점하고 있는 바, 미국자본의 끊임없는 규제철폐 주장은 다름아닌 이익실현의 요구이다. 초창기 유럽 중심이던 세계 영화시장에서 미국은 1차대전을 계기로 맹주가 되었다. 역설적이지만 미국이 1920년대 이후 영화강국이 된 것은 실은 그 자체가 완강한 보호주의의 결과였다. 유럽 영상산업에 맞서 미국은 높은 관세장벽과 극도의 수입제한조치를 통해 자국 영화를 보호해 온 것이다.
  
  세계대전 이후 몰락한 유럽 영화산업은 미국영화의 엄청난 유입에 맞서 스크린쿼터를 구축했지만 미국은 정부와 영화업계의 긴밀한 협력으로 이 방어선을 돌파했다. 2차대전 이후 미국정부는 프랑스와 불룸-번즈 협정을 맺어 미국영화의 수입쿼터를 대폭 늘리는 것으로 전쟁채무 일부를 삭감했고, 미국 영화수출연합은 각국 정부와 직접협상을 통해 유럽 스크린쿼터의 흐름을 지금껏 꾸준히 방해해 왔다. 그 과정에서 미국과 유럽공동체는 문화산업 분야에 대한 지속적 분쟁과 협상을 거쳐 왔는데, 문화다양성 협약은 1990년대 중반 이후 WTO체제에서의 유럽공동체를 중심으로 한 보호주의적 경향을 대변하고 있다.
  
  문화적 예외 청원만으론 어렵다
  
  다시 2007년의 한국으로 돌아와보자. WTO보다 한층 강화된 양자간 협상인 한미FTA가 체결 추진 중이다. 지금까지 7차에 걸친 협상을 통해 양자간 이해관계의 차이가 부분적으로 드러나고 있지만 양국 정부는 이런 차이를 가볍게 무시하고 협상을 강행하고 있다. 특히 미국은 최근 몇년간 WTO체제가 부진을 겪자 다자간협상 대신 양자간협상을 선호하면서 한국뿐 아니라 세계 각국과 FTA를 맺으려 하고 있다.
  
  물론 한국정부는 비판적인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협상 추진이 결코 미국의 일방적 압력에 의한 것이 아닌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한미관계가 단순한 경제적 파트너 관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일본-중국-러시아 등이 연관된 동북아 전체의 정치·군사적 질서의 일부임을 감안하면 한미FTA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게다가 설사 그것이 부분적으로 국가경쟁력 강화를 가져온다 하더라도 그때의 국가경쟁력이 사회구성원의 삶의 질에 두루 긍정적 영향을 끼칠 것인지는 극히 의문이다.
  
  당초 스크린쿼터 논란에서 촉발된 문화다양성 운동은 지금까지 WTO나 FTA 등의 시장개방 압력에 대해 문화적 예외를 인정해달라는 청원운동에 머물러 왔다. 문화다양성 협약 또한 그러한 예외조치에 대한 근거 정도로 수용된 것이 어느 정도 사실이다. 하지만 역사상 어떤 협약이나 협상도 국제사회의 냉혹한 힘의 논리를 제대로 제어하지 못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물론 문화다양성 협약의 국회 비준도 간단한 일이 아니지만, 비준이 된다고 해서 문화적 예외나 문화다양성이 자동적으로 보장되리라는 것은 대단히 순진한 발상이다.
  
  문화다양성의 토착화와 생활화
  
  문화다양성 협약이 실질적으로 힘을 발휘하도록 하려면 크게 두 가지 정도의 '실체화' 작업이 필요하다. 우선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 공허하게 들리는 문화다양성의 명분에 보다 많은 담론의 속살을 채우며 토착화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문화다양성이라는 용어와 개념 자체가 서구중심적이며 여전히 낯선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우리 사회에서 문화다양성을 촉진할 실천 전략과 정책을 다각도로 개발해 많은 사람들이 체감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생각해보면 비단 한미FTA가 아니더라도 문화시장에 대한 개방압력은 지속돼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감상적이고 애국주의적인 구호만으로는 길고 지루한 싸움을 지탱할 수도, 진정한 의미의 국익도 지킬 수 없다. 문화다양성 이념이 서구에서 수입된 선언적 운동의 차원을 넘어 우리의 일상적 가치체계 안으로 수용되어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염신규/문화활동가,민예총 정책기획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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