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얼로 주파수를 맞추면 치직거리는 잡음과 함께 구성진 소리가 흘러나오던 트랜지스터 라디오의 추억. 선반 위, 대청마루에 모셔놓고 들었던 라디오는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전해주는 소식통이었다.
그 시절 라디오의 꽃은 드라마였다. 인기 드라마 방송시간이면 온 가족이 라디오 앞에 모여앉아 성우들의 한 마디 한 마디에 따라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길거리 전파상에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드라마 주제가 최다 취입가수 이미자가 구성지게 불렀던 '섬마을선생님'과 '하숙생', '빨간마후라' 등은 라디오 연속극 주제가였다.
여성들은 이별의 슬픔을 나누는 드라마 속 남녀 성우의 목소리에 몰래 눈물을 찍어냈다. 아이들은 <태권동자 마루치>, <손오공>에 한없이 빠져들었다. 남성들은 성우 구민의 <전설따라 삼천리>나 오승룡의 <오발탄>, 11시55분 <김삿갓 북한방랑기>에 어김없이 다이얼을 맞췄다.
난데없이 왜 라디오이야기냐고? 지난달로 한국방송 80주년을 맞았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경성방송국(JODK)에서 첫 전파를 발사한 것이 1927년 2월 16일 오후 1시. 요즘 KBS는 특집방송이 한창이다.
눈에 띠는 것은 <방송 80년, 사람ㆍ노래ㆍ프로그램>이라는 기획으로 마련된 ‘국민가수 이미자’ 특별공연. 모처럼 TV에 등장한 이미자는 1926년에 발표된 윤심덕의 '사의 찬미'부터 장윤정의 '어머나'까지 가요 80년사의 이정표 같은 명가요 30곡을 열창했다.
또한 전국 시청자 설문조사를 통해 방송사의 큰 획을 그은 진행자, 가수, 코미디언 등 각 분야 방송인을 선정한 <방송 80년 인물 80년>과 시청자가 뽑은 최고의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방송 80년 프로그램 80년> ‘한국방송, 세계를 품다'를 시작으로 한 5부작 <연중기획 희망 릴레이>다큐멘터리와 특선영화까지 각 분야에서 지난 80년 방송역사를 되돌아보는 뜻 깊은 시간이 계속되고 있다.
방송의 시작을 알렸던 KBS 라디오도 공영방송 주간을 정해 각종 특집을 마련했다. 필자도 <최백호 김민희의 라디오 챔피언>에서 마련한 3월 4일 방송 ‘라디오 드라마에 울고 웃던 그 시절’에 성우 배한성, 성병숙과 함께 출연했다.
방송의 꽃으로 자리 잡았던 라디오 드라마에 얽힌 이야기들과 주요 인기 드라마 주제가들을 들어보는 시간이었다. 특집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절감한 것은 역시 기록의 부재다. 관련 자료가 드물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의 기억과 방송 관련 고서를 뒤적이며 얻어낸 정보는 보물단지 같았다.
1924년 시험방송 때 국내에 보급된 라디오는 5대에 불과했다. 개국 후 1,000대가 넘었지만 한국인이 보유한 라디오 숫자는 200대에도 못 미쳤다. 배우 복혜숙 선생의 회고에 따르면 “조선총독부 체신국 뒤뜰에 천막을 쳐놓고 시험방송을 할 때 마이크 앞에서 소위 연극을 했다. 그때는 무대연극의 대본 그대로를 사용했다.
그러니까 무대극을 직접 보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설명이 덧붙여진 형식이었다”고 한다. ‘소리 상자’로 불린 라디오는 당시 대중에게 대단한 충격이었다. 라디오 보급 숫자는 개국 1년 6개월 만에 1만 대를 넘어설 만큼 선풍적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드라마 형식이 시도된 것은 한국어·일어 2중방송이 시작된 후 ‘라디오 프레이미팅’이라는 단체가 연출한 34년 작 <노차부>가 최초다. 김희장이 쓴 이 드라마는 군더더기 설명 없이 대사로만 꾸며진 라디오 드라마의 원형이었다.
35년 12월에는 세모(歲暮)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PD와 아나운서들이 <신안책귀방어>라는 라디오 드라마를 제작했다. ‘빗장이 방어 작전’이란 드라마다. 1936년에는 부민관에서 라다오 드라마 경연대회가 열렸다. 요즘 말로 말하면 공개방송이다. 그동안 무대극을 중계해오던 방송이 새로운 창작 라디오 드라마를 일반에 공개했던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37년 중·일전쟁이 시작되면서 일본인들은 방송극을 신민정책을 위한 전쟁수행과 목적극으로 변질시켜 나갔다. 41년 2차대전을 일으킨 후 사라진 드라마는 해방 후에도 좋은 극장프로를 중계하는 정도에 그쳤다. 하지만 미군이 주둔하면서 방송에 파견된 미군정의 고문관들로 인해 정시 방송제와 프로그램의 드라마화가 이뤄졌다.
해방 후 최초의 방송 드라마는 홍은표 작 윤준섭 연출의 <화랑관창>이다. 드라마에 관심이 증폭되자 숨은 작가 발굴을 위해 방송희곡 현상모집까지 했다. 1등에 김희창 작 <꿈의 공덕>, 2등에 최요안 작 <세뱃돈> 3등에 조남사 작 <큰아버지 소동>이 당선되었다.
이때까지도 성우라는 독립된 영역은 없었다. 무대배우가 방송에 나오면 성우가 되는 형편이었다. 방송극출연자는 복혜숙, 한은진, 김승호, 황정순 등 무대배우들이 압도적이었다. 이때 보강된 최초의 성우들은 고 최무룡과 윤일봉 그리고 구민 등이었다. 한국전쟁으로 방송은 다시 암흑기를 맞이했다가 54년 CBS가 개국하면서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라디오 드라마에 주력한 기독교방송은 전속성우 모집을 통해 양과 질적인 성장을 이뤄냈다. 이에 충격을 받은 KBS는 54년 5월 ‘환도 후 제1회 방송성우’를 공개 모집해 22명을 뽑았다. 유명 성우인 오승룡, 고은정이 이때 선발되었다. 1기생들은 3개월의 강습을 거쳐 <무도회의 수첩>이라는 첫 작품을 발표했다.
KBS와 CBS의 라디오 드라마 경쟁은 대단했다. 1956년 조남사의 KBS 일요연속극 <청실홍실>이 최초로 드라마 주제가를 도입하며 빅히트를 터트리자 CBS도 <수정탑>으로 대응하면서 연속방송극의 인기는 하늘로 치솟았다. 57년 10월 1일 첫 일일연속극 조남사 작 이보라 연출의 <산넘어 바다건너>는 새로운 방송극 시대를 전개했다.
60년대 들어 MBC, DBS, TBC등 민간방송이 앞다투어 생겨나면서 라디오 드라마는 온국민을 웃기고 울리며 라디오 앞으로 끌어 모았다. 그 결과 각 방송국의 성우모집 때가 되면 지원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뤘다. 성우는 당시 젊은이들이 가장 선망하는 직업이었다.
70년대에 접어들면서 TV보급 확대와 더불어 라디오 드라마의 인기는 자연스레 TV로 이동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차부인 재치부인>, <즐거운 우리집>, <김삿갓 북한 방랑기>등 라디오 드라마는 각 가정의 시계 구실을 톡톡히 하였다.
지금은 TV, 인터넷 등 음악이나 오락, 정보, 뉴스를 얻을 수 있는 미디어가 넘친다. 그러나 라디오는 보는 것만으로는 다 채워주지 못하는 아름다운 상상의 세계를 지녔기에 대중의 사랑을 받는 미디어로서의 생명력은 지속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