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출판 2005/10/02 08:44
http://blog.naver.com/twinmemory/20017685018
고급독자 사냥꾼 ‘1인 출판’ 게릴라
“품질만 높다면 독자는 있다”
가능성과 기획력 무기로 홀로서기
마흔 되면 퇴출 단명문화도 등 떠민다
야무진 열정뒤 “생존률 30%” 불안감
대형출판사 “소사장 되라” 영입 유혹
브랜드 다양화·돈줄 수혈 상생한다지만
”출판시장 좀 먹는다” 우려의 눈빛도
오철우 기자
▲ 1인 출판사 ‘사이’를 운영하는 권선희(35)씨가 사무실에서 로마 고전 연속물의 출판기획을 혼자 짜던 중에 걸려온 전화를 받고 있다. 1인 출판이 새로운 출판문화를 열어줄 것으로 기대하는 그는 “긴 호흡으로 자기 편집의 색깔과 맛을 담을 수 있는 책들을 내고 싶다”고 말했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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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선희(35)씨는 책 만드는 일엔 빠끔한 출판사 편집기획자다. 아침 9시쯤 서울 동교동 서너평짜리 오피스텔에 출근하는 그는 늘 팩스부터 살피며 일을 시작한다. 인터넷서점과 대형서점에서 온 책 주문을 모아 오전 중에 창고·배본회사에 연락해 책을 서점에 발송하게 한다. “책 주문량을 확인할 때 가장 즐겁고 비로소 내가 출판사 경영자임을 느낀다”고 한다. 다른 동료·직원이 없는 그는 ‘사이’ 출판사의 1인 출판인이다. 그가 곧 출판사다. 출판계의 뚜렷한 현상이 된 ‘1인 출판’ 확산의 명암을 권씨의 사례를 통해 짚어봤다.

30대 중반, 홀로서다

권선희씨는 지난해까지 10년 동안 출판사에서 일한 편집자였다. 한때 수백만권이 팔린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의 편집기획자였던 그가 느닷없이 독립선언을 하고서 외롭고 위태로운 창업의 길에 들어선 건 지난해 가을. “10년차 경력에다 30대 중반 나이에 이르니, 박수칠 때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더 깊어졌어요. 꼭 성공할 기약은 없더라도, 평생 내가 만들고 싶은 책을 내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만 있다면….”

출판 경영·영업엔 경험이 없는 편집자인 그가 출판사를 차릴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시대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1990년대 중반까지 출판사 창업을 하는 이는 주로 영업부장들이었습니다. 전국 서점의 복잡한 유통망과 인맥을 쌓은 영업자가 뛰어난 출판인이었죠. 전국 유통망에 책을 깔고 수금하는 데 능력을 발휘하며 성장했습니다. 그런데 인터넷서점과 대형서점 중심체제가 된 지금은 ‘책만 제대로 만들면 팔린다’는 새로운 기회가 열리게 된 셈이죠.” 한국출판아카데미에서 강의하는 휴머니스트 출판사 김학원 대표의 말이다.

권씨는 어떻게 창업했나. 권씨는 지난해 11월 출판사를 차렸다. 씨앗 자본은 2000만원. 그렇지만 그가 하는 일은 여전히 편집기획이 대부분이다. 외국서적을 번역할 때 필요한 저작권 대행, 표지 디자인, 조판과 편집·교열까지, 그리고 책을 출간한 뒤엔 유통회사 한 곳에 전국 서점 유통을 통째로 맡겼다. 책은 물류창고 회사에 맡기고 권씨가 직접 관리하는 인터넷서점과 대형서점에서 주문이 들어오면 책을 내보내게 한다.

”최근엔 자잘한 영수증 처리 같은 회계 업무도 회계사에 맡기는 1인 출판도 많아요. 전체 흐름을 기획·관리하고, 인터넷이나 도서관에서 책 정보들을 얻거나 예비 저자들을 만나 새 책을 구상하는 게 나의 주된 업무죠.“

1인 출판을 지원하는 여러 작은 회사들이 생겨났다. “꽤 규모 있는 출판사들은 홍익대 부근에 많이 몰려 있습니다. 그 주변인 동교동엔 디자인·조판·편집을 대행하는 프리랜서 사무실들이 꽤 늘고 있어요. 이곳을 중심으로 1인 출판 사무실들이 여럿 들어서 공생하고 있죠.”

도전…두려움…

권선희씨는 자유롭다. 젊기에 야무진 열정도 넘쳐난다. 다른 회삿일에 얽매일 일도 없으니 맘 편한 것 같다. 그렇지만 그는 “정체 모를 막연한 불안감”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가장 두려운 순간은 어떤 책을 출판하기로 결정할 때, 제목과 표지디자인을 최종 결정할 때였다고 한다. “그야말로 불안감은 막연합니다. 내가 홀로 내린 결정이 맞는지 가장 두렵죠. 아는 사람들이 사무실을 찾을 때마다 습관적으로 여러 의견을 묻고 듣고 있지만, 창업 1년이 다 됐는데도 아직 불면증에서 완전히 헤어나오진 못한 것 같아요.” 얼굴만은 밝다.

그는 아침 9, 10시쯤 출근해 보통 밤 10, 11시쯤 퇴근한다. 토요일은 물론이고 일요일에도 출근하는 일이 잦다. 아니. 거의 항상 출근하고 있다.

권씨가 지난 7월 낸 첫번째 작품 <갈리아 전쟁기>는 그에게 작은 희망이었다. 많이 팔리진 않았지만 “로마 고전에 정통한 고정 독자층이 국내에 이처럼 꽤 있는 줄은 몰랐어요. 많진 않았지만 번역이나 편집에 대해서도 의견을 보내주고 분명한 반응이 일어났어요. 편집기획을 평가하는 고급 독자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는 건 희망입니다.” ‘책의 품질만 높다면 독자는 있다’는 믿음, 거꾸로 ‘이젠 책의 품질이 높지 않으면 팔리지 않는다’는 믿음이 창업의 경험을 통해 더욱 굳어졌다고 한다. 그는 1인 출판인을 일러 “대형출판사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틈새의 고급 독자를 위해 활동하는 게릴라 편집자”라고 말한다.

성공보다 더 많은 좌절

1인 출판은 앞으로도 더욱 늘 것이라고 대부분 출판인들은 내다봤다. 권씨도 그렇다. “기존 출판사에서 나이 들도록 편집 전문가로 성장할 길은 우리나라에선 현재 없어요. 난처한 처지가 되기 전에 빨리 독립해야 한다는 생각은 대부분 편집자들이 지닌 생각일 겁니다. 출판사의 낮은 임금도 한몫하고요.” 그는 “10년차 정도 경력을 지닌 주변의 여러 친구들도 1인 출판을 준비 중”이라고 전했다.

그렇지만 1인 출판이 다 성공을 보장하는 건 아니다. 권씨도 그게 불안하다. 서적유통 회사는 그 성공과 실패가 확연히 드러나는 현장이다. 서적유통사 송인서적의 윤성기(46) 관리이사는 “책 한 권 내고는 더 내질 못해 좌절하는 1인 출판들도 꽤 많아졌다”며 “1인 출판이 계속 책을 내는 확률은 30%도 되지 않는데 요즘 성공 사례들만 너무 부각되는 것 같다”고 우려했다. 1인 출판인들이 새 책을 들고 유통회사를 찾는 일은 성수기인 여름을 앞둔 봄철에 크게 늘었다가, 가을엔 크게 주춤해진 상태라고 그는 전했다.

권씨는 요즘 “1인 출판의 한계도 분명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출판사가 생명을 유지하려면 새 책을 꾸준히 펴내야 하지만 쉽잖은 일이다. 또 꽤 큰 비용이 들어가는 출판 기획은 지금으로선 꿈도 꾸지 못한다. 틈새 시장만을 겨냥해야 한다. 그는 “소수의 고급 독자를 위해 책을 내는 일은 즐겁지만 언제까지 1인 출판에 머물러야 할지 아직 확신이 없다”고 말했다. 올해 초에 창업한 1인 출판 에코의서재 대표 조영희씨도 “책을 꾸준히 내어 생존하기 위해선 1인 출판 규모로는 한계가 뚜렷하다”라며 “여력이 갖춰지는 대로 동업자 또는 직원을 늘릴 생각을 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60대 편집자가 없는 출판계”

1인 출판을 깊게 바라보면 출판계의 시각은 다소 엇갈린다. ‘고용된 편집자’에서 ‘자기 브랜드를 키우는 편집자’의 시대로 넘어가며, 이제 자본이 아니라 편집기획으로도 성공을 예감할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는 전망은 무수한 편집자들한테 기회와 가능성을 던져주고 있다.

하지만 1인 출판이 활성화하는 배경에 대해서도 눈을 돌려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1인 출판이 늘어나는 데엔 전문 편집기획자을 길러내지 못하는 국내 출판사들의 영세적 출판 구조가 한몫하고 있다는 것이다.

편집기획자들은 무엇보다 ‘단명하는 편집자 문화’를 꼽는다. 20대에 출판사에 첫 발을 내디딘 편집자는 10년, 20년의 경력을 쌓으며 30·40대로 성장하면, 이내 퇴출의 압력을 느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편집기획자를 자주 물갈이 해야 신선한 기획력이 산다’는 일부 출판 경영철학도 이런 분위기에 자리잡고 있다. 여기에 만일 가족 중심 경영 때문에 불거지는 갈등까지 겪게 되면 창업은 불가피한 선택이 되고 만다. 한 편집기획자는 “편집기획자들이 1인 창업에 나서는 근본 배경을 짚어보면, 그 본질엔 가족경영을 벗지 못하는 출판사가 전문 편집자 양성에 제대로 투자를 하지 않는 구조가 자리잡고 있다”고 꼬집었다.

실제로 ‘나이’는 1인 출판인들이 말하는 주요한 창업 동기다. “솔직히 말해 40대가 되면 편집기획자의 생산성도 떨어지고 회사 처지에선 고액봉급자 직원에 대해 부담을 느끼게 되겠죠. 40대에 관리자가 될 수 없다면 결국 출판사를 떠나야 합니다. 달리 갈 데가 없어요. 30대 중반만 돼도 그런 압박은 현실이 됩니다.” 다른 편집기획자의 말이다. 이 때문에 50·60대 나이에도 편집 현장에서 전문가로 일하는 편집자는 국내에서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대형출판사 ‘편집자 모시기’

바닥에서 편집자들의 1인 출판 바람이 불고 있다면, 꼭대기에선 대형출판사들의 편집자 모시기 바람이 불고 있다. 유능한 전문 편집자를 영입해 자금을 지원하고 마음대로 책을 내게 하면서, 동시에 대형출판사들의 브랜드를 확장하고 매출과 수익도 늘리자는 포석이 이런 움직임에 깔려 있다. 이른바 ‘임프린트’(imprint)로 불리는 일종의 소사장 제도는 출판계의 새로운 화젯거리다.

본래 영·미 출판계에서 정착해 출판사 인수합병(M&A)의 토대가 된 이 제도는 최근 2~3년 새 국내 대형출판사인 랜덤하우스중앙과 웅진씽크빅이 도입해 시행하고 있다. 편집자들이 자금 지원을 좇아 이동하고 기존 출판사들의 경영 구조에도 변화를 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에 관심의 대상이다.

국내 처음으로 임프린트를 도입한 랜덤하우스중앙은 두앤비컨텐츠, 북박스, 드림하우스, 울프, 키즈랜덤 등 아홉가지 브랜드를 전문화해 운영하고 있다. 웅진씽크빅은 웅진지식하우스와 웅진주니어에 더해 외부 편집자를 영입한 리더스북, 노블마인 등 두가지 브랜드를 더 내고 있다. 모두 3년 계약이며, 출판 기획·편집은 임프린트 대표의 독자적 결정에 맡긴다고 한다.

웅진씽크빅 임태주(39) 출판신사업팀장은 “책의 미래는 이제 유능한 편집기획자의 손에 달려 있다”며 “1인 출판을 꿈꾸는 편집기획자는 자금을 지원받아 좋은 책을 많이 낼 수 있고 대형출판사는 유능한 여러 편집인재들을 모아 브랜드를 다양화할 수 있다”며 임프린트 제도의 가능성을 강조했다. 랜덤하우스중앙의 최봉수(44) 사업운영실장은 “임프린트가 정착한다면 출판계에 편집기획 인재들을 끌어모을 수 있는 구조도 마련되리라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임프린트를 도입한 출판사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이를 경계하는 출판계의 목소리는 여전히 높다. 대형출판사들이 브랜드를 확장하며 출판시장 잠식을 가속화할 것이며, 매출·수익 성과로 평가하는 편집의 경쟁체제를 극대화해 결국 출판문화를 해칠 수 있다는 우려는 해소되지 않고 있다.

창업 직후에 여러 차례 임프린트 참여 권유를 받았다는 권선희씨는 “아직은 내가 만들고 싶은 나의 책을 출판하고 싶어 거절했다”고 말했다.

한 시대의 작가와 독자는 편집기획자를 통해 창조된다. 그래서 편집자는 종종 “지식 사냥꾼” “지식의 조직가”로 불린다. 서로 다른 방향에서 나타난 1인 출판과 임프린트의 바람은, 이런 편집기획자들이 차지하는 몫이 점차 커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또 편집기획 자체가 ‘브랜드 가치’로 평가받기 시작하는 사례들이다. 김학원 휴머니스트 대표는 “국내 독서인구가 이젠 해방 이후 2, 3세대를 맞으며 수준 높은 책을 찾는 고급독자들도 생겨나고 있다”며 “책 한 종이 수백만권씩 팔리는 ‘대중출판’ 시대가 물러나고 ‘전문출판’ 시대가 오는 이 때에 1인 출판이든 임프린트이든 단기적 성장·성과에 매달리기보다 독자·작가와 함께 오래도록 성장하는 편집기획 체제를 갖추는 데 기여해야 할 것”이라고 주문했다. 오철우 기자 cheolw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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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홀로 출판사’뜬다 | 글모음 2005/10/02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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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홀로 출판사’가 뛰고 있다.

연 수억원대의 매출을 올리던 중견 출판사들마저 불황과 도매상 연쇄부도 여파로 속속 폐업의 길을 걷고 있는 가운데, 책의 기획 편집부터 영업까지 모든 것을 한 사람이 도맡는 이 초소형 출판사들의 존재는 이채롭기까지 하다.

지난 8월, ‘퇴직시대, 120% 권리찾기’라는 실용서를 내며 출판시장에 뛰어든 도서출판 ‘참솔’은 김혜숙씨(39)의 1인 출판사. 10년 넘게 출판 편집부문에서 일했던 그는, 4년간 현업에서 쉬다 올봄 복귀하면서 자기 회사를 등록했다. 첫 작품 ‘퇴직시대…’는 출간 한달만에 초판을 다 소화해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최근 후속작 ‘쉽고 안전하게 돈 빌리는 법 45가지’을 낸 데 이어 샐러리맨 부업에 관한 책 등을 준비중이다. 출판사를 차리기 전 시장조사를 한 결과 독자층은 확실한 반면 경쟁은 덜 치열해 적은 자본으로도 덤벼볼 수 있는 실용서로 방향을 잡았고, 자리가 잡히면 인문학과 예술서로 선회해볼 생각이다.

김씨가 편집자 출신이라면, ‘사랑의 학교’의 이상복씨(49)는 영업부문에서 9년간 잔뼈가 굵은 경우. 범우사 영업부장을 끝으로 퇴직한 뒤 95년 출판사를 차린 그는 이원복교수의 ‘사랑의 학교’(전 2권)와 ‘펜 끝으로 여는 세상’ 등 11종을 냈다. 영업통답게 한달에 한번 정도 지방 서점들을 돌며 출판흐름을 파악하고, 영업자들과 대화를 나누며 기획 아이디어를 얻곤 한다. 아동과 청소년 부문에 주력해 ‘지식보다 감동을 전달하는’ 책들을 펴내는 게 그의 목표다.

6년간 출판사 편집자와 주간신문, 잡지 기자로 편력한 황기직씨(39)는 92년 ‘새벽소리’라는 이름으로 출판등록하고 2년 뒤인 94년 ‘윤복이의 일기’를 펴내며 본격적으로 1인출판에 뛰어들었다. 지금까지 ‘장다리 1학년 땅꼬마 2학년’ ‘머리 둘 달린 봉황새’ 등 아동서 4권을 포함해 9권을 냈다.

이들 1인 출판사의 대표는 한마디로 사환이자 사장이다. 기획과 편집 교열은 물론, 입출금, 우체국 발송, 판매, 광고, 복사까지 다 자기 몫이다. 말이 좋아 ‘나홀로 출판’이지, ‘악전고투’요 ‘가시밭길’이기 십상이다. 회사 상사였던 선배출판인(문예출판사 전병석사장)이 사무실 일부와 집기, 전화 등을 사용하도록 배려하고 유통과 판로까지 거들어준 김혜숙씨의 경우는 ‘행복한 예외’에 속한다. 이상복씨는 개인적인 인연으로 첫 작품을 지명도 있는 필자인 이원복교수의 책으로 낼 수 있었고, 판매 일선에서의 오랜 현장경험과 인맥이 보탬이 된 경우다.

“책 한권을 내는데 500만~1000만원 가량이 드는데, 다른 분야에 견주어 투자액은 적은 반면 판매대금 회수가 느리다. 적어도 5, 6종을 낼 때까지 계속 투자해야 하고, 자금회전도 원활하지 못하다. 하지만 자본력 부족은 소규모 출판사 어느 곳이나 사정이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1인 출판사가 결정적으로 취약한 부분은 영업력쪽이라고 봐야 한다. 혼자서 거래할 수 있는 곳은 도매상 두어군데나 직거래 서점 10여곳 남짓. 이 정도로는 판매가 원활치 않아 더 팔릴 책도 잠재우기 일쑤다”고 김혜숙씨는 털어놓는다.

1인 출판사는 편집자 출신이 차린 경우 책의 질은 높은 편이지만 영업자 출신보다 판매력이 떨어져 문닫는 경우가 많다는 게 출판계의 속설이다. 반면 영업자 출신은 책의 완성도는 떨어져도 서점들과 연결이 잘 되고, 독자반응을 현장에서 접해본 감각 때문에 일단 창업에 성공할 확률이 높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의 명함에 ‘대표’ 대신 ‘기획실장’이란 직함을 단 황기직씨는, 배본대행과 영업대행사 등이 있기 때문에 기획 편집 중심의 1인 출판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본다. 다만 혼자 작업할 수 있는 양이 뻔하기 때문에 “책을 자주 못내 거래처와도 소원해지고, 독자들에게도 출판사의 이름을 각인시키기 어렵다”는 아쉬움을 호소한다.

대부분의 1인 출판사 사장들은 “5~10종 정도는 기획을 준비하고 시작한다”고 말한다. 그만큼 출판에 대한 나름의 구상이 있고, 애착도 크다. “혼자 해냈다는 성취감, 그렇게 만든 책을 독자가 사줄 때의 기쁨”(이상복), “내가 원하는 책을 만들고 싶다는 욕망”(황기직)이 고생길을 떠나지 못하게 하는 이유다. 지난 8월 ‘새움’이란 출판사를 등록해 10월말 첫 책 ‘백두산 호랑이’를 펴낼 예정인 이대식씨(34)는 “출판계에서는 나름대로 가치있는 내용인데도 상업성이 작다는 이유로 사장되는 원고들이 적지 않다. 그 원고들에 책으로 나올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는 게 1인 출판”이라고 ‘개업’의 이유를 밝힌다.

1인 출판사는 경영경험이 없고 소자본인 경우 출판사 창업의 한 방법이 될 수는 있지만 장기적으로 지속되긴 어려운 ‘과도기적 형태’다. 하지만 발빠른 기획, 혹은 돈 벌 욕심 없이 남의 간섭이나 직원 급료 줄 부담에서 벗어나 오로지 내가 만들고 싶은 책만 내겠다면 나름대로 장점도 적지 않다.

최근 ‘성호사설 정선’ 전 3권을 직접 편역주해해 펴내 화제가 된 ‘현대실학사’의 정해렴씨(59)는 그런 점에서 1인 출판사의 귀감으로 꼽힌다. 35년의 경력을 가진 편집전문가에 창작과비평사 사장까지 역임한 그는 91년 첫 책 ‘한용운 산문선집’을 비롯해, 다산 정약용과 홍기문 안자산의 선집 등 주로 실학과 그 맥을 잇는 국학 분야의 책 20여권을 펴냈다. 관심분야이기도 하고, 지금 정리해 놓지 않으면 소중한 한문고전 유산이 한글세대에 이어지지 못한 채 단절될 것이라는 걱정 때문이다.

“내가 내는 책들은 영업해서 인세를 뽑기 힘든 책들이다. 이익은커녕 수지균형조차 맞추기 어렵다. 상업성이 없으니 다른 출판사에서는 손대지 않고, 그래서 직접 만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분야를 정리해 놓아야 우리 학문방향이 제대로 잡힌다고 나는 생각한다. 출판사 이름도 현대 학문이 실학정신이 있어야 제대로 된다는 뜻에서 지었다. 다행히 오랜 훈련덕택에 원고부터 제작까지 혼자 다 처리할 수 있기도 하고, 그것이 출판의 본령이라고도 생각한다”

김 영 신 기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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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책의 숨쉬는 역사, 출판 디자이너 정병규
2006.07.10 08:00

책이 무엇인지 책에게 물어볼까 싶어 사전을 열었다. “①사람의 사상과 감정을 나타낸 글이나 그림을 종이에 인쇄하거나 적거나 하여 여러 장을 한 묶음으로 해서 꿰맨 물건의 총칭. ②종이를 여러 장 겹쳐서 꿰맨 물건”. 어영부영 넘기려는데 책(冊)자가 눈에 불쑥 뛰어든다. 한 덩어리로 묶은 종이 더미를 옆에서 본 형상이, 말보다 명쾌하다. 책은 몸이 있어서 비로소 책이다.

사람들은 지적 호기심이 책을 욕심내게 만든다고 믿곤 한다. 그러나 기억의 갈피를 들춰보면 책에 대한 사랑은 물욕에 가까웠다. 부모님께 선물받은 문고 상자를 뜯던 날의 가쁜 숨, 활자가 종이에 눌러 새긴 자국의 살가운 촉감, 두꺼운 책을 펼치면 밀려오는 먼 북쪽 나라의 숲 냄새, 얼굴을 파묻고 훌쩍이면 짠 습기를 먹고 같이 울던 책장. 모두가 육체가 기록한 추억이다.

출판 디자이너 정병규(60)는 책에게 몸을 지어주는 사람이다. 경북 중·고등학교 교지와 고려대학교 신문을 편집하며 분주한 학창 시절을 보낸 그는 1970년대 초·중반 <소설문예> 편집장을 거쳐 신구문화사, 민음사, 홍성사에서 기획, 편집자로서 ‘미다스의 손’이라 불러 어색하지 않을 걸출한 이력을 쌓았다. 1977년 당대 책 표지 디자인의 통념을 무너뜨린 한수산의 <부초>(민음사)부터 책 디자이너를 공식 직함으로 삼았지만 이미 편집자 시절부터 내용과 긴밀히 호응하는 책의 모양새를 다듬는 일은 그의 엄연한 업무였다. 1979년 유네스코가 일본에서 주최한 편집인 연수 과정에서 출판 디자인의 우주를 엿본 정병규는 36살에 프랑스 유학을 결행하고 귀국해, 기획과 제작까지 꿰뚫어보는 전문 디자이너로서 수천권의 책에 날개를 달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한국 최초의 북 디자이너’라는 해설이 그의 이름에 부제처럼 따라붙었다. 1996년 전시회로 책 디자인 20년의 성과를 갈무리한 정병규는, 60살을 맞은 올해 5월 영월 책 박물관에서 ‘책의 바다로 간다-정병규 북 디자인전’을 가졌다.

부주의한 독자인 내가 정병규의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민음사)의 표지 안쪽에서였다. 그리고 1990년대 초 영화를 기웃대던 대학생이면 한번쯤 뒤적였을 루이스 자네티의 <영화의 이해>(현암사)와 랠프 스티븐슨과 장 데브릭스의 <예술로서의 영화>(열화당)의 책날개에서 그 이름과 재회했다. 도서 십진분류법에 집착하지 않는 애서가라면 누구나 정병규가 디자인한 책을 모아 책장 한칸을 새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정병규의 디자인은 담백하고 지적이다. 지금 당신이 입장할 세계는 이런 곳이라고 속삭인다. 타이포그래피(서체)의 표현력에 대한 그의 믿음은 견고하다. 제목의 활자들이 각기 독립해 시의 울림을 전하는 <창비시선>의 표지나, 사진이 표지 아랫목에 들어앉고 ‘굿’ 단 한 글자가 그 위에 오연히 버티고 선 스무권의 <굿> 시리즈(열화당)는 대표적 예다. 열화당의 이기웅 대표는 <굿>의 표지를 가리켜 “글자가 이 책의 깃발”이라고 표현했다.

정병규 디자이너를 만날 날을 기다리며 서점에 들른 나는 자신이 얼마나 둔감한 독자였는지 새삼 통감했다. 색과 생김새, 가로 세로의 폭과 부피가 모두 책의 메시지였다. 거기 귀를 열면 인문이니 기술이니 서가의 안내판을 보지 않아도 잘못된 서가에 접어들었음을 느끼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온갖 책이 빽빽이 우거진 디자이너 정병규의 작업실을 방문한 것은 오후 세시였다. “오전만 아니면 된다”고 약속에 조건을 달았던 주인이 도착하자 그제야 아침을 맞은 책의 숲이 수런수런 깨어났다. 정병규 디자이너는 대화 중에 자주 눈을 감았다. 그리고 눈 감으면 손에 잡힐 듯이 보이는 다른 세상의 풍경을 하나하나 묘사하듯이 회고와 해석과 상상을 풀어놓았다. 언젠가 그는 “인간을 혼자 있을 수 있도록 한다”는 점을 책의 미덕으로 꼽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몹시 내성적으로 들리는 그 말이 결국 책을 통해 인간과 세계의 핵에 곧장 가 닿고 싶다는 애태움의 표현이었음을 알아차리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밤이 이슥해서야 인터뷰를 마친 나는 정병규 디자이너가 펼쳐 보인 생각의 긴 두루마리를 간추리기 위해 내가 얼마나 대담해져야 하는지, 또한 그의 이야기를 어떤 서체로 옮기는 것이 합당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중·고교 시절 교지 편집부터 시작해 <고대신문> 편집국장을 지내셨습니다. 당시 함께 신문을 만들었던 출판사 열린책들의 홍지웅 대표님 말씀으로는 <고대신문>에서도 단편소설을 통째로 실어버리는 식의 파격을 행하셨다고 하던데요.
=나이 든 학생이었기 때문에(그는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에 처음 들어갔다가 다시 고려대 불문과에 입학했다) 남들과 다른 존재라는 의식이 강했어요. 그리고 불문과는 학년에 남자가 겨우 5명이었는데 그 소외감은 지금도 생생히 살아 있어요. (웃음) 내게 지금까지 살아온 길을 요약하라면 한마디로 ‘딴 짓하기’라고 부를 수 있을 겁니다. 학생 시절에는 공부와 학점이 메인인데 신문이나 교지 편집에 공을 들였고 사회에 나와 잡지사에 취직했을 때도 편집자로서 교정은 안 보고 디자인에 손을 댔어요. ‘부전공’이 없으면 ‘주전공’도 맥을 못 췄어요.

-애초 창작을 목표로 삼아 작가를 지망했다가 불문과로 재입학하면서 문학이론으로 방향을 틀고, 다시 편집으로 거기서 마침내 30대 중반에 출판 디자인 분야까지 이르는 길을 걷게 된 원인도 그것일까요?
=안정될 만하면 엉뚱한 짓을 하니 가족들이 피해를 보았죠. 1996년의 북 디자인 전시회는 그런 갈등의 정점이었어요. 또 “인생을 이렇게 디자인으로 마감하기엔 뭔가 부족하잖아?” 하는 생각이 고개를 들었거든요. 요즘도 마지막으로 딴 짓할 게 뭘까 생각하다가도 “아이고, 이거 또 해야 돼? 너무 피곤하지 않아?” 해요. (웃음) 그러나 역시 “이것이 나의 일이다”라는 신념만큼 “내가 꼭 이것만 해야 하나?”라는 생각도 중요합니다. 사람이 하는 ‘딴 짓’의 정점은 결혼 안 하고 혼자 사는 일일 거예요. 인간이 태어나면 생명을 연장하고 종족을 보존하기 위해 결혼하는 것이 원칙인데, 그것을 안 하는 거니까요. 크게 보면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오면서 인류 문화의 틀에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딴 짓하기’가 합리화되고 인정받는 현상이에요. 문자에 눌렸던 이미지, 정신에 열등하다고 여겨졌던 육체, 남자에게 억압받던 여성이 주권 회복을 하는 것이죠.

-이미 출판계에 자리를 굳히고 홍성사를 창립해 인문서적을 크게 성공시키는 전성기를 누리시고도 30대 중반에 파리 에스티엔느로 출판디자인 유학을 결행하셨습니다.
=다섯 출판사 대표들이 돈을 모아서 내 유학비용을 댔어요. 그만큼 당시 출판계는 ‘문화운동’을 하고 있다는 의식이 강했어요. 그런데 유학 준비를 거의 마쳐가던 무렵 엄청난 사실을 깨달았죠. 내가 유학하는 동안 한국에 남아 있을 처자식의 생활비를 까맣게 잊고 계산에 안 넣었던 거야. (좌중 폭소)

-흔히 글쓰기 단계에서 중요한 일은 모두 일어나고 편집은 단정한 포장일 뿐인 것처럼 여길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어떤 글에서 추천하신 마쓰오카 세이코의 <지식의 편집>이란 책을 보니 편집은 모든 유기체가 수행하는 일이며 인간의 놀이, 대화, 연상, 모험 등이 모두 편집이라 정의되어 있어서 감탄했습니다. 책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마음이 든든해지는 것도 같았고요.
=(웃음) 그래서 우리가 교회를 가는 거죠. 나도 성경을 읽었지만 목사님이 “이런 겁니다” 하면 새삼 깨닫잖아요? 마쓰오카 세이코는 1970년대에 이미 학술지도 대중지도 아닌 이과와 문과를 합치고 가로지르는 <유>(游)라는 충격적인 잡지를 만든 사람이에요.

-한 개체 안에 있는 것만으로는 언제나 부족하다, 모든 것은 관계 짓기의 문제라는 뜻 같기도 합니다.
=여기 라이터와 담배가 있지만, 둘이 만나야 담배를 피울 수 있죠. 정당도 선거 때 다른 당과 만나야 정치가 되죠. 따지고 보면 구조주의가 먼저 가진 문제의식이지만, ‘딴 짓하기’를 확실히 주체화하고 공식화하는 것은 일본사회의 장점인 것 같습니다.

-출판 디자인에서 ‘정병규 유파’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것은 단아하고 서체의 표현력을 살리는 선생님 작품 특유의 시각적 스타일을 이르는 말이라고 봐야 할까요? 아니면 인문학적 소양을 바탕에 깐 종합적 플래너로서 디자인하는 태도에 붙여진 말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까요?
=그런 건 실체는 없어요. 내가 왕성한 활동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몹시 외로웠어요. 1990년 초반까지만 해도 기존 디자인계에서 내가 하는 일을 디자인이라고 말하지 않았어요. 광고 중심의 기업봉사형 디자인을 그래픽디자인의 본령으로 알았으니까. 하지만 광고의 특징은 물건을 만들지 않고 유통에만 신경을 쓰며 디자이너가 익명이라는 점이에요. 책, 잡지를 만들고 편집하는 것은 필자, 사진가, 디자이너가 함께 만들고 이름을 밝혀 책임을 지는 문화 생산형 디자인이죠. 그래서 공부를 마치고 귀국해 제일 먼저 쓴 글의 제목이 “북 디자인은 모든 그래픽디자인의 원점이다”였어요. 그러다가 제 생각을 이해하고 뜻을 같이하며 디자인으로 실천하는 친구들이 하나둘 늘어가기 시작했어요. 1992년에 계 비슷한 것을 만들었어요. 술을 먹자니 명분이 필요하니 세미나도 하고 뒤늦게 유학을 떠나기도 했죠. 결국 그 모임이 지금 젊은 세대까지 끌어안고 36명이 가입한 SPC(Seoul Publication Designers Club)라는 단체로 진화한 것이죠. 매번 술자리에서 좋은 계획도 많이 세우는데, 민주화운동과 동시에 결의해놓고 오늘날 노무현 정권이 되도록 실행 안 한 게 많아요. 그게 또 우리(디자이너)들이잖아요? (좌중 폭소)

내가 존재하려면 책의 약점을 생각해야 한다는 게 괴롭죠

-혹시 카뮈를 닮았다는 소리 듣지 않으십니까?
=여위어서 그렇죠. 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했지만 그 이전부터, 그러니까 고등학교 다닐 무렵 문학은 현실에 대해 “이건 아닌데”라는 의식을 가질 때마다 어김없이 멀리서 번득이는 섬광 같은 것이었어요. 우리 시대는 김우창 선생 말마따나 궁핍한 시대여서 뜻을 품었다 하는 젊은이들은 거의 문학을 지망했죠. 다른 예술보다 돈도 덜 들지만, 자기를 표현하고 세상을 보는 틀을 문자로 형성하고 그 틀을 개선하는 힘마저 문자에서 찾았던 세대니까요.

-어제는 몇시에 주무셨나요? 조간신문을 읽고 자리에 들 만큼 야행성이라, 민음사에 입사할 당시 박맹호 사장님에게 내건 유일한 조건이 자유로운 출근 시간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어제는 새벽 서너시쯤이었나? 하루의 반밖에 사회생활을 못하니까 대인 관계도 좁아지고 수입과 생산도 절반이 되어 손해가 많아요. 사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말도 안 되는, 게다가 시장성과 현장성이 강한 디자인 분야에서는 더욱 말이 안 되는 삶의 방식이죠. 알면서도 내가 관리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고, 놓치기 싫은 끈이 있다보니 뭔가 읽고 찾으며 밤을 새우게 돼요.

-선생님이 보시는 밤 시간의 고유한 매력이 있겠네요.
=밤에 사람이 혼자 있으면 오만해질 수가 있어요. 일상에서 계속 마모된 호기심을 끄집어낼 수 있죠. 호기심이 끝나면 인생이 끝나는 거라고 늘 생각해요. 남녀간의 호기심이 끝나면 청춘이 끝났다고들 하잖아요? 내가 요즘 생각하는 밤 시간이 따로 있어요. 열심히 일을 해치우고 1년의 한두달을 완전히 일에서 떠나는 은유적 밤 시간으로 만드는 거예요. 한 사회가 잘 돌아가려면 오늘이 전부가 아닌 꿈을 꿀 수 있는 시간과 용기를 가져야 할 것 같아요. 밤샘 버릇은 나의 대책없이 오만한 여유 부리기죠. (새 담배에 불을 붙이며 문득) 담배적인 세계가 있는 것 같아요. 글의 세계와 비슷한 세계….

-선친께서 직업군인이어서 할머니 댁에서 성장하다가 책과 가까워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대다수 어린이들에게 책은 각별한 친구지만 어른이 되면서 멀어지곤 합니다. 책과 떨어져 지낸 시기가 한번이라도 있었습니까?
=불행히도, 없었습니다. 책을 증오해 보려고 내 자신을 애써 꾄 적도 많아요. 책만 봐야 하고 책만 만들어야 하다니 답답하잖아요? 가장 괴로운 건 책을 그냥 보는 게 아니라 이놈의 약점을 생각해야 한다는 점이었어요. 그래야 내가 존재 이유가 있으니까. 대안을 생각하지 않으면 내가 지적하는 약점을 사람들이 안 믿어주니까. 그러나 반대로 그렇게 가까운 사이라서 책의 진정한 고마움을 모르기도 했던 것 같아요. 대장간에 식칼이 없듯이. 20대 문학청년 시절 이후 그렇게 지내다가 모든 것을 다 뿌리치고, 그저 책과 독자로서 다시 만나기 시작한 것이 1994년이에요. 예전에는 잘 못 만들었다 싶은 책은 읽기도 만지기도 싫었는데 달라졌죠. 민주적으로 바뀌었다고 할까. (웃음)

-그렇게 사랑하는 책인데 훔친 적은 없으십니까?
=나도 모르게 빌린 책을 잊고 돌려주지 않았다가, 뒤늦게 깜짝 놀라 주인이 오히려 낯설어하지 않을까 싶어 못 준 책은 있어요. 반면 훔침을 당한 일은 굉장히 많아서 장서의 1/3은 그렇게 없어졌어요. 몇년이 흐른 뒤 어떤 페이지가 필요해 뒤적이다보면 파본인가 싶을 만큼 요령껏 책장을 오려간 일도 있어요. 책 자체만 생각하면 초탈해야죠. 책이 없어지면 어떻고 어디 가 있으면 어떻겠냐고.

-애서가들은 서가가 넘쳐서 책을 어쩔 수 없이 처분해야 하는 위기상황에 대한 나름의 해결책이 있지 않습니까?
=누군가에게 주죠. 도서관에는 기증 안 합니다. 나는 도서관을 싫어해요. 문헌정보학과도 별로 안 좋아하죠. (웃음) 물론 도서관의 존재 이유는 긍정하지만, 도서관이란 책의 존재감이나 물질성은 보지 않고 내용에 실려 있는 기호만 보관하는 곳이거든요. 새 책이 오면 겉표지를 벗겨 신간 안내판에 압핀으로 꽂아놓지 않습니까? 합법적으로 책을 학대하는 곳이니 만드는 사람 입장에서 도서관은 적이죠.

-소문난 야구광이십니다. 스포츠 중에서도 야구에 특히 끌리는 이유를 기질과 연관해 생각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저도 한때 야구를 무척 좋아했는데 돌아보면 틈틈이 갈등하고 생각할 여백이 있는 점이 좋았던 것 같아요.
=바로 그거예요. 축구나 다른 경기를 보려면 그 경기와 내가 빨리 합치하고 동체가 돼야 해요. 스포츠뿐 아니라 연극도, 영화도, 콘서트도 사람을 끌어당겨 정신을 잃게 만들죠. 그런데 야구는 그걸 거부해요. 가까이 가려면 “넌 거기 계속 떨어져 있어. 지금 넌 생각을 할 때야”라고 밀쳐내요. 그래서 내가 나의 주인으로 머물 수 있죠. 세계는 야구를 하는 나라와 하지 않는 나라로 나뉘어요. 축구는 월드컵이 가능하지만 야구의 월드컵은, 지난번 WBC를 치르긴 했지만 힘들 거라고 봐요.

디자이너는 이제 새로운 저자로 떠오르고 있어요

-출판 디자이너, 책 디자이너, 북 디자이너 중에 어떤 호칭이 좋다고 보세요?
=출판 디자이너, 즉 퍼블리케이션 디자이너가 맞죠. 교과서적으로 말하면 출판 디자인 범주 아래 책, 잡지, 신문, 작은 인쇄물(small printed matters)이 하위 장르로 있고 요즘 다섯 번째로 웹 디자인이 추가되는 거예요. 나는 한 디자이너가 책, 잡지, 신문을 모두 만들 수 있고 또 우리 사회가 그런 주문을 하는 사회가 되길 바랍니다.

-선생님은 손으로 책장을 넘기고 문자를 접하는 책의 물성(物性)을 강조하시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거꾸로 뉴미디어 시대가 도래해 책 이외 수단으로 텍스트를 볼 수 있게 되면서 비로소 책의 본성이 드러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저와 동료들도 지금 종이 잡지는 왜 필요하고,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창간 초에는 하지 않았던 자문을 자주 합니다.
=문제가 있다는 것은 벌써 대답이 많이 가시화된 단계라는 의미겠죠. 대립하는 항으로 정지된 것과 움직이는 것, 흑백과 컬러, 아날로그와 디지털, 종이 위의 정보와 모니터적 정보를 말할 수 있겠죠.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관계는, 영화가 등장했을 때 사진이 받은 충격에 비할 수 있을 겁니다. 처음엔 사경에 몰렸다가 얼마 뒤 움직이는 영상이 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사진이 깨달았듯이 디지털의 결점을 발견해 전략화, 가치화하는 새로운 아날로그가 탄생한 거죠. 생사를 가르고 신을 만들어내던 책이 독점 분야를 디지털에 내주고 반성을 한 거죠. 사전 같은 정보는 이제 디지털에 줘야 하고 책만이 할 수 있는 일을 발견해야 해요. 새로운 아날로그란 쉽게 말해 손의 부활이에요. 계속 정보와 손의 거리가 멀어지는 방향으로 발전한 문명사의 변화입니다. 다른 매체는 에너지만 연결시키면 절로 정보가 나오지만 책은 인간의 손으로 열지 않으면 안 돼요. 결코 신속하고 편리하지 않죠. 얼마나 오만한 매체인지 몰라요. 잠시라도 인간이 주의를 돌리면 삐쳐서 제자리로 돌아가버리죠. 중간을 빼먹어도 줄거리가 이해되는 TV 연속극과 달라요. 새로운 책은, 책이 촉각의 매체이기도 하다는 점을 깨달은 책이에요. 여태 나는 시각매체입네 주장해온 책이 절에 가서 반성하고 내려온 셈이죠.

-유성영화가 등장했을 때 비로소 영화에서 침묵이 인식됐다는 사실을 생각나게 하네요.
=그렇죠. 21세기 디자인의 큰 변화는 두 가지예요. 첫째, 세계 유수 디자이너의 움직임에서 보듯, 디자인의 주요 흐름은 놀랍게도 책- 신문과 잡지를 포함한- 의 세계로 모이고 있어요. 둘째는 타이포그래피 시대의 개막이에요. 인문학에서는 활자가 이미지를 억압했다는 논리를 갖고 있지만, 디자인 세계 안에서는 반대로 이미지가 활자를 폭력적으로 억압해왔거든요. 역사상 지금처럼 활자가 기고만장한 시절이 없었죠. 지금까지 활자는 우편배달부처럼 내용을 전달하는 것이 주임무였는데 디지털 혁명에 의해 스스로 내용에서 빠진 것을 표현하는 주체적 기능을 갖기 시작한 것이죠. 디자이너는 이제 새로운 저자로 떠오르고 있어요.

-한글은 디자인적으로 그리 평판이 좋은 문자는 아닌 걸로 압니다. 한글이 가진 디자인적 가능성에 대해서 좌절하신 적은 없습니까?
=물론 한글의 제약된 표현 가능성에 힘들기도 했죠. 그러나 한국 디자인이 서체를 만들어온 세월은 서양에 비해 아주 짧은 30년에 불과해요. 상대적으로 빠르게 발전했죠. 그리고 혁명이란 구체제를 청산하고 출발점을 동일하게 만들어버리는 게 특징 아닙니까? 디지털 혁명은 활자에 대한 우리의 생각, 가치를 서양과 비슷한 선에서 출발할 수 있도록 하는 바탕입니다.

-선생님이 만드신 책으로부터 명조체와 고딕체라는 대단히 전통적인 서체의 아름다움을 깊이 생각하고 자주 쓰시는 디자이너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한글 활자의 종류와 미가 서양에 비해 부족하다는 한탄만 해선 소용이 없으니까요. 누가 대신해줄 것도 아니고. 그래서 기존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 아끼고 잘 쓰도록 노력하는 것이 디자이너의 의무예요. 디자인은 흔히 말하는 예술이 아니어서 비용, 시간, 원고의 주어진 한계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일이거든요. 거꾸로 말해 모자란 녀석이라도 아끼고 사랑하자는 뜻에서 (명조체, 고딕체에) 어찌보면 과도하게 철저했고 후배들에게 비판을 듣기도 했지요.

상업적 욕망으로 책을 만든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죠

-출판 디자이너가 전시회를 가질 기회는 매우 드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서점의 신간 코너가 책 디자이너에겐 전시 공간이겠구나 싶었습니다. 서점에 가면 어떻게 움직이십니까?
=서점이 전시장이니 얼마나 행복합니까? 하지만 막상 서점에 가면 내가 만든 책이 있을 법한 코너는 피해요. 저렇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싶은 책은 몽땅 사들여 없애고 싶은 생각이 치밀어 서점 가기가 무섭죠. 요즘 후배들 디자인은 아주 훌륭해서, 5∼10명은 국제적으로도 일급이라고 평가해요.

-작고한 스탠리 큐브릭 감독은 한국어를 모르면서도 라디오 영화 광고에 쓸 한국 성우들의 음성까지 직접 듣고 선택하더군요. 저자 중에도 그런 분이 있겠죠? 저자와의 긴장관계는 편집 디자이너에게 고충이라기보다 작업의 일부일 텐데, 어떤 식의 줄다리기를 벌일 때 가장 즐거우신가요?
=그야 내가 이겼을 때죠. (웃음) 사진가 강운구 선생과 취재 단계부터 함께 작업한 <경주남산>(열화당 펴냄)이 기억에 남아요. 서로 고집을 피우다 두어달 사이가 틀어졌죠. 알고 보니 남산을 어디로 들어가 뭘 보고 어디로 나가야 가장 잘 보는 것인가에 관한 견해부터 여러 이견이 있었어요. 내 생각에 사진집에서 중요한 건 반드시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는 점이에요. 주인공은 없어도 이미지들끼리 맺는 관계가 이야기를 이뤄야 하죠. 그런데 강운구 선생은 일단 납득한 뒤에는 꼭 필요한 사진을 슬쩍 추가로 찍어다주기까지 했어요.

-올해 북 디자인전을 연 영월의 책 박물관을 오랫동안 돕고 계십니다. 또, 베네딕도 미디어에서 임세바스찬 신부님이 내신 타르코프스키, 베리만 등 예술영화 비디오의 재킷도 실비로 디자인해주셨다고 기사를 읽었습니다.
=아, 신부님 보고 싶네. 그분이 설립한 분도출판사를 통해 신부님을 처음 알게 됐는데 페데리코 펠리니의 <길>이 한국에 수입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신부님이랑 둘이서 어찌나 흥분했던지! 엄청 많이 팔릴 줄 알았는데, 웬걸? (웃음) 실비라도 받은 건 그분이 무료로 일을 청탁하길 싫어하셔서였어요. 책 박물관은 개관 이듬해부터 7년 동안인가 카탈로그, 초대장 등을 만들었어요. 우리 스스로 그렇게 하는 부분이 없으면 안 되는 것이 한국 문화 현실이기도 합니다.

-선생님 작품 중에 이윤기 선생님이 쓰고 정재규 화백이 그린 에세이집 <어른의 학교>나 <글 그림 박고석> 같은 책들은 종이의 촉감이 따뜻하고 삽화에 내준 공간이 넉넉해서 느낌이 특별했습니다.
=그런 디자인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내가 돈을 안 받았기 때문이에요. 출판사도 미안하니까 내가 자유롭게 재료를 쓸 수 있게 해준 거죠. 1996년 낸 작품집에 실은 책 중 1/3은 무료로 작업했어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정말 좋은 원고와 인연을 맺을 수 없고, 안 팔릴 책인 것을 뻔히 아는 내가 돈까지 내라고 못한 것이죠.

-수많은 책을 디자인하셨습니다. 디자이너의 브랜드를 인지하지 못하는 독자들은 몰라도 본인만이 아는 모험의 순간이랄까 대담한 파격의 예가 있었을 것 같은데요.
=박완서 선생의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의 표지는 큰 글씨와 원색을 선호하던 당시로서는 단색에 작은 글씨로 잔잔하게 간 파격이었어요. 나는 소설의 내용을 알고 박완서 선생과 그분이 그 소설을 쓴 이유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디자인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영업팀에서 사전조사 결과가 나쁘다고 문제를 제기했어요. 책에 대한 사전조사는 책을 망치는 일이에요. 조사란 조사자의 생각대로 답이 나오게 돼 있거든. 큰 제목, 작은 제목 놓고 뭐가 더 눈에 잘 띄냐고 물을 필요가 없잖아요? 이런 경우 진심으로 연애편지를 썼는데 상대가 읽지도 않을 경우와 비슷한 고통을 느껴요. 결국 사장이 책임지고 나서서 내 안대로 표지를 만들었고 베스트셀러가 됐죠.

-저처럼 평범한 독자들은, 이동할 때나 여행갈 때 손에 친근하게 감기는 페이퍼백과 문고판이 더 많았으면 싶을 때가 있습니다. 양장본이 너무 비싸기도 하고 두껍고 날선 종이에 다치는 일도 잦고요.
=책은 양장본이 기본입니다. 미국의 경우 양장본이 어느 정도 팔리면 페이퍼바운드 반양장본이 나오죠. 한국은 단행본이 자리잡던 70년대 양장본 문화가 생겼어요. 그러다가- 반론하는 후배들도 있겠지만- 갑작스럽게 출판시장이 커진 거예요. 1980년대 초만 해도 5만부가 나가면 베스트셀러라고 모여서 술을 마셨는데 이제 100만부 단위잖아요? 내가 7, 8년 전만 해도 한국의 책값이 너무 낮다고 주장한 장본인인데 지금 한국 책값은 세계에서도 비싼 쪽이에요. 그래서 디지털 미디어와 경쟁하는 지금 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책을 너무 쉽게, 상업적 욕망에 기울어 만든다는 점이에요. 지금 인문학 단행본이 2만원대로 올라서서 일본과 맞먹는데 종이를 비롯해 일본은 제작에 우리의 서너배를 투자해요. 양장본 비율이 높아서 문제가 아니라 제대로 안 만드는 게 문제인 거죠. 우리 책은 가장 대중적 매체인 신문도 꺼리는 뒷장이 비치는 종이를 쓰기도 하고, 실로 꿰매는 것이 원칙인 양장본을 90% 이상 그냥 풀로 제본해서 펼치거나 시간이 흘렀을 때 갈라지는 지경이에요. 자동차에 바퀴를 세개만 다는 형국이죠. 편집자들이 이런 기본을 지키고 때로는 싸워야 합니다.

전문가보다는 내 이름으로 어떤 다양함을 떠올려지길 바라요

-혹시 영화를 볼 때 자막의 위치, 서체, 크기가 거슬리지는 않으십니까?
=처음에는 매우 거슬렸는데 이제는 포기했어요. 아무래도 오른쪽 세로쓰기보다 아래쪽 가로쓰기 자막이 바람직하죠. 나는 영화란 음악회와 달리 확 충동이 일 때 보러 가는 재미가 크다고 봐서 예매를 안 해요. 언젠가 그렇게 암표를 사서 직원들과 <플래툰>을 봤는데 들어가 보니 앞줄이라 누구는 왼쪽 영상만 보고 나는 오른쪽 자막만 보다 온 적이 있어요.

-<한겨레> <조선일보> <문화일보> 등 일간지들이 종이를 바꾼다거나 지면을 혁신할 때 선생님의 자문을 자주 구한 것으로 압니다. 어떤 문제를 보셨습니까?
=기자들 만나면 현재 신문이 매체의 중심이라고 생각하진 않을 터인데 왜 그리 아직 오만하냐고 묻곤 해요. 뉴스를 가장 먼저 접한다고 정보가 제일 많고 해석력이 제일 뛰어난 건 아니잖아요? 예컨대 <씨네21> 기자가 먼저 영화 본다고 영화를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면 안 되죠? 우리 신문은 뉴스를 독점하던 시대의 의식을 그대로 갖고 아직 남의 말을 안 듣고 자신이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정말 대단하다고 해도 모두에게 대단할 수는 없으니 모르는 부분을 인정해야 하는데 말로는 디자인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토론도 해놓고 결국은 엉뚱한 결정을 내려요. 서양의학에 몸을 못 맡기던 옛 양반 규수처럼 병들었는데도 의사를 못 믿고 약방에서 약이나 사다 먹는 식이죠.

-“내 오십대의 시작은 마치 과음하고 냉방에 잠이 들어 겨우 술이 깬 비몽사몽의 아침 같았다”고 어느 에세이에서 쓰셨습니다. 그간의 삶이 술자리와 같았다는 뜻일까요?
=술 먹고 취해서 잘 때는 모르는데 새벽에 눈 떠 술이 깨면 춥잖아요? (웃음) 마흔은 언제 넘었는지 바삐 넘어갔는데 쉰은 달랐어요. 그해 설을 도쿄에서 맞았는데 방을 같이 쓴 강운구 사진가가 “오십된 기분이 어때?”라고 묻는 말이 비수처럼 꽂혔어요.

-책을 만드는 일을 했기 때문에 거꾸로 내가 이런 사람이 됐구나 싶은 부분이 있습니까?
=책을 만들되 누군가의 손을 통해 만드는 출판사 사장, 편집자, 기자는 많은 사람을 만나는 반면, 책을 직접 ‘만드는’ 나는 생활 영역이 계속 좁아지는 느낌이 있어요. 둘째로, 책에 대한 애증을 반복하다 보니 진짜 책 맛을 알게 됐어요. 그래서 언론이나 교수들이 피상적으로 책이 중요하다, 읽어야 한다, 책의 시대가 가고 정보의 시대가 온다 무책임하게 말하는 것을 보면 통탄스러워요. 책의 중요성은, 심지어 피상적으로 강조해서도 안 돼요. 한국에서 무엇보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은, 책을 맹목적으로 읽어야 할 대상으로 인식시키는 행위예요. 차라리 중학교 갈 때까지 책읽기를 강요하지 않는 법이 생겼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애들이 어른 몰래 책을 보고 “책을 맘껏 볼 열다섯 살을 기다리며 사노라”고 일기장에 쓰는 세상이면 얼마나 좋을까요.

-본인을 한권의 책에 비한다면 어떤 책에 가까울까요?
=단행본이 아니라 책이면서 잡지인 무크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한 주제로 시작하고 끝나는 책이 아니라, 상대를 억지로 잡아두는 책이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전문가로 알려지기보다 내 이름이 어떤 종류의 다양함을 떠올리게 하길 바라요.

-그 책의 새로운 장을 쓸 계획이 있으십니까? 말씀 중에 언뜻 집필과 포스터 전시회에 대한 뜻을 비치셨는데요.
=남들이 디자이너라고 생각하는 내가 책을 쓰는 것도 딴 짓이고, 북 디자이너로 불리는 내가 포스터 디자인하는 것도 딴 짓이겠죠? 그런 것이 없다면 난 아마 은퇴한 것일 테죠. 50대에 내가 행한 가장 중요한 일이 한겨레 문화센터 강의였어요. 가르치고 새벽까지 학생들과 술 마시며 토론하는 일을 재개하는 것도 장차 꿈이에요. 사람들은 술자리를 삶의 쉬어가는 자리 또는 어쩔 수 없이 닥치는 행사로 여기는데, 술자리는 술자리 나름대로 독립된 기능과 따로 할 일이 있더라고요. 그것이 빠지니 도무지 나사가 안 맞아요. (애주가인 그는 건강이 나빠져 술을 잠시 끊었다.) 또 하나, 디자이너가 조로(早老)하는 우리 사회의 경향에 거스르고 싶어요. 디자인은 감성의 일로 치부하며 합리성과 거리를 두는 이상한 나라가 됐는데, 디자인이야말로 삶과 체험에서 나와야 하거든. 오십 되던 해 전시회를 한 것도 쉰이라는 나이와 디자인을 아무 관련없다고 생각하는 사회에 도전하고픈 마음에서였어요. 배우, 스탭과 더불어 나이 들어가는 감독이 있어야 하듯, 책의 세상에서는 저자와 같이 나이 들어가는 디자이너가 있어야 해요. 나도 열심히 하면 그런 저자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힘도 들지만 이젠 내가 버틸 때까지 버틴다는 걸 사람들이 다 알았으니, 좀 덜 힘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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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하는 중소서점 날개는 없나


급격한 시장 변화 속에서 생존 위기에 몰린 중소서점들이 아우성치고 있다. 최근 들어 서점들의 폐업이 점점 가속화되는 가운데 서적 유통구조가 점점 더 혼탁해지면서 서점들의 절박감은 더욱 커지고 있다.

지난달 28일 한국출판연구소와 한국서점조합연합회가 공동 주최한 출판포럼 ‘고사 위기의 서점 어떻게 살릴 것인가’(사진)는 출판사와 유통업체들에 대한 서점들의 분노와 함께 자력 갱생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는 서점업계의 고민을 재확인하는 자리였다. 최근 서점업계가 봉착한 위기 상황과 이날 거론된 대안을 살펴본다.

인터넷서점 가격파괴
할인점 유통장악으로
5년새 절반 문닫아
세제혜택등 정부지원
서점 '공동사업' 절실

 

■ 중소서점 폐업 가속=한국서점조합연합회(서련)가 최근 조사한 결과 지난 5년 사이 국내 서점의 절반이 문을 닫았다. 1994년 5683개로 최고점을 찍었던 서점수는 2002년 2328개로 줄었고, 올해 현재는 2000개에도 못미칠 것으로 추산된다.

전국 3519개 읍면동 2곳당 서점이 하나꼴인 수준이다. 특히 폐업 서점의 90% 이상이 전체 서점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50평 미만의 중소서점들인 것으로 추정된다. 서울 시내 서점 역시 올 1~4월 넉달 동안 42곳이 문을 닫아 한달 10곳꼴로 서점이 사라지고 있다. (그래프 참조)

■ 원인은 환경변화=서점들의 위기는 인터넷서점들의 할인 경쟁과 할인점이란 새로운 책 유통경로의 등장 때문이다. 요즘 출판유통은 과당 할인경쟁에 고가 경품까지 가세해 일부 신문들의 경품 공세를 뺨치고 있다. 자금력이 약한 서점들로서는 1년 이상 지난 도서의 경우 40~50%까지 할인하며 마일리지까지 제공해대는 인터넷서점들에 맞설 경쟁력을 잃은 지 오래다.

여기에 베스트셀러와 어린이책을 할인판매하는 할인점 매장의 판매량이 급증하면서 서점들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이런 와중에 대형도매업체인 북센(옛 한국출판유통)이 직접 이마트에 책을 공급하기로 결정하자 서련을 비롯한 주요 서점단체들이 북센과의 거래중단과 집단 반품 등의 공동 대응을 모색하며 반발하고 있는 상황이다.


■ 시장의 원칙부터 세워야=출판전문가들은 현재 유통상황에서는 서점들이 직접 문제를 개선할 수 있는 여지가 거의 없기 때문에 일단 서점과 출판사, 도매상 등 유통업체들이 작은 부분부터 서로 합의해 시장의 기본 ‘룰’을 만들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한국출판연구소 백원근 차장은 “현재 서점의 위기는 지역지식센터로서의 위상을 갖추기는커녕 제품인 책에 대한 전문성이 부족한 서점들 자신들의 문제부터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고 전제하면서 “출판생태계 전체 차원에서 각 주체들끼리의 유통 및 판매에 관한 원칙을 만드는 협의부터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 대안은 없나=지식과 문화를 사회에 공급하는 ‘세포’인 서점의 특성을 감안해 정부 차원의 서점 부양 정책이 필요하다고 서점업계는 주장한다. 그 구체적인 방안으로 우선 서점들의 임대료 부담을 줄이기 위해 서점이 입주하는 건물 소유주에게 임대소득세를 줄이는 세제 혜택을 방안으로 내놓고 있다. 또한 서점의 마진을 갉아먹는 신용카드 수수료율의 인하와 함께 서점 경영자에 대한 소득세 기준요율을 낮춰 서점을 운영하고자 하는 동기를 부여해야 한다는 의견도 함께 제시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마케팅 능력과 자금력이 처지는 서점들이 공동사업을 펼치는 외국의 사례들을 참고해볼 만하다고 조언한다. 한국출판연구소 윤청광 이사장은 이날 포럼에서 중소서점들이 공동 마케팅을 펼치는 미국서점조합의 ‘북 센스’ 사업이나, 경영자료를 공유해 사업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는 일본의 ‘네트21’ 같은 사업모델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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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의 지킬과 하이드

낮과 밤의 모습이 달라지는 편집자들, 이거 직업병일까

▣ 임은실 김영사 편집부 실장

얼마 전 우리 회사의 한 남자 직원이 여장을 하고 아침 회의에 참석한 적이 있다. 미니스커트를 입고 길게 곱슬거리는 갈색 가발을 쓰고 나타난 것이다. 회의장은 잠시 비명과 웃음의 아수라장이 되었다.


당시 그의 정체는 ‘웃음도깨비’. 회사 동료들을 어떤 방법으로든 즐겁고 재미있게 하여 웃음을 전염시키는 것이 김영사 웃음도깨비의 미션이다.

웃음도깨비는 일주일에 한 번씩 바뀐다. 웃음 경영이 매스컴의 화두로 떠오르던 올 초에 한 직원이 웃기는 회사 생활을 만들기 위한 여러 아이디어를 제안했고 그중에 하나 채택된 것이 바로 ‘웃음도깨비’였다.

그 남자 직원의 온몸을 던진 임무 수행으로 잠시 회사는 뒤집어졌지만, 오후 시간이 되면서 여자들을 중심으로 심상치 않은 후유 증세가 발견되었다. 그건 바로 점심을 먹으면서 한 남자 직원이 무심코 던진, “우리 회사 어느 여자보다 훨씬 이쁘더라”는 말 때문이었다. 무심코 던진 돌에도 개구리는 죽는 법이다. 오후 내 틈틈이 거울을 들여다보며 자기반성과 검열을 거듭하던 한 여직원이 반성을 쓰레기통에 던지더니 분연히 반격에 나선다. “그 선배 혹시 진짜 여자가 되고 싶었던 거 아냐?”

사실 그 남자 직원은 망가지려야 망가질 수 없는 태생적 한계를 가지고 있다. 여자의 미모를 넘보는 얼굴과 미끈한 다리, 그게 화근이었다. 그가 안팎이 남자인지, 사실 내면은 여자인지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출판가에는 낮과 밤의 자아가 분리되는 사람이 꽤 많다.


△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우리 회사의 한 여인은 하루 종일 맨얼굴로 일하다가 퇴근시간만 되면 팔색조로 변신한다. 표정 또한 근검절약에서 생글 과소비 모드로 바뀐다.

“이거 너무하네. 그 웃음, 그 미모, 왜 우리한테는 안 줘?”

회사 동료들이 황당한 표정으로 물으면 그 여인은 이렇게 말하며 사라진다.

“집에서 화장하는 사람 봤어요?”

그녀에게 회사는 집의 연장이다. 진정한 외출은 퇴근과 함께 이루어진다. 퇴근 뒤 그녀의 삶은 미스터리. 다만 이단 혹은 삼단 변신 로봇처럼 달라져서 나갔으니, 밖에서는 다른 삶을 살지 않겠느냐는 추측뿐.

내가 아는 출판가의 한 후배는 퇴근 뒤 활동 무대가 주로 홍익대 앞의 클럽들이다. 클럽을 순회하며 그녀는 맘보와 살사, 부기, 차차차, 디스코 등을 춘다. 문화 강좌를 통해 갖가지 춤을 배우기도 한 그녀는 이렇게 주장한다. 춤은 자기에게 육체노동과 같은 거라고. 하루 종일 문자와 씨름하며 과도한 정신노동을 했으므로 밤에는 육체노동이 필요하다고. 그러므로 그녀는 정신과 육체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지킬과 하이드가 되는 것이다.

어느 편집자는 밤마다 공격적인 독자로 변신한다. 즉, 낮에는 책의 공급자로서 소비자들로부터 책을 잘 만들었느니 제목이 별로니 하는 평가를 주로 받다 보니 그에 대한 역할 전환 욕구가 생긴 것이다. 어느 인터넷 서점의 유명한 논객이기도 한 그는 밤마다 냉혹한 독자가 되어 남이 만든 책을 품평하는 것으로 소일한다.

이렇듯 출판사에는 많은 지킬과 하이드들이 산다. 그런데 어딜 가도 편집자 자아를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이들은 어딜 가도 티가 나기 마련이다. ‘싼이자로 대출해드립니다.’ 길거리에서 어느 아주머니가 나눠준 명함 크기의 광고물을 들여다보며 ‘싼’과 ‘이자’ 사이에 무심코 띄어쓰기 표시를 하는 여자, “초판 안주 다 나갔나? 그럼 재판 깔자!” 하고 혀 꼬부라진 소리로 말하는 남자. 그가 술잔을 부딪치며 하는 구호는 “삼판을 위하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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