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홀로 출판사’가 뛰고 있다.
연 수억원대의 매출을 올리던 중견 출판사들마저 불황과 도매상 연쇄부도 여파로 속속 폐업의 길을 걷고 있는 가운데, 책의 기획 편집부터 영업까지 모든 것을 한 사람이 도맡는 이 초소형 출판사들의 존재는 이채롭기까지 하다.
지난 8월, ‘퇴직시대, 120% 권리찾기’라는 실용서를 내며 출판시장에 뛰어든 도서출판 ‘참솔’은 김혜숙씨(39)의 1인 출판사. 10년 넘게 출판 편집부문에서 일했던 그는, 4년간 현업에서 쉬다 올봄 복귀하면서 자기 회사를 등록했다. 첫 작품 ‘퇴직시대…’는 출간 한달만에 초판을 다 소화해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최근 후속작 ‘쉽고 안전하게 돈 빌리는 법 45가지’을 낸 데 이어 샐러리맨 부업에 관한 책 등을 준비중이다. 출판사를 차리기 전 시장조사를 한 결과 독자층은 확실한 반면 경쟁은 덜 치열해 적은 자본으로도 덤벼볼 수 있는 실용서로 방향을 잡았고, 자리가 잡히면 인문학과 예술서로 선회해볼 생각이다.
김씨가 편집자 출신이라면, ‘사랑의 학교’의 이상복씨(49)는 영업부문에서 9년간 잔뼈가 굵은 경우. 범우사 영업부장을 끝으로 퇴직한 뒤 95년 출판사를 차린 그는 이원복교수의 ‘사랑의 학교’(전 2권)와 ‘펜 끝으로 여는 세상’ 등 11종을 냈다. 영업통답게 한달에 한번 정도 지방 서점들을 돌며 출판흐름을 파악하고, 영업자들과 대화를 나누며 기획 아이디어를 얻곤 한다. 아동과 청소년 부문에 주력해 ‘지식보다 감동을 전달하는’ 책들을 펴내는 게 그의 목표다.
6년간 출판사 편집자와 주간신문, 잡지 기자로 편력한 황기직씨(39)는 92년 ‘새벽소리’라는 이름으로 출판등록하고 2년 뒤인 94년 ‘윤복이의 일기’를 펴내며 본격적으로 1인출판에 뛰어들었다. 지금까지 ‘장다리 1학년 땅꼬마 2학년’ ‘머리 둘 달린 봉황새’ 등 아동서 4권을 포함해 9권을 냈다.
이들 1인 출판사의 대표는 한마디로 사환이자 사장이다. 기획과 편집 교열은 물론, 입출금, 우체국 발송, 판매, 광고, 복사까지 다 자기 몫이다. 말이 좋아 ‘나홀로 출판’이지, ‘악전고투’요 ‘가시밭길’이기 십상이다. 회사 상사였던 선배출판인(문예출판사 전병석사장)이 사무실 일부와 집기, 전화 등을 사용하도록 배려하고 유통과 판로까지 거들어준 김혜숙씨의 경우는 ‘행복한 예외’에 속한다. 이상복씨는 개인적인 인연으로 첫 작품을 지명도 있는 필자인 이원복교수의 책으로 낼 수 있었고, 판매 일선에서의 오랜 현장경험과 인맥이 보탬이 된 경우다.
“책 한권을 내는데 500만~1000만원 가량이 드는데, 다른 분야에 견주어 투자액은 적은 반면 판매대금 회수가 느리다. 적어도 5, 6종을 낼 때까지 계속 투자해야 하고, 자금회전도 원활하지 못하다. 하지만 자본력 부족은 소규모 출판사 어느 곳이나 사정이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1인 출판사가 결정적으로 취약한 부분은 영업력쪽이라고 봐야 한다. 혼자서 거래할 수 있는 곳은 도매상 두어군데나 직거래 서점 10여곳 남짓. 이 정도로는 판매가 원활치 않아 더 팔릴 책도 잠재우기 일쑤다”고 김혜숙씨는 털어놓는다.
1인 출판사는 편집자 출신이 차린 경우 책의 질은 높은 편이지만 영업자 출신보다 판매력이 떨어져 문닫는 경우가 많다는 게 출판계의 속설이다. 반면 영업자 출신은 책의 완성도는 떨어져도 서점들과 연결이 잘 되고, 독자반응을 현장에서 접해본 감각 때문에 일단 창업에 성공할 확률이 높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의 명함에 ‘대표’ 대신 ‘기획실장’이란 직함을 단 황기직씨는, 배본대행과 영업대행사 등이 있기 때문에 기획 편집 중심의 1인 출판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본다. 다만 혼자 작업할 수 있는 양이 뻔하기 때문에 “책을 자주 못내 거래처와도 소원해지고, 독자들에게도 출판사의 이름을 각인시키기 어렵다”는 아쉬움을 호소한다.
대부분의 1인 출판사 사장들은 “5~10종 정도는 기획을 준비하고 시작한다”고 말한다. 그만큼 출판에 대한 나름의 구상이 있고, 애착도 크다. “혼자 해냈다는 성취감, 그렇게 만든 책을 독자가 사줄 때의 기쁨”(이상복), “내가 원하는 책을 만들고 싶다는 욕망”(황기직)이 고생길을 떠나지 못하게 하는 이유다. 지난 8월 ‘새움’이란 출판사를 등록해 10월말 첫 책 ‘백두산 호랑이’를 펴낼 예정인 이대식씨(34)는 “출판계에서는 나름대로 가치있는 내용인데도 상업성이 작다는 이유로 사장되는 원고들이 적지 않다. 그 원고들에 책으로 나올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는 게 1인 출판”이라고 ‘개업’의 이유를 밝힌다.
1인 출판사는 경영경험이 없고 소자본인 경우 출판사 창업의 한 방법이 될 수는 있지만 장기적으로 지속되긴 어려운 ‘과도기적 형태’다. 하지만 발빠른 기획, 혹은 돈 벌 욕심 없이 남의 간섭이나 직원 급료 줄 부담에서 벗어나 오로지 내가 만들고 싶은 책만 내겠다면 나름대로 장점도 적지 않다.
최근 ‘성호사설 정선’ 전 3권을 직접 편역주해해 펴내 화제가 된 ‘현대실학사’의 정해렴씨(59)는 그런 점에서 1인 출판사의 귀감으로 꼽힌다. 35년의 경력을 가진 편집전문가에 창작과비평사 사장까지 역임한 그는 91년 첫 책 ‘한용운 산문선집’을 비롯해, 다산 정약용과 홍기문 안자산의 선집 등 주로 실학과 그 맥을 잇는 국학 분야의 책 20여권을 펴냈다. 관심분야이기도 하고, 지금 정리해 놓지 않으면 소중한 한문고전 유산이 한글세대에 이어지지 못한 채 단절될 것이라는 걱정 때문이다.
“내가 내는 책들은 영업해서 인세를 뽑기 힘든 책들이다. 이익은커녕 수지균형조차 맞추기 어렵다. 상업성이 없으니 다른 출판사에서는 손대지 않고, 그래서 직접 만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분야를 정리해 놓아야 우리 학문방향이 제대로 잡힌다고 나는 생각한다. 출판사 이름도 현대 학문이 실학정신이 있어야 제대로 된다는 뜻에서 지었다. 다행히 오랜 훈련덕택에 원고부터 제작까지 혼자 다 처리할 수 있기도 하고, 그것이 출판의 본령이라고도 생각한다”
김 영 신 기 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