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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털 - 노순택 사진 에세이
노순택 글.사진 / 씨네21북스 / 2013년 5월
평점 :
배후와 배후설은 다르다. 배후는 어떤 존재의 유무나 상태에 관한 실체적 언술인데 반해, 배후설은 어떤 존재가 있을 거라는 믿음과 의심의 교차적 망상을 수반한 '안개의 언술'이다. 배후설은 '핑계 없는 무덤 없다'는 변명의 속담을 '배후 없는 행동 없다'는 신념의 수사망으로 전환시킨다. 그것은 누군가의 전유물은 아니지만, 권력을 기반으로 제기될 때 괴력을 발휘한다.(40)
깨닫건대, 분단이 역사의 시공간이어야 한다는 당위는, 분단이 영업의 시공간이라는 현실 앞에서 초라해진다. 분단은 영업장소를 제공한다. 록히드마틴에게는 군산복합체 차원의, 통일전망대에게는 구멍가게 차원의.(60)
교복을 입은 아이가, 아스팔트에, 오토바이가 쌩하고 달리는 아스팔트 위에 서 있다. 얼굴이 없다. 체크무늬 교복을 입은 얼굴 없는 아이가 하얀 장갑을 끼고서, 체크무뉘 교복을 입은 두 아이의 얼굴을 들고 있다. 아이들 얼굴 위로는 검은 선이, 아스팔트 바닥 위로는 하얀 선이 내달린다. 얼굴 없는 아이는 대학생이라고 했다. 동생들 볼 낯이 없고, 이렇게라도 해야겠기에 교복을 입고 나왔다 했다. 아이들은 열네 살이었다. 살았더라면 자신들의 얼굴을 든 언니와 같은 스물두 살.(미선과 효순은 2002년 6월 13일 오전 10시 45분,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56번 지방도로 수레너미길에서 변을 당했다)(101)
망각, '그날'에 대한 망각은 결국, 반복되는 폭력을 승인하겠다는 게으른 의지의 표명 외에 또 무엇일까.(114)
미국은 평화의 이름으로 점령지에 총알과 폭탄을 퍼붓지만, 희생자들은 고작 성조기를 태움으로 자신을 한탄한다.(157)
1991년 5월 7일 새벽 안양병원 영안실에서의 시신 절도사건.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박창수의 시신..(176)
엉뚱하게도 다시 김진숙을 떠올린다. 그의 고단한 삶을 '작품'으로 존중하지 않는 사회에서, 노동의 삶을 비참의 나락으로 떠미는 사회에서, 타인의 고통을 담은 사진과 영화가 '작품'으로 승격된다는 것,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아름다운 동시에 추하다.(200)
2011년 11월 26일 광화문 일대에서 벌어진 한미FTA 반대 집회 도중 갑자기 나타난 박건창 종로서장이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시위대 한복판으로 들어가고 있다.(208)
거싯은 늘상, 사실을 옆구리에 끼고 다닌다. 원본 없는 변형이 없듯, 사실 없는 거짓이란 농담일 뿐이다. 그러므로 참말처럼 들려야 한다는 과제야말로 거짓말이 짊어진 숙명적인 의무다. 사진의 치명적인 매력은, 마치 거짓의 매력과도 같다. 사지느이 본성으로 흔히 꼽는 기록성과 사실성은 역설적으로 사진의 거짓을 용이하게 한다.(210)
(해군 제주방어사령부 참모장 홍동진 대령과 강정마을 강동균 마을회장이 나눈 통화 내용) 타이핑하니 원고지 27.2매 분량이었다. "김정은 위해 열심히 일하는 강 회장을 존경한다"는 홍 대령의 주옥같은 말씀에 구역질이, "평범한 농민으로 살게 해달라"는 강 회장의 차분한 고백에 눈물이 났다. 이런 대화는 함께 들어야겠다. 대한민국 해군의 현실이 얼마나 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고통받게 하는지 알아야 하므로.(229)
타인의 삶에 눈곱만큼의 관심조차 없던 이들도, 타인의 죽음, 그 죽음의 장면에는 눈길을 보낸다. 죽음이란 얼마나 훔쳐보고 싶은 것이며, 살아 있는 모든 자의 애끓는 관심사인가. 저널리즘은 험악한 죽음의 현장 속에 우리를 몰아넣지 않으면서도, 그 죽음의 절정을 안전하게 엿볼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해주었다.(239)
정치는 과거와 손잡지만, 미래와 논다. 미래는, 힘에 기댄다. 정치는 말장난이다. 장난은 아니지만, 말로 논다. 가장 보수적인 정치집단이 '오늘만족적'이거나 '과거지향적'임을 표방하지 않고, 자신들의 이름에 '선진'과 '미래'를 즐겨 사용하는 것은 이러한 말장난의 전형이다.(2002년 국회의원 박근혜가 한나라당에서 탈당하여 만든 정당은 '한국미래연합'이었고, 2007년 이회창이 주도해 결성한 정당은 '자유선진당'이었다) 그들은 강박에 시달린다. 그것은 과거와 오늘을 숨기려는 은폐의 강박인 동시에, 그로써 미래를 포획하겠노라는 욕망의 강박이다.(251)
이창근 씨, 당신 거기 있었구나. 쌍용차 노동조합 대변인, 2009년 옥쇄파업 당시 구속노동자, 스물두 명의 동료들이 한 명 한 명, 한 줌 재가 될 때마다 눈물로 보도자료를 썼던 사람, 희망버스 기획단원. 주강이 아빠, 당신이 내 필름 속에 있는 줄 몰랐어. 가슴팍에 '쌍용'이라고 박아넣은 글씨를 보았어. 그때는 쌍용노동자, 지금은 해고노동자. 그때는 모르던 남자, 지금은 아는 남자.(256)
하지만 그뿐일까. 자본의 욕망사전에 만족이란 없다. 사병의 공병화와 동시에 진행되는 것은 공권력의 사병화다. 용역들이 방패와 곤봉으로 무장한 깡패가 되어 활개 칠 때, 공권력은 무엇을 하고 있었나. 경찰은 용역의 망을 봐주고 있었다. 대추리, 용산, 쌍용, SJM, 그리고 강정마을. 이곳의 용역과 경찰은, 그리고 군대는 유니폼과 소속이 다를 뿐, 월급 주는 자가 다를 뿐, 하는 일이 똑같다. 정신세계마저 공유한다. 강정마을에서 한 평화활동가가 (삼성물산의 레미콘을 경호하는) 공무를 집행하던 경찰간부에게 물었다. "소속과 이름을 밝혀주세요." 뭐라 답했을까. "니미뽕이다!" 시민 앞에서 스스로를 이렇게 낮추다니, 이 나라 경찰간부의 수준은 얼마나 겸손하신가. 풋! 옆에서 용역님이 웃으신다.(262)
"살아남아야 고발이고 나발이고 할 것 아니냐"는 우리 시대 기자님들의 볼멘소리는 나발만 불어대는 그들의 입 앞에서 초라하다. 해직기자들의 몸부림 앞에서 쪼그라든다.(2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