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헌의 고수기행
조용헌 지음, 양현모 사진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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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의 고수기행(조용헌, 랜덤하우스 중앙, 2006.3.28)

 

* 족보학 연구가 서수용

돌이켜 보면 근대 이전의 조선 후기는 경상도가 탄압을 받았던 셈이고 경상도 사람이 지역적 차별을 받고 소외를 당했던 역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22)

 

* 묵방산 산지기 이우원

예술품이란 무엇인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연의 대용품인 것 같다. 문명이란 무엇인가. 자연과 멀리 떨어져 사는 것이다. 도시도 마찬가지다. 자연과 유리된 삶이다 예술이란 자연을 접할 수 없는 문명과 도시의 산물이다.(40)

 

종로 2가 관철동에서 학사주점을 운영하기도 했다. 일명 ‘2층집이었다. (중략) 일포가 학사주점을 운영하면서 벽에 서 붙여놓은 구호가 있었다고 한다. ‘마셔도 취하지 말자. 취해도 흔들리지 말자. 흔들려도 외상 긋지 말자!’ 외상이 많았으니 장사가 잘 될 리 없었다.(49)

 

아미타불은 이 자비이고, 태양이 아닐까. 물론 나의 개인적인 해석이다. 그래서 아미타불이 서방에 계신다고 여겼던 것 같다. 서쪽을 향해 지은 아미타불 도량은 예불하는 사람으로하여금 석양을 볼 수 있게 해준다. 저녁노을이 주는 평화다.(57)

 

* 컴퓨터와 사주의 크로스오버 김상숙

 

* 전업 문필가 이덕일

인문 역사서를 기술하는 과정은 우리 역사상 가장 뛰어난 인물들과 대화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역사서에 나오는 인물은 당대에 가장 뛰어났던 인물들이다. 그러한 인물과 매일 대화하니까 재미있다. 이런 재미 누리는 사람도 한국 사회에 그다지 많지 않을 것 같다. 조직의 보호도 그렇다. 당대의 진실은 조직에 속해 있으면 제대로 바라볼 수 없다. 혼자 있을 때 잘 보인다.(110)

 

* 자연을 퍼주는 독지가 변동해

 

* 뼈대 있는 신선 정재승

 

* 오디오 마에스트로 일명 스님

사찰의 대웅전에 가보면 보통 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왜 세 명의 부처님이 한 조를 이루어 모셔져 있는가? 여기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잇다.

첫째, 깨달음을 이룬 성자의 인격은 두 가지 면이 있는데, 하나는 자비이고, 또 하나는 지혜다. 자비로운 표정은 대체로 미소를 머금은 경우가 많고, 지혜로운 표정은 냉철한 기색을 띠게 마련이다. 이 상반된 두 가지 표정과 역할을 충돌 없이 나타내기 위해서 양쪽에 두 명의 불상을 조성했다고 보는 설이 있다. 오른쪽 불상이 자비라면 왼쪽 불상은 지혜를 담당하는 식이다.

둘째, 오랫동안 수행에 정진했던 노스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들은 이야기다. 가운데 계신 본존불이 도를 닦고 있을 때 옆에 있는 두 사람이 시봉을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중략)

셋째, 깨달음과 예술의 관계를 상징하고 있다는 설이다. 가운데 자리가 깨달은 도인이 앉는 자리라고 한다면, 좌우의 자리는 예술가가 앉는 자리다.(180)

 

소리를 즐기는 것이 음악이다. 음악은 존재를 소리로 표현한 것이다. 존재 그 자체는 빛이고 기쁨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 그 자체는 슬픔이 아니라 기쁨이다. 존재 그 자체는 불성이고 신성인데, 어찌 슬플 수 있겠는가. 그 근원적인 존재의 기쁨을 기쁨으로 표현하는 전달 매체가 바로 소리다. 존재와 기쁨의 중간에 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소리는 그 중간 매개체라고 보면 된다.(185)

 

한 번 득음의 경지에 이르면 영원히 그 경지가 유지되는가. 돈오점수라고 하듯이, 득음 이후에도 수행이 필요한가?”

필요하다. 전라도 명창을 유명한 인물이 바로 임방울이다. 임방울도 이미 득음을 한 상태에서 세상에 나와 여기저기 활동을 하고 다녔다. 그러다 보니 흐트러진 것 같다. 세상에서 바쁘게 활동하다 보면 흐트러진다. 흐트러지면 다시 산에 들어가 폐관하고 정진해야 한다. 다시 추슬러야 하는 것이다. 임방울도 흐트러지면 산으로 들어가 공부한 것으로 알고 있다.(186)

 

예를 들어, 눈이라고 하는 안근은 앞에 있는 사물은 볼 수 있지만, 뒤통수 너머에 있는 사물은 볼 수 없다. 그래서 800공덕이라고 한다. 그러나 소리를 듣는 이근은 뒤에서 나는 소리도 들을 수 있다. 전후좌우의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래서 이근은 1,200공덕이라고 설명한다. 800보다 1,200이 더 크다. 눈보다 귀를 사용하는 것이 전천후 수행법인 것이다.(187)

 

듣는 소리는 대략 네 가지로 구분된다. 법음, 묘음, 해조음, 관음이 그것이다. 해조음은 바닷가의 파도 소리다. 파도 소리는 항상 들린다. 집중하려면 항상 들리는 소리를 택해야 한다. 필자는 우리 나라의 유명한 관음도량이 공교롭게도 모두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해조음을 듣기 위해서다. 동해안에서는 낙산사 홍련암이 유명하고, 서해안에는 강화도 보문사, 남해안에는 남해 보리암이 있다. 한국의 3대 관음도량으로 꼽힌다.(187)

 

일명은 공덕을 쌓는 방법으로 세 가지를 제시한다. 첫째 단계는 물질로 도와주는 단계다. 가장 초보적인 아래 단계에 속한다. 그 다음 단계는 스스로를 정화시키는 것이다. , 담배를 적게 하고, 음식도 가능한 한 육식을 적게 먹고, 또 욕심을 줄이고, 하루에 1시간 이상 혼자 있으면서 자기를 성찰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마지막 단계는 선정력이다. 깊은 삼매에 들어가는 과정이다. 이른바 기도발이 여기에 해당한다. 기도를 일심으로 하면 정신통일의 상태에 들어가고, 정신이 통일되면 정신세계에서 응답을 한다. 자타불이의 경지다. 이 응답이 기도발이다. 기도를 제대로 하면 좋은 인연을 만난다. 이러한 세 가지 차원의 공덕을 쌓다 보면 관상이 바뀌고, 분위기가 바뀌고, 그 사람의 에너지의 파동이 바뀐다.(195)

 

스피커는 크게 두 가지 종류로 나뉜다. corn 스피커와 혼horn 스피커가 있다. 콘 스피커는 소리를 직접 방사하는 방식이다. 직접 방사한다는 말은 증폭 장치가 달려 있지 않다는 의미다. 보통 가정집에서 사용하는 오디오에 달려 잇는 사각형의 네모진 스피커다. 콘형은 바로 말하는 형식이다. 그에 비해 혼 스피커는 넓은 공간과 먼 거리에 음을 전달하기 위해 만든 스피커다. 소리를 드라이브시킨다. 증폭시키는 것이다. 마치 입에다 두 손을 모아 말하는 형식이다. 커다란 나팔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 혼 스피커다. 일명이 만드는 스피커는 혼형 스피커다. 한국적인 소리를 내는 데는 혼형이 적합하다. 일명이 지난 27년 동안 개발하는 데 몰두했던 스피커가 혼형 스피커였다.(199)

 

주변을 관찰해 보면 여자들이 음악은 좋아하지만 오디오 마니아는 없다. 왜 그런가. 일명의 분석에 의하면 여자는 아이를 낳는다. 자기 몸 내부에 이미 세계가 완성되어 있는 것이다. 남자는 아이를 낳을 수 없다. 그래서 밖에서 추구하게 된다. 밖에서 소리를 완성하고자 하는 욕망이 남자들을 오디오에 매달리게 만드는 것이다.(200)

 

일종의 소믈리에다. 포도주를 감별하는 직업이 소믈리에이듯이, 소리를 감별하는 사운드 소믈리에라고 할 만하다. 일명이 겨루고 있는 명품 스피커 회사를 물어보니 몇 군데가 있다. 미국에는 윌슨 오디오가 있다. 미국적인 소리를 내는 데 적합하다. 미국적인 소리는 사실적인 소리에 가깝다. 미국인들의 취향이 반영되어 있는 탓이다. 그랜드슬램 스피커다. 스피커 가격은 약 2억 원을 호가한다. 유럽에는 포칼에서 나온 그랜드 유토피아라는 스피커가 있다. 프랑스 제품인데, 프랑스 제품답게 포도주 냄새가 나는 스피커란다. 이 역시 2억 원 정도 한다. 스위스에서는 골드문트스피커가 유명하다. 독일과의 합작 회사인데, 자연에 가까운 투명한 소리를 낸다.(200)

 

한 생각이 일어나지 않으면 만물에 허물이 없다. 하지만 이 말은 한참 진행된 차원의 이야기다. 일상 생활에 지친 생활인들에게는 먼저 좋은 스피커로 좋은 음악을 들으면서 기쁨을 느끼는 일이 필요하다. 삶의 피로를 푸는 데 소리가 그 역할을 한다. 그러면 단순해지고 소박해진다.(203)

 

* 서울공대 출신의 한의학 전문가 이의원

세상에 양이 있으면 음이 있게 마련이다. 대학 강단에서 통용되는 강단동양학이 있는가 하면, 강호의 무림에서 유통되는 강호동양학도 있다. 내가 생각하는 강호동양학의 삼대 과목은 사주, 풍수, 한의학이다. 사주는 천시를 포함하는 학문이고, 풍수는 지리를 탐색하는 학문이며, 한의학은 인사를 다루는 학문이다.(208)

 

* 미국의 태권도 대부 이준구

진정한 고수는 어떤 사람인가. 다른 사람이 흉내 낼 수 없는 초식을 꼭 필요한 자리에서 꼭 필요할 때 보일 수 있는 사람이다. 말이 많고 이유가 많은 사람은 고수가 될 수 없다. 고수는 순간의 일합을 통해 자신을 증명한다. 그러나 고수는 이 순간의 합일을 위해 수십 년을 준비한다.(232)

 

중년이 되면 척추 아래쪽 명문혈이 뒤로 빠져서 자세가 꾸부정하게 변하는데, 이준구는 명문혈이 안으로 들어가 있어서 앉은 자세가 수직을 이룬다. 명문혈이 곧으면 신장의 정기가 아직 충만해 있음을 뜻한다. (중략) 매일 하는 것이 힘들지 않느냐고 물으니, “규칙적인 반복이 습관이 되고, 습관이 되어야 기술이 된다. 반복해야 세포가 기억한다. 따라서 좋은 습관, 좋은 기술이란 세포가 기억하는 것이다.”라는 답변이 돌아온다.(255)

 

* 비전 전문 명상가 한바다

불경기, 청년실업, 북핵 문제, 저출산은 한국이 직면한 사대 우울증이다.(262)

 

얼굴 표정도 동안에 가깝다. 상대방을 긴장하게 하지 않는 얼굴이다. 이런 얼굴이라면 안시라고 해야 맞다. 얼굴 표정이 상대방을 편안하게 해주므로, 얼굴을 가지고 상대에게 보시하는 셈이다ㅏ. 얼굴에는 늘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264)

 

생각을 쉬면 마음이 맑고 고요해져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게 된다. 불가에서는 모든 것을 놓으라는 방하착이라는 가르침이나, 분별심 또는 양변을 여의어라라는 가르침도 간단히 말해 생각을 쉬라는 것이다. ‘부처도 아니고, 부처 아님도 아니다라는 말이나 불일도 아니고, 불이도 아니다라는 선가의 표현 또한 생각을 통해 진리를 찾고자 하는 사람들의 바로 그 생각을 쉬게 만든다.(264)

 

생각을 버리면 너도 없고 나도 없고, 안도 없고 바깥도 없으며, 때린 자도 맞은 자도 없는 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 생각을 버리는 과정이 바로 명상이다. 명상은 분별하는 마음을 버리게 하고 이 근원의 마음을 되찾게 해준다.(265)

 

보통 일상 생활을 하다 보면 눈, , , 입 등을 통해 들어오는 감각으로 마음이 언제나 왔다 갔다 하게 마련이다. 이렇게 왔다 갔다 하다 보면 근원의 마음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근원으로 소급하려면 일상적인 감각기관을 통해 들어오는 정보에 매달라지 말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느 한 가지에 집중하는 수밖에 없다.(267)

 

고대사회에서는 지금처럼 매일 목욕할 수 없었다. 하지만 목욕이 갖는 의미는 매우 깊었다. 목욕은 성스러운 행사에 가까웠다. 마음의 때를 벗기고, 거듭 난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세례의 진정한 의미이기도 하다. 정신적인 목욕이 곧 물소리를 듣는 일이다. 이렇게 지리산의 피아골처럼 계곡에서 흐르는 물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장소가 근원의 마음을 찾는 데 유용한 장소다. 지금 이 산장도 물소리를 듣기에 아주 적당한 장소다.(268)

 

종자돈이 있어야 씨를 퍼트리고 이자를 치는 것처럼, 집단적인 행복감은 민족의 무의식에 커다란 에너지로 남아 있게 된다. 집단 카타르시스는 재도약할 수 있는 자본금이다. 이 자본금이야말로 긍정하는 힘이 된다. 긍정할 수 있어야 풍류로 갈 수 있다. 우리 나라는 그동안 이 긍정하는 에너지가 막혀 있었다. 월드컵이 긍정하는 힘을 주었다고 본다.(269)

 

비전은 30 ~ 40퍼센트 정도 실현 가능한 잠재력이다. 그러나 비전을 성취할 주체 집단의 몫과 책임이 큰 변수로 작용한다. 주체가 그 비전에 대한 사명 의식이나 주인 의식을 강하게 갖게 되면 30 ~ 40퍼센트의 가능성이 더해지며, 여기에 외적인 행운이 따른다면 비전은 성취된다. 이러한 비전이나 운들은 마치 집 앞 시냇가로 몰려드는 고기 떼와 같다. 고기 떼는 유동적인 에너지다. 만일 고기 떼를 잡을 소쿠리가 엎거나 또는 관심이 없어 그대로 놓아두면, 고기는 결국 다른 곳으로 헤엄쳐 가버린다. 비전의 성취를 위해서는 소명 의식과 현실적인 행동력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중요하다.(275)

 

가진 것 없이 이 산 저 산의 산장과 민박집이 거처일 뿐인 그는 한국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비전들을 축포처럼 터뜨리고 있다. 그와 1 2일 동안 계곡의 물소리를 들어가며 대담을 나누고 나니 왠지 모를 희망이 생긴다. 너무 걱정할 일이 아니다.(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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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미’ 너머의 미국?

〈Made in USA〉가 보여준 기 소르망의 통찰은 공허하다

▣ 유현산 기자 bretolt@hani.co.kr

9·11 3주년이 다가오고 있다. 이건 슬픈 얘기다. 이 비극적 사건의 주년을 기념하는 것은 과거가 현재의 목을 조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9·11의 몇 주년까지 꼽아야 할까.


프랑스의 칼럼니스트 기 소르망이 지은 〈Made in USA〉(문학세계사 펴냄)는 9·11에 맞춰 불어·영어판과 거의 동시에 한국어판도 출판됐다는 점에서(한국에 관심 많은 지은이가 프랑스문화원을 통해 출판 의사를 타진했다고 한다), 기 소르망이라는 이름이 한국에서도 꽤 상품성이 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끌 것 같다. 지은이는 이 책이 반미의 시각을 넘어서 “우리(유럽)와 그들(미국)과의 차이”를 탐구한다고 밝혔다. 확실이 이 책은 ‘반미’에서 멀리 벗어나 있다. 그러나 그것뿐이다.

기 소르망은 특유의 입버릇대로 미국의 ‘문명’을 성찰하고자 한다. 따라서 미국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이 몽땅 등장하고, 이것들을 관통하는 메커니즘이 분석된다. 그 메커니즘의 가장 중심부에 국가나 사회보다 우선하는 적극적인 개인주의가 있다. 그리고 캘빈주의를 바탕으로 한 종교성, 민주주의와 민주주의의 세계 전파라는 열망, 자유주의와 보수주의의 대립, 인종의 융합 등이 차례로 자리잡고 있다.

늙은 유럽의 지식인으로서 소르망은 미국을 ‘타자’로 관찰하고 있다. 그래서 이 ‘신기한 물건’에 대해 꽤 재미있는 분석들을 내놓는다. 미국에서 자유주의와 보수주의의 대립은 정치 영역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절반의 미국인이 다른 절반의 미국인들과 싸우는 문화 전쟁”이다. 미국인들은 지식인보다 운동 선수를 대접하듯, 지성보다 몸에 집착한다. 미국 시민들은 캘리포니아주지사 소환의 예에서도 드러나듯, 직접민주주의를 통해 정부에 반항하는 것을 즐긴다. 유럽 정치가 대중을 선도한다면 미국 정치는 항상 대중을 따라가야 한다.

그런데 기 소르망의 재치는 신흥 종교, 흑민 문제, 이민 문제 등에서 성급하게 긍정적인 전망들을 내놓으면서 부서져버린다. 게다가 10장 ‘제국적 민주주의’에 와서는 목소리가 아예 몽롱해진다. 소르망에 따르면 미국의 제국주의는 항상 민주주의의 전파를 위한 소명의식에 기반을 둔다. 미국은 유럽과 달리 중동 국가들의 민주화를 위해 위험을 감수한다. ‘하드 파워’에 입각한 군사력 사용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쯤되면 LA에서 열리는 눈물 범벅의 부흥회 같은 종교적 열정이다. 할렐루야!

소르망의 문제는 미국에 대한 다양한 비판을 ‘반미’라는 하나의 근본주의로 치환해버린다는 데 있다. 미국을 바로 보기 위해 ‘반미’를 피해야 한다는 말은 그래서 공허하다. 기 소르망은 세계를 어슬렁거리는 ‘반미 유령’을 격퇴해야 한다는 강박증에 시달리고 있지만, 이 유령은 그의 악몽 속에만 존재한다. 무엇보다 소르망은 ‘한국 걱정’을 안해주는 것이 좋겠다. 효순·미선양의 죽음으로 한국을 위해 죽은 3만3천 명의 미국 병사들이 갑자기 덜 중요하게 여겨졌다느니, 미군이 떠나면 두 개의 한국은 서로 싸우고 일본도 전쟁에 개입할 거라느니, 한국 반미주의자들은 반미적 태도를 보여줌으로써 한국에서 권력과 특권을 얻는다느니 하는 말은 맨 정신으로 썼을까? 정말 동시 출간을 할 정도로 한국에 관심이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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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워, 부끄러워…

다자이 오사무 단편선 <산화>가 보여주는 미의식

▣ 유현산 기자 bretolt@hani.co.kr


“참는 거야. 이까짓 건 아무것도 아냐.”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던 날 사내는 하루하루를 기쁜 마음으로 살자고 다짐하며 ‘새신랑’이 된 것 같은 기분에 젖는다(<신랑>). “한줄의 애국시도 쓰지 못한다. …골똘히 생각하다가 토해낸 말은 모양 사납게도 ‘만세! 죽어버리자’였다.” 전선에서 보내온 병사들의 작품은 형편없었지만 소설가는 ‘비굴하게도’ 그것들을 출판사에 추천한다. 그리고 자신이 ‘병종’이라고, 벙어리 갈매기 같은 존재라고 생각한다(<갈매기>). 소설가의 집을 드나들며 문학을 배우던 학생이 전선에서 옥쇄(전장을 사수하다 전원이 사망하는 것)했다. 평소 학생의 시를 신통찮게 생각해왔던 소설가는 그가 보내온 마지막 편지를 읽으며 생각을 고쳐먹는다. “건강하신지요./ 먼 하늘에서 문안드립니다./ 무사히 임지에 도착했습니다./ 위대한 문학을 위하여/ 죽어주십시오./ 저도 죽습니다./ 이 전쟁을 위하여.”(<산화>)

일본 근대의 폐허를 헤맨 소설가 다자이 오사무의 단편선 <산화>(김욱 옮김, 책이있는마을 펴냄)가 나왔다. 다자이 오사무의 마니아라면 싱거울 테고, 세계문학 코너에서 우연히 <인간실격> 정도를 구경한 독자라면 단편의 현란한 매력에 빠져들 것이다. 단편‘선’이란 늘 그런 것이다. 오사무의 인생은 그 자체가 소설처럼 유통된다. 그는 버지니아 울프보다 더 끔찍한 ‘자살 중독증’을 앓았다. 열아홉에 처음 자살 시도를 했고, 동경대학 시절 술집여자와 함께 바다에 투신했다가 혼자 살아남았고, 알코올과 진통제 중독에 빠져들었으며, 마침내 39살의 나이로 카페 여급과 함께 저수지에 투신해 생을 마쳤다. 가해자의 나라에 살았던 이 피해자의 생은 자신의 주인공들과 그리 멀리 떨어져있지 않다. 그들은 세계가 모조리 추악한 거짓이라는 무서운 진실 앞에서, 도피한다. 그들은 자신 앞에 펼쳐진 세계를 무서워하고, 이렇게 무서워하는 자신을 병신, 비굴한 인간이라 질책하면서 내면 속으로 숨는다. 그것은 더 이상 파고들어갈 곳이 없을 때까지 계속되는 삽질이다.

그러나 다자이 오사무를 만만하게 보면 안 된다. 그는 악의적인 만담가다. 그의 소설은 무대 위에서 관객을 향해 내뱉는 1인칭 독백, 즉 ‘타자’를 의식하며 주절거리는 고백이다. 소설의 화자는 부끄러움에 떨며, 소곤소곤 우리에게 자신의 신세한탄을 늘어놓다가, 돌연 심술궂은 웃음을 띠고 우리를 조롱하기도 한다. 여기에 오사무 소설의 현란함이 있다. <앵두>의 사내는 “터놓고 말해서 이 소설은 우리 부부싸움 얘기인 것이다”라고 운을 뗀 뒤 자신을 옴짝달싹 못하게 옭아매는 아이들과 젖가슴 사이를 ‘눈물의 골짜기’라고 말하는 아내의 비루한 삶을 늘어놓는다. 그러곤 아내가 아이를 들쳐업고 배식 줄을 서는 사이 술집으로 달려가 귀한 앵두를 씹어대면서 이렇게 중얼거린다. “자식보다 부모가 소중하다, 자식보다 부모가 약하다.”

<사양>의 상실감과 슬픔과 불안을 거쳐 오사무는 마지막 작품 <인간실격>에서 더 이상 파고들어갈 곳 없는 절망에 이른다. 그가 시종일관 우리에게 한 가지 ‘근대적인’ 질문을 던진다는 사실만은 분명해 보인다. 세계의 비참 속에 던져진 인간에게 구원은 있는가. 물론 장렬히 ‘옥쇄’한 병사들의 참호 속에는 없다. 오사무가 뛰어든 시퍼런 물에도. 그리고 우리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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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
공지영 지음 / 황금나침반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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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유명한 저자의 오랜만의 산문집이다. 이 산문집의 특장으로는 즐겨읽었던 시 한 편을 통해 자신의 지난 기억이나 생각, 또는 고민 등을 풀어놓는 방식으로 쓰여진 것이다.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시인들의 시 한 편을 통해서 그 의미와 삶을 자상하게 소개시켜준 점(아마 이 책을 통하지 않았다면, 단 한번도 '압둘 와합 알바야티'라는 인명을 검색하지 않았으리..^^) 등 유익한 내용이 가득하고, 또한 인생과 사랑에 대한, 상처에 대한 깊은 천착은 실로 (이 표현이 맞을지는 모르겠으나) 절절하다.

 체 게바라의 <나의 삶>을 포함하여 다수는 그 한 편의 시에 대한 작가의 시선과 의미를 통해 나름대로 재해석해보는 즐거움을 주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일부는 '시와 서간체의 글이 무엇으로 연결되는 것인지.. ' 하는 혼란을 주기도 한다. 해석의 다양성으로, 또는 그 시보다 더 절절한 작가의 회상에 무게중심을 둔다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아닐 것이다.

단, 한가지 혼란스러운 것은... 'J'에 대한 해석이다. 물론 작가는 독실한 카톨릭 신자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혹 J가 JEJUS의 이니셜이기도 하겠다 싶은 대목이 자주 등장한다.

J...좀 더 단조로운 생활을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고, 한적한 곳으로 가야 인간이 가진 마음의 찌꺼기들이 밖으로 잘 나오게 하셨나 싶기도 했지요.(79쪽)

J, 당신을 그리워하다 병도 든 적 없습니다. 당신을 그리워하고 사랑하다가 마음 한 번 제대로 찢어져 본 적 없습니다. 그녀가 20세기의 성녀라는 사실은 이해됩니다. 다만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온 마음을 다해 마음이 찢어지는 것만으로도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실은 성녀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143쪽)

반면에 그렇지 않아보이는 대목도 있다.

J, 보내주신 편지 잘 받았습니다..(중략).. J, 이 편지를 읽으며 마음 아파하실 당신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픕니다. 당신은 새벽에 일어나 시몬느 베이유의 글을 읽으며 저를 생각했다고 쓰셨지요.(99~100쪽)

인격화된 신앙체로 보던, 아니면 둘 다를 포함하는 다양한 함의를 지닌 추상화된 그 '무엇'으로 보던 독자의 몫일 수도 있겠으나, 형식의 틀로써 서간체를 택한 입장에서는 보다 친절할 필요는 없었는지 하는 아쉬움이 없진 않다. 혹 다른 해석이 있으신 분들은 어떠신지 궁금하기도 하다.

산도르 마라이, 압둘 와합 알바야티.......... 그리고 충격적인 규모의 책 광고도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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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방 - 우리 시대 대표 작가 6인의 책과 서재 이야기
박래부 지음, 안희원 그림, 박신우 사진 / 서해문집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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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

여기 실린 작가들만큼 넓직하고, 책으로 가득 넘치는 서재는 아니더라도, 책 속에 묻혀 생각을 키우고 보다 충만한 시간을 누리고 싶은 생각은 누구에게나 희망사항일 것이다. 규모보다는 그 공간의 의미에 대한 갈망이리라. 그러한 갈망과, 언젠가 갖게 될 공간에 대한 '꿈꾸기'를 위해서라도 이 책의 기획은 상당히 매력적이다.

그러나 작가, 특히나 유명작가들에게 '서재'란 무엇인가? 특히나 전업작가인 경우에는 자신의 온갖 사유와 탐구, 정리와 창조를 위한 '삶의 가장 치열한 공간'이 아닐까? 그러한 생각에서 내 나름의 고약한 잣대로 줄을 세워보면 어떨까? 강은교 > 김용택 > 공지영 > 신경숙 > 이문열...(김영하는 연구실만을 보았으니 번외로 치고..)

오랜 기간 문학판을 취재를 했던 저자의 경험은 인터뷰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발현되고 있지만, 전체적인 기획의도를 살펴볼 수는 없겠지만, 작가들의 세계를 자연스럽게 드러내어 그의 발자취를 되돌아보고, 또 나갈 길을 살펴보기에는 아쉬운 대목이 있다. 단지 방구경은 아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 말이다.

또 한가지.

선정 기준이 무엇이었을까? 강은교, 이문열, 김용택 등의 선배작가들과 40대 중반의 공지영, 신경숙, 김영하에 이르기까지, 다양성이라는 면에서는 수긍이 가기도 하지만, 왠지 한 권에 담기에는 뭔가 깊이와 넓이에 있어서 조화롭지는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얻을 수 있었던 작가들의 목소리.

강은교 시인의 '현재시단'에 대한 고민이 묻어나는 한 대목.

"학생들이 요즘 시 안 쓰는데, 시 쓰는 사람들도 잘못한 점 많았고요. 너무 어렵게 쓰려고 하는 거예요. 자기를 위해서만 쓰고 있지요./시에는 자기를 위해 쓰는 기능이 있고, 타인에게까지 가지고 가는 기능이 있는데, 자기를 위해서 쓰는 일에서 멈춰 버리고 말아요. 그 사람이 그 다음에 할 수 있는 일은 도통하는 일이지요. 그러니 보통 사람들이 따라갈 길이 있나. 결국 시를 안 읽지요."(130~131쪽)

또한 시에 대한 열정.

'아, 언제 저 매미처럼 울 수 있을까. 매미의 유언인 저 울음. 언제 늘 마지막 같은 글을 쓸 수 있을까. 안녕히.'(139쪽)

또한 아이들 교육과 관련한 교육자 김용택의 충고.

"애들에게 글 쓰는 것, 그림 그리는 것 가르치면 안 돼. 잘 보는 법을 가르치는 거여. 산, 나무, 농사일하는 거, 꽃이 피고 비가 오고 눈이 오는 걸 자세히 보게 하는 거여. 그래야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지./도시에서는 그림 그리는 기술을 가르쳐. 기술이라는 건 금방 애들이 귀찮아 해. 맘대로 그렸으면 좋겠는데 '이렇게 그려라, 저렇게 그려라'  하는 거야. 잘못 그리면 혼나. 잘 그리는 놈은 성질나니까 하기 싫어져버리는 거야. 아이들 상상력을 죽이면 안 돼. 나는 미술학원에서 배워 그린 그림을 아주 싫어해."(220~221쪽)

* 노트(3쇄)  135쪽 2행 찾이리 -> 찾을 이 또는 찾을리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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