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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시장 - 정연홍

키를 꽂으면 부르르 몸을 떤다

하품을 하며 일어나는 바퀴 달린 코뿔소

사내는 엑셀레이터를 깊이 밟는다

드문드문 불 켜진 아파트

주차장을 빠져나오는 그들의 실루엣

어둠속 고양이들이 청소부의 빗자루를 툭툭, 건드리는 사이

간밤의 오물자국들이 바퀴에 눌려 흩어진다

골목길이 급히 허리를 휠 때마다

조수석 여자가 자리를 고쳐 앉는다

뒤로 젖힌 그녀의 얼굴에

선잠이 머리칼처럼 흘러내린다

사내는 여자를 돌아보고 잠시 웃는다

저들이 살아왔던 길들도 저렇게 급커브였을까

수금되지 않던 수수수 단풍잎

밤이 되면 안방까지 점령하던 빚쟁이들,

이삿짐을 꾸리던 그날 밤도

골목길은 휘어져 있었다

 

새벽 야채시장, 밤새 달려왔을 초록의 잎들이

사내의 트럭으로 옮겨진다

아무렇게나 던져 넣어도 척척 자리를 잡고 정좌하는 배추들

부부도 세월에 차여 이리저리 떠돌면 저리 될까

하지만 그들도 이제는 트럭에 오를 때마다

때 묻은 자리에 편안히 앉을 수 있다

사는 것은 자리 하나 제대로 잡는 것

코뿔소가 푸푸거리며 야채시장을 돌아

도시를 향해 헤엄쳐 간다

- <시평> 22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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쑥국 (부제: 아내에게) - 최영철

참 염치없는 소망이지만

다음 생에 딱 한번만이라도 그대 다시 만나

온갖 감언이설로 그대 꼬드겨

내가 그대의 아내였으면 합니다

그대 입맛에 맞게 간을 하고

그대 기쁘도록 분을 바르고

그대 자꾸 술 마시고 엇나갈 때마다

쌍심지 켜고 바가지도 긁었음 합니다

그래서 그래서

지금의 그대처럼 사랑한다는 말도 한번 못 듣고

고맙다는 말도 한번 못 듣고

아이 둘 온 기력을 뺏어 달아난

쭈글쭈글한 배를 안고

그래도 그래도

골목 저편 오는 식솔들을 기다리며

더운 쑥국을 끓였으면 합니다

끓는 물 넘쳐 흘러

내가 그대의 쓰린 속 어루만지는

쑥국이었으면 합니다

- <시평> 22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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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푸른고개 2006-08-29 1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들은 이렇듯 반성이라도 하면서 사는데...^^
 

럭키머니 - 윤기묵

베트남 구정명절 테뜨 상여금 주면서

100달러 속에 2달러 한 장씩 넣어 주었더니

100달러는 안중에 없고

2달러만 신기해하던 기억이 있어

혹시 이 돈 가짜 아니냐고

100달러와 나란히 이리저리 살피다가

두 지폐 속 사내얼굴이 어쩜 이리 다르냐고

아무래도 가짜돈 같다며 즐거워하던

기억 속에 그들이 있어.

 

캄포디아 시엠립 평양랭면집

어머니 처녀시절 사진 속 옛동무 같은

평양 아가씨 김박꽃

냉면 값에 웃돈으로 2달러 한 장 주었더니

남모르게 들쭉술 챙겨주며

아저씨를 오빠로 다시 불러주던 기억이 있어

그 술 폭탄주로 마시고

똔레삽 호수에 평양음식 다 토해냈던

속 쓰린 기억 속에 그녀가 있어.

- <시평> 21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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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놈 되자면 - 신진

입이 궁금한 날에는

마을돌이 트럭 어물전 시간 맞추어

냉동 오징어나 전어 한 오천 원어치 산다.

물에 풀어 얼음 씻어내고

칼질 듬성듬성 대장균, 비브리오균 죽인다.

괜찮을까, 의심하는 이 있으면

소주하고 먹으면 탈 없다고 웃는다.

탈이 나더라도 혼자 죽기야 하겠는가.

촌놈 되자면 이 정도 목숨 걸 일 더러 있다.

- <시평> 21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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